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96화 (196/217)

〈 196화 〉 유민의 지난 이야기 ­ 2027년 9월 22일

* * *

­ 오전 8시, 경기도 우성시 일월촌

“유민아, 이제 일어나야지?”

아침이 되자 운용 엄마가 다가와 목에 묶인 개목걸이와 등 뒤로 묶인 쇠사슬을 풀어주며 유민을 깨웠다.

조폭들과 살을 맞대고 누워있던 유민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로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운용 엄마와 조폭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유민.

그녀는 완전 알몸이 아니라 팬티 한 장을 입고 있었는데,

팬티 사이로 생리대 날개 커버가 삐죽 나와 있었다.

정상대로라면 지금이 월경 주기였다.

쌀 씻는 소리, 도마 위에서 달그락 달그락 부엌칼 써는 소리에 거실에서 자던 조폭들이 하나둘 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으암~”

소파에 드러누워 자던 정배가 째져라 하품을 하며 일어나 옆에 충전해 놓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아침 뉴스 속보 영상을 클릭했는데,

그 소리가 주방까지 다 들렸다.

[...일본 참의원은 이틀 전 중의원에서 통과된 평화헌법 폐지 결의안 및 자위대의 정규군화, 20세 이상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 실시안을 찬성 213표, 반대 42표로 가결시켰습니다. 이로써 일본 자위대는 다음 주부터 정식으로 일본군으로 개칭될 예정이며, 육군 60만명, 공군 12만명, 해군 15만명 등 총 병력 87만명을 목표로 본격적인 징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일본의 군사력 팽창에 심각한 우려의 뜻을 전달하기로...]

일월촌에 갇혀 지내는 신세였지만 조폭들이 틀어놓는 뉴스 소리를 통해 유민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제 2차 한국전쟁이 모두 끝났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이어서 우리나라가 일본과 전쟁을 벌이게 될지도 모르는 분위기라는 것도,

북한이 망해 한국으로 흡수 통일 되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북한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멍한 기분이 들었다.

북한군이 쏜 화학탄 미사일 때문에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시게 되었고,

반드시 북한에 복수하겠다며, 지금이라도 당장 여군이 되겠다며 이를 갈기도 했지만,

그 밑도 끝도 없는 치기는 성모를 만나며 잊혀진 지 오래.

다만,

부모님의 복수 대상이던 북한이 사라지고,

조폭들이 자신의 치태가 고스란히 담긴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렸으니 이제 앞으로 사람들 앞에 얼굴 드러내고 다닐 수도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꿈이었던 여군에 들어갈 이유도 없어지고,

들어갈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저 모든 것이 허무하고

허망하고,

부질없이 느껴질 뿐이었다.

“아야...”

너무 정신을 팔았던 것일까,

스팸 통조림을 까던 유민이 손가락을 살짝 베였다.

“괜찮니? 조심하지 않고.”

운용 엄마가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다행히 살짝 베인거라 상처는 크지 않았다.

“괜찮아요...”

유민은 싱크대 수도를 틀고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흐르는 물에 씻어내렸다.

유민이 생리기간이라고 하자 조폭들도 딱히 그녀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어우, 나 전에 생리하는 년이랑 빠구리 뛴 적 있는데, 비위 상할 정도로 속 뒤집어지는 냄새 졸라 나서 두 번 다시 하기 싫더라.”

“나도 여자들 생리할 때 냄새 진짜 개 싫더라구. 하구 나서 내 자지 떡볶이 되는 것도 졸라 찝찝하고.”

“야, 근데 유민이 저년 생리한다면서, 아직 그 냄새 안 나지 않냐?”

“화장실에 청결제니 뭐니 다 사다줬잖냐? 그거로 냄새 안 나게 보지 빡빡 잘 씻나보지 뭐~”

“혹시 저년, 우리랑 떡 치기 싫어서 일부러 생리라고 거짓말한 거 아냐?”

“도한이 형님이 저년 붙잡아 온 지 한 달 정도 됐다잖냐~ 한 달 됐으면 여자들 그거 하는 날 돌아올 때도 됐지~!”

덕분에 유민은 낮에 청소, 빨래, 설거지 등 일을 하고,

밤에만 잠깐 입으로 그들 것을 빨아주는 정도만 하고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직도 생리가 터지지 않고 있었다.

