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91화 (191/217)

〈 191화 〉 유민의 지난 이야기 ­ 2027년 9월 15일 (2)

* * *

­ 오전 5시, 경기도 우성시 일월촌 인근 원정역동

일월촌 옆으로 지금은 이용하지 않는 오래된 철로가 놓여 있었다.

서해안 산업단지가 생성될 무렵 공장을 오가는 물동량을 옮기기 위해 만들어진 철로인데,

원래는 원정역이라고 이 근방에 작은 간이역도 하나 있었고, 서해안 산업단지와 항만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차도 하루 여섯 번 운행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옛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

지금은 대부분의 공장들이 기차보다 차량을 이용해 화물을 옮기게 되면서 폐선 철로가 되어버렸다.

철로 주변에는 조그마한 논밭이나 개간되지 않고 버려진 땅들이 황량하게 펼쳐져 있었다.

철로가 폐선되면서 이 근처도 곧 다른 지역처럼 재개발될 거라는 소문이 이십여 년 넘게 돌고 있었지만,

바로 옆에 흉물스러운 일월촌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바람에 재개발 계획은 번번이 물 건너 가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이 원정역동 주변에는 여전히 재개발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존버하고 있는 소수의 노인들과,

집값 싼 곳을 찾아 들어온 서해안 산업단지나 항만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어있었다.

항만 노동자들을 위해 회사에서는 매일 이곳까지 셔틀버스를 보내주고 있었다.

새벽 5시가 되자 비슷하게 생긴 점퍼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하나둘씩 정류장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어이구, 김씨 좋은 아침이야~!”

“어 그래, 이씨도 힘세고 튼튼한 아침~!”

“뭐...? 이 양반이 아침으로 상한 개고기라도 자셨나? 왜 만나자마자 개소리야?”

이제 가을이 왔는지 새벽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노동자들은 점퍼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발을 동동 구르며 셔틀버스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제 뉴스 봤나? 북한 김성운이랑 우리나라 새 대통령이랑 정상회담 한 거 결과 말이야.”

“응, 당연히 봤지! 근데 뉴스에서 나온 말들이 다 진짜일까? 종전 협의야 뭐 당연히 나오겠거니 했는데, 북한이 완전 고개 숙이고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뉴스에서 또 가짜뉴스 퍼트리는 건 아니겠지?”

어제 특별기 편으로 한국에 도착한 북한 김성운은 곧장 서울로 와 김창수 대통령을 만났다.

두 시간여 후, 언론을 통해 정상회담 결과가 전해졌다.

현 상태에서의 모든 전쟁 행위 중단, 곧 공식적인 종전이 선포되었고,

대통령 대변인을 통해 믿기지 않는 후속 조치 계획들도 발표되었다.

우선 김성운은 북한 노동당의 해체를 선언했다.

노동당을 해체하겠다는 건 북한의 어느 정치 정당 하나를 없애겠다는 말이 아니라,

북한 통치 체제 자체를 없애겠다는 말과 같은 뜻이었다.

또 북한군의 모든 무기를 양도하고

북한 영토 전역의 통제권을 한국에 넘기겠다고 했다.

이는 쓰이는 단어와 말을 꾸미는 표현만 다를 뿐

북한이 한국에 무조건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또 친북 성향 정당에서 대통령 나왔으니까 이번에도 그냥 좋게 좋게 전쟁 끝내고 점령한 땅도 모두 북한에 돌려줄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게 생겼어!”

“그럼 이제 진짜 통일이 된 건가?”

“응, 통일이지! 우리가 북한 먹었으니까 확실히 통일되었다고 봐야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어릴 적 동요 부를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진짜 통일이라니... 뭔가 실감이 안 가네?”

“나도 그래. 이제 전쟁 끝나고 경기도 다시 살아나고 그럴 테니 좋긴 할 거 같은데, 진짜 통일되었다고 막 기쁘고 뛸 듯이 좋고 그렇지는 않아. 우리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통일 되도 뭐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떡고물 떨어지는 것도 아닐 테니 그런 거겠지.”

“통일되었다고 특별히 이익 얻을 사람들이 있기나 하간?”

“뭐, 전쟁 끝났으니까 북한 땅 사려는 사람들이 막 몰려가겠지. 그런 사람들한테는 이익이겠지만 우리 같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에게는 뭐... 통일이 대수인가? 그냥 오늘 벌 일당이 중요한 거지. 허허허.”

노동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팡!

