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97화 (197/217)

〈 197화 〉 유민의 지난 이야기 ­ 2027년 9월 23일

* * *

­ 오전 11시, 일본 치바현 치바시 주오구 일대

민재는 현지 요원 정경호의 도움을 받아 어제 있었던 ‘뜻밖의 퀘스트’에 대한 해답을 준비했다.

아이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대응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려고 하자,

“(일본어) 아아, 제가 직접 가서 들을게요~!”

“(일본어) 네? 굳이 안 오셔도, 전화로만 해도...”

“(일본어) 아뇨, 아뇨~! 저 거기 사무실에서 가까운데 살아서 금방 갈 수 있어요~! 지금 바로 준비해서 갈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오~!”

안 와도 된다는데 기어이 사무실로 찾아오겠다고 한다.

민재도 그녀가 방문하는 게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예쁜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것도 좋았고.

어제 이곳 사무실 뒤편에 마련된 숙소에서 쉴 때,

자연스럽게 인터넷으로 일본에서 아이돌 걸그룹으로 활동했다던 나루사와 아이의 사진과 보도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최근에는 모델 일을 주로 하고 있다더니,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들 대부분이 수영복이나 속옷을 입은 사진들이었다.

이른바 ‘그라비아 모델’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옷을 너무 크고 헐렁한 걸 입고 와서 좀 뚱뚱한 편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수영복, 속옷을 입고 찍은 아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베이글 그 자체였다.

정말 동양인 맞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가슴하며 통통하고 예쁜 엉덩이와 허벅지까지.

정보사 요원으로 활동하느라 바빠 여자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었던 없던 민재조차

그녀의 모습에 난생처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본어) 늦어서 죄송합니다아~!”

그녀는 정말 30분도 안 되서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곳까지 뛰어왔는지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흘러내리는데,

동네 마실 나온 것처럼 크고 헐렁한 티셔츠에 긴 바지를 입고 왔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제법 고른 티가 나는 블라우스에 짧은 치마를 예쁘게 차려입고 있었고, 얼굴에도 풀메이크업에 긴 머리까지 고데기로 잔뜩 힘을 줘 말고 온 모습이었다.

그녀가 도착하자 사무 일을 맡은 여직원이 (일본 국적을 가진 재일 교포로 국군정보사령부에 고용된 계약직이다.) 그녀에게 얼음 담긴 시원한 음료수를 가져다 주었다.

“(일본어) 어서 오세요, 나루사와 씨! 답변 준비가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민재도 ‘변호사처럼 보이기 위해’ 정장 바지에 하얀색 셔츠를 입고, 고급 넥타이에 타이핀, 커프스까지 하고 나왔다.

185cm가 넘는 훤칠한 몸에 두른 하얀 셔츠 너머로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 몸매가 보일락 말락 보일락 말락 살짝 살짝 비쳐 보이고,

여름 내내 전쟁터를 누비느라 햇볕에 그을린 탓에 더욱 또렷이 보이는 눈코입 이목구비까지.

웬만한 한류 스타 못지않은 포스를 뿜어내는데,

그를 본 아이의 얼굴도 금세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일본어) 일본에도 한국처럼 스토커 행위 등의 규제 등에 관한 법률이 있더군요. 이 법률의 제 2조 4항을 보면 한 사람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행위를 하거나 위치 정보 무승낙 취득 등을 반복하는 행위를 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만엔 (한화 약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재범을 저지르거나 반복적으로 스토킹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는 법원이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릴 수도 있고, 이 명령을 위반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엔 (한화 약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민재는 진짜 변호사처럼 보일 만큼 유창하고 전문적인 말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일본어) 우선 경찰에 고소장을 접수하는 게 먼저겠지요. 원하신다면 저희가 고소장을 준비해드리고 피해자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서에 가실 때에도 함께 가서 도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어) 그럼... 변호사님이 나중에 재판을 받을 때에도 저와 같이 가주셔서 변호를 해주시게 되는 건가요?”

“(일본어) 경찰에 고소를 하게 되면 형사재판이 되기 때문에 사건이 접수되고 나서부터는 일본 경찰과 검찰이 담당하게 될 겁니다. 그 야쿠자가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판사에게 요청하는 일도 검사가 하게 되겠지요.”

“(일본어) 아아... 그렇군요...”

“(일본어) 나루사와 씨도 증인으로 출석할 때 외에는 재판에 직접 갈 일은 없을 겁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저희가 피해자의 변호인 자격으로 재판에 함께 출석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이가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일본어) 사실... 막상 고소를 하려니까 저도 겁이 많이 나요. 그 사람이 저나 저희 가족한테 해코지하면 어쩌나 해서 말이죠. 매니저님도 그게 무서워서 그냥 그 사람과 합의할까 생각 중이시래요.”

