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200화 (200/217)

〈 200화 〉 유민의 지난 이야기 ­ 2027년 9월 29일

* * *

­ 오후 8시, 일본 치바현 치바시 일대

고소장을 접수했지만 아직 경찰로부터 피해자 조사를 받으러 오라는 연락은 오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아이는 공식적인 스케줄이 없는 것 같은데도,

매일 같이 민재에게 연락해 그를 불러냈다.

“(일본어) 변호사님! 저 오늘 어디 좀 잠깐 다녀와야 하는데 저랑 동행해 주실 수 있으세요?”

“(일본어) 변호사님, 오늘은 말이에요~! 일 때문에 도쿄를 가야 할 것 같은데 함께 가주시겠어요?”

그래서 나가보면 일은 무슨 개뿔,

그냥 단둘이 데이트하다 돌아오기 일쑤였다.

하지만 민재는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싫지는 않았다.

오늘도 사무실에 있는데 역시나,

아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일본어) 변호사님~! 오늘은 말이에요~! 우웅... 아! 저 다음 촬영 위해서 옷이랑 화장품 사러 가야 하거든요? 그래서 쇼핑몰 가려는데 혼자 가기 무서워서... 헤헤. 같이 가주실 수 있으시죠?”

“(일본어) 하하, 원래 촬영 때 입는 옷 같은 건 촬영하는 쪽에서 준비해주는 거 아닌가요?”

“(일본어) 아...! 그렇기도 한데 모델이 직접 자신이 입을 옷을 가져갈 때도 있어요... 진짜루요~!”

딱히 신뢰가는 말은 아니었지만

애초부터 그녀의 제의를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일본어) 네, 그럼 제가 댁으로 모시러 가죠. 몇 시까지 가면 될까요? 네, 그럼 그때 뵈요.”

통화가 끝나자 자리에 앉아 있던 정경호가 얄밉다는 듯이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회사 (국군정보사령부)에 보고해서 얼른 강 과장님한테 오더 좀 내려달라고 하든가 해야지 원... 누구는 새빠지게 일하는데 누구는 맨날 건물주 딸내미랑 데이트나 하러 나가고... 눈꼴셔서 못 봐주겠네, 증말~!”

“하하, 이것도 일이니까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일은 무슨 일? 뭐, 건물주 딸내미 꼬시는 게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에요?”

“우리 CR팀 요원들 일본 건너올 때까지는 건물주 딸내미와 관계 잘 유지하고 있어야 하니까 좀 봐주세요.”

정경호가 파일철 하나를 그에게 던져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거 오늘 아침에 국정원으로부터 내려온 거예요. 아마 강 과장님한테도 조만간 진짜 오더 내려올 거 같으니까 읽고 참고하세요.”

민재가 파일철을 펼쳐 보았다.

“몬주 원자로 재가동 확인...? 거기는 몇십 년 전부터 운영 중단된 곳 아닙니까?”

“그래도 거기 있던 원자로는 폐쇄 안 하고 그대로 뒀었죠. 그러다 얼마 전부터 비밀리에 가동을 다시 시작했다고 하는데... 거기 침투한 국정원 요원 말로는 전력 생산을 위해 다시 가동하는 건 분명 아닌 것 같다고 하네요.”

“전력 생산을 위한 게 아니라면...?”

“플루토늄을 추출하려는 거겠죠.”

일반 원자력 발전소에 핵연료 재처리 시설이 있다면 우라늄에서 플루토늄을 분리 추출하는 건 시간 문제의 일이다.

즉,

일본이 언제 핵무기를 만들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강제 징병을 한다 해도 지금 자위대 전력만으로는 우리 한국군과 정면 대결을 벌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죠. 그럼 일본이 믿을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 방법 뿐. 큰 형님처럼 모시는 미국이 중간에서 중재를 해주던가, 아니면 그들도 핵무기 카드를 들고 한반도에 핵 쏘겠다고 우리나라를 협박하든가.”