일월촌 방향에서 마치 건물 위에서 무거운 물건이 떨어진 것 같은,

혹, 밀폐된 공간에서 커다란 풍선을 터뜨린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으따, 깜짝이야! 이건 또 뭔 소리래?”

“저기 일월촌에서 난 거 같은데?”

“일월촌? 거기 전에 특전사들 들어가서 빨치산들이랑 전투하다가 터지고 부서진 집들 많잖아? 거기서 뭐 하나 허물어지고 떨어진 건가?”

“바람도 안 부는데 뭐가 떨어져? 뭔가 총소리 같지 않았어?”

“으따, 이 사람! 예비군 가서 총도 한 번 안 쏴봤나? 총소리가 원래 어때? 빵!!! 하고 멀리서 들어도 귀 찢어지는 소리가 나잖아? 근데 방금 소리는 어땠어? 팡~ 하고 부드러운 소리였잖아? 그럼 그건 총소리가 아닌 것이지. 암.”

“그치? 전쟁도 끝났고 빨치산들도 죄다 뒈졌는데, 난 그것도 아직 진짜 그런 건가 실감이 잘 안 나. 아직도 저기 일월촌에 빨치산들 있을 까봐 출퇴근할 때 저기 보면 괜히 겁나기도 하고. 그래서 저런 소리도 다 총소리로 들리는가 봐. 허허허.”

마침내 기다리던 셔틀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 모두 한 줄로 서서 버스에 오르고

방금 전 들었던 소리는 금방 뇌리에서 잊혀져 버렸다.

­ 오전 5시, 경기도 우성시 일월촌

일월촌의 수많은 빈집 중 어느 한 곳에서

등에 커다란 바구니를 매고 있는 노파가 가슴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유민과 함께 일월촌 밖으로 나가려 했던, 이곳에 몰래 숨어 살던 노파였다.

노파의 몸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아직 호흡이 있는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지만,

관통당한 몸의 양쪽 구멍에서 엄청난 양의 붉은 피가 쏟아져 나오며 서서히 죽어가는 중이었다.

쓰러진 노파 맞은 편에,

다시 발가벗겨진 알몸의 유민이 울먹이며 꿇어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조폭들이 가져온 구형 M­16 소총이 들려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광이 등 뒤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총으로 노파를 겨누게 하고는,

그녀의 손가락을 억지로 방아쇠울 안에 집어넣고

그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얹어 격발한 것이다.

M­16 소염기에는 청색 테이프로 칭칭 감은 페트병이 꽂혀 있었다.

이게 소음기 역할을 해주며 총소리를 작게 만들어주었다.

전에도 사제 총기 같은 걸로 마두원이 지시한 청부 살인을 해본 적이 있는 박광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즉석으로 만든 것이다.

유민은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에 든 소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박광은 손으로 그녀의 목을 꽉 쥐어 잡고는

귓가에 입을 대고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할매, 방금 니가 죽인 거야, 개년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난...”

“아니긴 뭐가 아냐, 씨발년아. 방금 니가 총 쏴서 맞췄잖아? 여기 동영상까지 다 찍혔는데 어디서 아니라고 개나발을 불어?”

어느새 쫓아왔는지 선욱, 전도한 등 십여 명의 조폭들이 두 사람 뒤에 서 있었고,

몇몇이 핸드폰을 들어 동영상을 촬영하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지난 밤,

조폭들 중 원균이 잠결에 아지트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누가 밖에 담배 피러 나가나 생각하고 그냥 자려고 하다가 뭔가 계속 찜찜한 기분에 거실로 나와봤는데,

항상 주방 싱크대 앞에서 쭈그린 채로 자던 유민이 보이지 않자 모두를 깨워 바로 추격에 나선 것이다.

아지트 밖으로 나와보지 못한 유민과 달리 일월촌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니던 조폭들이 이곳 지리에 훨씬 밝을 수밖에 없었고,

몸도 성치 않은 데다가 슬리퍼를 신고 있던 유민보다 훨씬 빨리 달릴 수도 있었다.

일월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로 먼저 뛰어가 기다리다가 그녀를 사로잡은 조폭들은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노파도 함께 끌고 갔다.

“저 할매, 우리 봤으니 살려두면 안 되겠지.”

그래서 이런 잔인한 짓을 하게 된 것이다.

“너가 도망만 안 갔으면 저 할매, 오늘 여기서 안 죽었어.”

“아, 아냐... 아, 아니에요...”

아직도 꿈틀거리며 피를 쏟아내는 노파를 보며, 유민은 완전 멘탈 나간 사람처럼 울먹이며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씨발년, 그럼 도망치다 걸렸으니 벌 좀 받아야지? 자, 따라와!”