‘전에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고문당하고 맞고 그런 거 때문에 몸에 이상이 생겨서 그런걸까?’

생리 기간이라 조폭들과 몸을 섞지 않아서 좋긴 했지만,

해야 될 때가 지나도 그게 나오지 않자 점점 마음이 불안해져만 갔다.

­ 오전 9시, 일본 치바현 치바시 주오구 일대

새벽 비행기로 일본에 도착한 강민재는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국군정보사령부에서 임대한 건물로 향했다.

변성일 중장은 공항까지 따라와 그를 보내며 쉬지도 못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민재는,

“일본 가서 쉬면 되지 않겠습니까? 거기 치바에 디즈니랜드도 있다고 하니까 간만에 일본 구경도 하며 머리 좀 식히고 있겠습니다.”

하며 쿨하게 웃으며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강민재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어릴 적 자동차 사고로 모두 잃은 것.

그때부터 그가 다니던 체육관 관장 강운예가 가족처럼 길러주었는데,

강민재는 강운예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나중에 꼭 관장님처럼 국군정보사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강운예는,

“그냥 짧게 1년 6개월 육군으로 다녀오기나 해. 정보사 같은 데 가서 고생하지 말고.”

라며 그를 만류했다.

그 말을 들을 때 강민재는,

‘정보사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길래 저런 말씀을 하시지?’

라고 생각했다.

만약 강운예가 실종되지 않고 계속 함께 했다면 그가 정보사에 지원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1년 전 강운예가 갑자기 행방불명되면서,

결국 그는 관장의 뒤를 따라 국군정보사에 들어가기로 마음 먹게 되었다.

막상 병무청을 통해 지원하고 6개월 가까이 설악산 깊은 산골 첩첩산중에 갇혀 별의별 훈련을 받는 동안,

정말 지금이라도 그냥 퇴소할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12번은 넘게 했던 것 같다.

그만큼 국군정보사 특수요원이 되는 과정은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너무나 버티기 힘든 것들이었고,

교육을 수료하고 현장에 투입되었을 때에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없이 오가는 경험을 하면서,

‘아... 이래서 관장님이 정보사 가지 말라고 했던 거구나...’

강운예가 왜 그렇게 말렸는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강민재도 끈기와 배짱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전업 파이터를 할까 고민했을 정도로 체력과 격투 능력도 탁월했고,

지능도 높고 임기응변도 좋아 현장 요원으로서의 능력도 탁월했다.

게다가 일반 직업군인보다 보수도 제법 두둑하게 나오고 있으니,

강민재는 지금 생활에 만족하는 중이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하얀색으로 깨끗하게 도색 된 건물이 있었다.

‘이곳 5층이라고 했지?’

강민재는 캐리어와 짐을 들고 건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리니 일본어로 쓰인 그럴듯한 변호사 사무실 간판이 걸려있었다.

이곳을 관리하는 요원의 이름은 정경호. 재일교포 변호사로 신분을 위장해 활동하는 중이었는데,

아직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은 듯 문은 도어락으로 잠겨 있었다.

‘9시 넘었는데? 변호사들은 보통 몇 시에 출근하길래 아직도 안 나왔어?’

강민재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핸드폰 메모장에 미리 메모해 온 도어락 비밀번호를 확인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변호사 명패가 놓인 근사한 책상과 회의용 테이블과 안락한 소파, 안내 사원, 보조 사원들을 위한 책상과 자리까지,

실내는 제법 ‘진짜 변호사 사무실처럼 보이게’꾸며져 있었다.

‘저 가벽 뒤에 침대 있는 방이 있다고 했던가? 그리고 탕비실은 저쪽?’

강민재는 우선 캐리어와 짐들을 안으로 옮겨 놓고는 탕비실부터 들어가 보았다. 공항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물을 못 마셔서 무척 목이 말랐던 것.

탕비실 냉장고에는 일본에서 판매하는 여러 가지 종류의 캔음료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그중 하나를 골라 밖으로 나오려 할 때,

밖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출근했나?’

그는 캔음료를 쭉 들이키며 탕비실 밖으로 나와 보았다.

“...어?”

당연히 이곳을 관리하는 정경호 요원이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 앞에서 웬 여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본어) 아노... 여기 변호사 사무실 맞죠?”