정경호의 말에 민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북한이 했던 방법을 일본도 똑같이 쓰는군요?”

“뭐 둘 다 거기서 거기인 놈들이니까.”

정경호가 그의 손에 들린 파일철을 도로 가져가며 말했다.

“아무튼 상황이 이리 돌아가고 있으니 건물주 딸내미랑 둘이 너무 칠렐레 팔렐레 싸돌아다니지는 마요. 회사에서 언제 호출 올지 모르니까 핸드폰 대기도 잘 하구요.”

“네, 명심할게요!”

“그리고 건물주 딸내미한테는 경찰 피해자 조사받으러 갈 때 강 과장님이 아니라 제가 동행할 거라고 미리 말해줬죠? 일본 경찰에 신원 노출되면 곤란하니까 어디 가든 눈에 띄지 않도록 몸 사리셔야 합니다.”

“당연하죠! 걱정하지 마세요!”

민재는 안심하라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민재의 예상대로, 두 사람은 오늘도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초반에 아이를 만나러 갈 때는 정장 차림을 하고 나갔지만

만남의 목적을 대충 눈치채고 나서부터는 청바지에 후드티 같은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이도 그를 만날 때마다 꼭 예쁜 옷을 갖춰 입고 한껏 꾸미고 나오곤 했는데,

아이돌 출신인데다가 모델로도 활동하는 현역 연예인이라 그런지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가리곤 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치바에 있는 쇼핑몰 몇 개를 돌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의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일본어) 변호사님! 배고프지 않으세요?”

“(일본어) 그러고보니 벌써 저녁 먹을 때가 넘었네요. 그럼 우리 저녁 먹으러 갈까요?”

“(일본어) 네! 저녁 먹으러 가요! 변호사님,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두 사람은 쇼핑몰 주차장에 있는 차에 쇼핑한 것들을 넣어두고는,

식당들이 모여 있는 거리로 향했다.

이제 아이는 걸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민재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민재는 처음에 아이와 팔짱 끼는 게 좀 불편했다.

싫다는 게 아니라 진짜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게,

팔짱을 낄 때마다 그의 팔에 아이의 커다란 가슴살이 뭉클하게 와 닿는데...

그럴 때마다 손끝까지 전기가 오는 것처럼 찌릿찌릿해지고 얼굴까지 빨개져서 곤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본어) 아, 죄송해요...! 제가 어려서 분리불안증세를 겪었는데 누군가 옆에 있는 사람하고 손을 잡거나 팔짱을 껴야지만이 안정되는 습성이 있어요...! 지금도 스토킹을 당해서 그런가 예전 불안증세가 다시 도진 거 같아요...!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니까 이해해 주세요...!”

민재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면 아이는 미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결국 이렇게 그는 아이에게 팔짱을 내주게 되었다.

‘조만간 손도 잡아달라고 할 지도.’

그렇게 민재는 아이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식당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일본어) 어이 어이~! 저거 나루사와 아이 아니냐?”

“(일본어) 우효~~~!!! 몸매 봐라, 개쩐다~! 얼굴 가리고 있어도 다 알 수 있다니까?!”

갑자기 뒤에서 기분 나쁜 불량스러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일본 양아치들, DQN들이 껄렁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폭주족을 연상시키는 가죽점퍼를 입은 놈부터 촌스러운 색의 츄리닝을 입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놈까지,

숫자는 모두 다섯 명.

그런데,

그 중 손에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를 든 녀석이 둘이나 있었다.

다른 놈들도 등 뒤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 했다.

‘아이가 얼굴을 모두 가리고 있었는데 한 번에 알아봤다고?’