“(일본어) 당연히 염려되시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계속 나루사와 씨를 괴롭힐지도 모릅니다.”

“(일본어) 맞아요, 그래서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고민이 많아요. 그 사람, 그냥 일반인도 아니고 이 지역에서 알아주는 야쿠자라서요... 아, 변호사님은 한국에서 오셔서 일본 야쿠자들이 얼마나 나쁜 사람들인지 잘 모르시지요?”

“(일본어) 1990년대 나온 폭대법 (일본 형법 중 ‘폭력단 대처법과 폭력단 배제 조례’의 준말) 이 시행된 이후로 야쿠자들이 많이 줄어들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일본어) 겉보기엔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야쿠자들이 없어지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연예계나 대부업계 같은 사업 하는 사람들로 위장해서 더 많은 나쁜 짓을 하고 있기도 해요.”

어제 알아본 아이의 전 소속사도 그런 부류였다.

그녀가 소속되었던 연예 기획사는 이 지방에 연고를 두고 있는 야쿠자 조직이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였는데,

그들은 그것 말고도 불법 도박장 및 사채업 등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유력한 정치인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했고,

사채업을 굴릴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 돈 많은 사업가들과도 친목을 다지려 부단히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접대하는 자리에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데려오는 건 어찌 보면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관례와도 같은 일,

야쿠자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데리고 있는 아이돌 걸그룹 멤버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민재가 연예계 가십을 다루는 사이트를 뒤져 알아보니

야쿠자들은 소속사 아이돌들에게 술자리 시중은 물론,

그 후에 이어지는 잠자리 시중,

후에 사적인 만남까지 지속해서 강요했다는 말이 있었다.

아이처럼 아빠가 건물주라서 아이돌 걸그룹 안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더러운 바닥을 단호히 털고 나올 수 있었지만,

유명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 소위 말해 ‘뜨기 위해 목숨까지 건’ 대부분의 멤버들은 야쿠자들의 제안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고,

심지어 협박에 굴복해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일본어) 저도 그룹에서 탈퇴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협박을 당했었다구요. 게다가 그 사람들이 인터넷에 저에 대한 이상한 소문도 퍼뜨리고 그랬는데...”

아이는 그게 어떤 소문인지 말하기 곤란했는지, 잠시 말을 끊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일본어) 이번에도 또 그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을까 많이 걱정되요...”

민재가 두 손을 모으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일본어) 혹시 그 사람들이 집에까지 찾아오고 그러나요?”

“(일본어) 예전에 한 번 있었어요. 그때 저희 엄마가 경찰을 부르셨는데, 그때 이후로는 집에 오지는 않아요. 그래도, 이번 일로 또 오는 건 아닌지 많이 걱정되요...”

“(일본어) 경찰에 고소장을 접수하고 신변 보호를 요청해도 어느 정도 기간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그전까지는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 보호를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일본어) 여기 치바에서 경호 용역 일 하는 곳 대부분이 그 야쿠자 조직하고 연관되어 있어요. 가까이 있는 도쿄도 마찬가지구요. 그런 사람들한테 보호를 맡기고 싶지 않아요.”

민재는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볼펜을 긁적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본어) 그럼 제가 한국에서 믿을 수 있는 경호원들을 데리고 오도록 하죠. 그들에게 보호를 맡기시는 건 괜찮으시죠?”

아이도 두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쳤다.

“(일본어) 네, 좋아요! 한국 분들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어) 그럼 제가 한국에서 경호원들을 불러오도록 하죠. 되도록 일본어가 되는 사람들이라면 좋겠군요.”

“(일본어) 아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변호사님, 한국에 아는 경호원들이 많이 계세요?”

“(일본어) 그게... 원래 변호사 일을 하다 보면 증인 보호 같은 일을 하는 경호원들과도 알고 지내게 되는 법이지요. 그때 만난 유능한 경호원들을 몇 명 알고 있거든요.”

“(일본어) 아아, 그렇구나! 대단해요!”

“(일본어) 하하, 별 말씀을.”

“(일본어) 저, 근데 변호사님?”

“(일본어) 네?”

“(일본어) 그 경호원 분들, 일본에 오시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일본어) 일단 한국에 연락을 해봐야 알겠지만 며칠에서 몇 주까지 소요될 것 같습니다.”

“(일본어) 그럼 그때까지 절 보호해주실 분이 없는데... 변호사님이 대신 절 보호해주시면 안 될까요?”

“(일본어) 네?!?!”

“(일본어) ...안 될까요...?”