옷을 약간 크게 입어서 통통해 보이긴 했지만, 뽀얀 피부에 검은색 웨이브진 긴 머리를 한 상당히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혹시 연예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일반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미모를 가진 이였다.

“(일본어) 아... 여기 변호사 찾아오신 건가요?”

강민재가 급히 일본어로 대답했다.

“(일본어) 네, 여기서 일하시는 분 아니세요?”

여자는 강민재가 청바지에 후드티 등 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본어) 그게... 전 여기 변호사 만나러 온... 한국에서 온 변호사입니다. 지금 막 한국에서 왔는데 여기 변호사가 아직 출근을 안 한 모양이네요. 하하하.”

“(일본어) 아! 그럼 당신도 변호사시군요! 상담을 받고 싶어 왔는데, 혹시 대신 상담해 주실 수 있으세요?”

여자가 두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그에게 다가왔다.

강민재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 경험도 많고 법률에 대해서도 조금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의 법에 대해서는 아는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돌려보내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강민재는 능숙한 솜씨로 그녀를 회의용 탁자로 안내하고 물 한잔을 권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메모장과 펜을 가지고 와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일본어) 저는 한국 변호사라 일본의 법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우선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답변드리고 답변드리기 어려운 것은 메모를 해두었다가 이곳 동료 변호사를 통해 답변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자는 안심한 듯 깊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여자의 이름은 나루사와 아이,

이 건물의 건물주 나루사와 요시노부의 딸로, 마침 변호사를 찾던 중이었는데 아빠 건물에 변호사 사무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침부터 곧장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일본어) 그러니까... 전에 소속되었던 연예기획사 관계자가 나루사와 씨를 계속 스토킹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얼굴이 너무 예뻐서 혹시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녀는 연예인,

그것도 일본에서 제법 알려진 아이돌 걸그룹 멤버였다고 한다.

그런데 전 소속사는 알고 보니 야쿠자 폭력조직이 운영하는 회사였고,

걸그룹 멤버들에게 기업인, 정치인들의 술자리에 가서 시중을 들라고 수시로 강요를 했다고 한다.

아이는 그런 일은 못 하겠다며 스스로 걸그룹에서 탈퇴했고 그 후론 쭉 모델 활동을 해왔는데,

이전부터 아이를 마음에 두고 있던 소속사 관계자 하나가 계속 아이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화보 촬영장에까지 찾아와 그를 제지하던 아이의 매니저를 폭행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야쿠자 중간보스이고 지역 사회에서도 꽤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된다고 했다.

“(일본어) 소속사 관계자라기보다는 그냥 야쿠자라고 보시면 되요. 걸그룹 할 때도 저희 경호원 노릇 같은 거만 조금 하던 사람이에요.”

“(일본어) 우선 매니저 분께서 폭행을 당하신 부분은 그분이 직접 고소를 하셔야 할 것 같은데, 그분께서는 상대를 고소하실 의사가 있으시다고 합니까?”

“(일본어) 얼마 전에 어떻게 알았는지 그 사람이 매니저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왔었데요. 돈을 줄 테니 고소하지 말고 합의해 달라구요. 매니저님은 합의 안 해주면 그 사람이 무슨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많이 불안해하고 계세요.”

“(일본어) 그러시겠지요. 이와 같은 경우 한국에서는 상대의 스토킹 혐의가 인정되면 접근 금지 가처분 명령이라던지 스토킹 행위에 대한 법적 처벌까지 가능합니다만, 일본의 형법에 대해서는 제가 정확히 알지 못해서 바로 답변드리기 힘들 것 같군요.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적절한 대응 방법을 찾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는 금방 밝아진 얼굴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일본어) 아아, 그래도 변호사님 같은 분께 털어놓으니 속이 다 후련해진 거 같아요!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담비는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민재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일본어) 아닙니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대로 말씀드리지도 못했는걸요? 상담비는 다음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어) 어머, 정말요?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그럼 혹시 당분간 여기 사무실에 계실 예정이신가요?”

“(일본어) 그것이...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일본어) 그럼 정말 잘되었네요! 대응 방법을 찾아내면 연락주세요! 제가 이리로 다시 찾아올께요!”

아이는 해맑은 표정으로 그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살벌한 현장을 수도 없이 돌아다니며 목석같아진 그의 얼굴이,

그녀의 웃음에 수줍음 타는 어린 소년처럼 발그라하게 달아올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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