지금 아이는 모자와 마스크 사이로 눈만 살짝 내밀고 있는 중.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녀를 보면 그냥 몸매 예쁜 여자구나, 하고 생각하지,

단방에 나루사와 아이라고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문득,

지난번 아이의 집에 갔을 때 그녀의 아버지 요시노부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구레들이 요새 더 욕을 먹는 건 십대 청소년들을 범죄에 많이 끌어들이기 때문이에요. 청소년들은 촉법소년 법률 때문에 강하게 처벌하기 힘든데다가 꼬리 자르기도 쉬워서 저들이 적극 이용한다고 하지요. 이 지역 불량 청소년들 중에서도 가네무라나 타미야 등 헬스파이브 멤버들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놈들이 많다고 해요. 당연히 그들도 그런 불량 청소년들을 자신들 조직으로 끌어들이는데 열성을 보이고 있구요.]

민재는 얼른 아이를 등 뒤로 보내고,

그들을 막기 위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아이가 그의 옷소매를 붙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본어) 변호사님, 어떻게 하시려구요...?”

“(일본어) 지금부터, 나루사와 씨를 경호하려고 합니다.”

“(일본어) 아, 아니... 그냥 제가 경찰을 부를까요?”

그녀가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려 하자,

민재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어) 아니, 잠시면 됩니다.”

어느새 DQN들은 두 사람 가까이로 다가와 있었다.

다섯 명이 그들을 애워 싸려는 찰나,

쉭!

순간, 민재의 몸이 그들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일본어) 나니...? 끄어억!”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던 녀석의 목이 크게 옆으로 돌아가고, 그와 함께 몸뚱이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벌려진 그의 입에서 하얀 치아 서너 개가 붉은 핏물과 함께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놈의 몸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

민재의 손이 옆에 있던 놈의 어깨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슉! 퍼버벅! 콱!

소리는 분명 서너 대 때리는 소리가 났는데,

너무 빨라 어떻게 때렸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두 번째 DQN의 몸이 민재에게 멱살을 붙들린 채로 축 늘어졌다.

그대로 실신한 모양이었다.

“(일본어) 칫! 키사마~!”

뒤에 있던 놈이 손에 들고 있던 두꺼운 굵기의 체인을 휘둘렀다.

체인은 민재의 등을 향해 힘껏 날아가는 듯 싶더니,

파악!

민재가 붙들고 있던 DQN 녀석의 등짝을 강하게 후려갈기고 말았다.

체인을 들고 있던 놈에게로, 기절한 DQN의 몸뚱이가 날아왔다.

“(일본어) 우욱!”

날아온 동료와 부딪히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어느 틈에 다가온 건지,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민재와 눈이 마주쳤다.

“(일본어) 우, 우소다...!”

민재는 그의 뒤통수를 손으로 붙들고는

그의 코를 팔꿈치로 찍어버렸다.

팍! 팍!

“(일본어) 끄아아악~!”

그는 코와 입에서 피를 뿜어내는 녀석을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곧장 다른 놈들을 처리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일본어) 아악~! 괴, 괴물 같은 놈~!”

“(일본어) 저놈 뭐야? 그냥 변호사라며?!”

남은 두 놈은 제 동료들이 쓰러져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고는 손에 든 둔기를 버리고 도망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고,

민재가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

“(일본어) 저녁은 다른 곳으로 가서 먹도록 하죠! 일단 차 있는 데로 갑시다!”

“(일본어) 아, 그치만...! 경찰을 부르지 않아도 될까요?”

“(일본어) 이번 일로 경찰에 연루되게 되면... 전 한국으로 추방될지도 모릅니다. 이 일도 엄연히 폭행에 해당되는 일이니까요.”

“(일본어) 아아...!”

“(일본어) 그리고 지금, 확실히 나루사와 씨를 감시하는 놈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놈들도 그들이 보낸 걸 거예요.”

“(일본어) 가, 감시요? 저를요?”

“(일본어) 아마 그 야쿠자, 아니 한구레 놈들일지도 모르죠. 아무튼 어서 여길 빠져나갑시다. 사람들이 더 몰려들기 전에.”

민재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차를 주차해 놓은 쇼핑몰을 향해 내달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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