부끄러운 듯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민재는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이가 돌아간 후,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정경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세상에, 강 과장님. 무슨 생각으로 건물주 딸내미한테 한국 경호원들 붙여 주겠다고 약속을 하신 겁니까? 진짜 뭐, 따로 아시는 경호원들이라도 있어요?”

민재가 목에 넥타이를 풀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사람도 지키고 나라도 지키는데 최고 실력자들을 알고 있지요.”

“누구... 설마, 강 과장님네 HID 요원들 말씀하시는 거예요?”

민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대표님 (국군정보사령부에서는 사령관을 외부에서 지칭할 때 대표님이라 부른다.)께 보고드리려구요. 우리 요원들 일본으로 보낼 때 딱 좋은 위장 신분 하나 건졌다구요.”

“와아... 그것까지 생각해서 그랬던 거예요? 강 과장님 대박...! 근데 건물주 딸내미 경호하는 게 너무 길어지면 어떡하죠? 우리 요원들도 여기 오면 임무를 수행해야 하잖아요?”

“그 전에 위험 요소를 제거하면 되죠.”

“그럼 그 야쿠자 새끼 모가지를...?”

정경호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

민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때를 봐서 해결해야겠죠. 참, 우리 팀 류광택 자금 회수하는 일 잘 진행되고 있나 모르겠네? 그거 끝나야 일본 넘어올 수 있을 텐데.”

“회사 (국군정보사령부) 에서도 되도록 빨리 요원들을 일본으로 투입시키려 준비 중일 겁니다. 돌아가는 거 보니까 우리나라랑 일본, 곧 수교 단절하고 외교관들도 모두 복귀시킬 기세던데요?”

아직 뉴스에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실제로 한국에서는 일본에 있는 한국대사관의 외교관들을 모두 본국으로 소환할 계획이었다.

일본에 체류 중인 대기업 관계자들 중에서도 두 나라 간에 흐르는 전운을 눈치채고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만일 이렇게 양국의 외교관들이 철수하게 되면 대한해협을 오가는 하늘길과 뱃길마저 막히게 될 건 뻔한 일,

그럼 일본으로 요원들을 보내는 일은 잠수함 등으로 침투시키는 위험한 방법밖에는 없게 된다.

“회사에서 지령 내려온 건 아직 없죠?”

“강 과장님 앞으로 온 건 없어요. 좀 더 쉬셔도 될 것 같은데요? 쉬는 동안 건물주 딸내미랑도 한번 잘 만나 보세요. 진짜, 와... 건물주 딸내미가 예쁘다 예쁘다 말로만 들었지, 아까 직접 보니까 진짜... 와... 정말 말도 안 나오게 예쁘던데요?”

정경호는 여전히 그녀의 미모에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민재도 마찬가지였다.

되도록 정보사에서 오는 지령이 늦게 내려왔으면,

일본으로 투입될 CR팀 동료들도 되도록 나중에 왔으면,

그래서 아이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허락되었으면...

그의 눈앞에는 아직도,

‘...안 될까요...?’

라고 물으며 수줍게 웃던 그녀의 이름다운 모습이 아른거리는 중이었다.

­ 오후 4시, 경기도 우성시 일월촌

유민은 화장실로 들어가 불안한 표정으로 팬티를 벗어 보았다.

역시 생리대는 멀쩡했다.

‘분명히 시작할 때가 넘었는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성모 오빠하고 할 때, 콘돔 안하고 생으로 한 적은 있어도 그때마다 모두 몸 밖에다 쌌었잖아? 저 아저씨들이랑 할 때는 거의 다 콘돔 한 채로 했었고.’

박광이 그녀를 밖으로 데려가 범했을 때도 생으로 하긴 했지만 분명 몸 밖에다가 사정했었다.

‘혹시 누군가와 할 때 콘돔이 찢어지거나 했던 거 아닐까?’

그래서 혹시 임신이라도 된 거라면...?

덜컥 겁이 났다.

‘에이, 아니겠지. 갑자기 몸이 무리를 해서 생리 주기가 불규칙해진 거겠지.’

아무리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애써보아도,

손끝이 떨리는 게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뱃속이 거북해지는 기분도 들고,

마치 멀미를 하는 것 마냥 어지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녀는 서둘러 팬티를 올려 입고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갈 때,

갑자기 화장실 배수구에서 올라오는 하수도 냄새가 나는데,

그 냄새에 저도 모르게 토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지...?’

유민은 어두운 표정으로 주방으로 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물을 마시니 좀 진정되는가 싶더니만,

주방에서 나는 이런저런 냄새들 때문에 다시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그녀는 그대로 싱크대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어지러움과 매스꺼움,

말로 형용 못할 혼란한 감정들 때문에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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