“꺄악!”

박광이 유민의 긴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그가 뒤에 서 있던 조폭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 너랑 너랑, 너. 니들은 저 할매 시체 안 보이게 잘 처리하고 와.”

“걍 두면 냄새날 거 같은데, 태워버릴까요?”

“병신아! 그럼 연기 나잖아! 우리 있는데 짭새한테 걸리고 싶어 환장했냐!”

“죄, 죄송합니다, 형님.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냥 안 보이게 묻어! 시체 썩는 냄새 날 거 같으면 땅 깊게 파서 묻으면 될 거 아냐!”

“알겠습니다, 형님!”

재일, 상식, 준석 등 막내급 조폭들이 노파의 시체를 처리하러 가고,

나머지는 유민을 끌고 다시 아지트로 향했다.

박광이 전도한에게 말했다.

“야, 아줌마 지금 아지트에 혼자 있냐?”

“아니, 정배 거따 냅뒀지~! 그년까지 도망가면 안되자녀~!”

“그래, 잘 했다. 그건 그렇고 씨발, 저 할매도 그렇고 진짜 이 동네에 우리 말고 숨어 사는 놈들 더 있는 거 아냐?”

옆에서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따라 걷던 선욱이 유민의 엉덩이를 손으로 찰싹찰싹 때리며 말했다.

“제가 말했잖아요, 밤에 근처에서 이상한 소리 들린다고. 진짜 더 있는 게 맞다니까요?”

“이런 젠장할... 이따가부터 애들 풀어서 주변에 진짜 다른 놈들 더 있는지 살펴봐야겠다.”

“그 할매처럼 또 여기 숨어 사는 놈 찾으면... 그 놈은 어떻게 할겨?”

박광이 무서운 표정으로 전도한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당연히, 그 할매처럼 해야지.”

­ 오전 8시, 경기도 우성시 일월촌

“자,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하, 한번만...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어요... 다시 도망 안 갈께요... 다시는...”

어디서 찾아서 가져왔는지, 조폭들은 철제로 된 가정용 철봉대를 아지트 안에 들여다 놓았다.

그리고 거기에 유민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있었다.

지금까지 심하게 맞았는지 온몸이 시뻘겋게 붓고 멍이 든 데다가,

몸은 물론 머리카락까지 홀딱 물에 젖어 바닥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밑에 수건을 가져다가 깔아 놓았지만 금방 젖어버리기 일쑤였고,

주방에서 밥을 하던 운용 엄마가 조폭들 눈치를 보며 젖은 수건을 얼른 새 수건으로 갈곤 했다.

유민의 다리는 좌우로 벌려진 채 매달려 있었다.

어느 놈이 그랬는지 그녀의 음부에는 볼펜이며 국자, 주걱 같은 것들까지 꽂혀 있었다.

담배를 뻐끔거리던 전도한이 그녀 앞에 쭈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이게 벌 받는 거 전부일 줄 알았지? 아녀~ 벌주는 건 이제 시작인겨~”

그는 밑으로 쏠려있는 그녀의 젖가슴을 손으로 희롱하고는,

손에 들고 있는 담배 꽁초를 허벅지에 대고 비볐다.

“꺄아아아악~!”

유민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소리를 질렀다.

전도한은 타다 남은 꽁초를 재떨이에 휙 던지고는,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는 상국에게 물었다.

“어떻게 다 되가는겨?”

“편집이랑 모자이크 처리 다 했고 이제 업로드만 하면 되는데요, 이게 영상이 1기가 가까이 되는 데다가 와이파이도 아니고 핸드폰 데이터로 보내야 하는 거라 시간 졸라 오래 걸릴 거 같은데요?”

“뭐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거그 사이트 운영자하고도 다 얘기 된 거 맞지?”

“네, 조회수 별로 돈 올라가고 결제는 매월 20일에 해준답니다.”

“그려? 그럼 며칠 후부터 돈 받아 볼 수 있는겨?”

“아니죠, 이번 달꺼는 안 나오고 다음 달부터 나온답니다.”

“아, 그런겨? 좋다 말았네 쓰벌...”

전도한이 다시 유민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부여잡고는,

상국이 들고 있는 노트북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 내가 전에 도망치기만 하면 우리랑 연애하는 동영상 인터넷에 확 뿌려버릴 거라고 했어, 안했어?”

“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그걸 아는 년이 도망을 가? 왜, 우리가 그거 진짜 못 올릴 줄 안겨? 아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이여? 야동만 올려도 돈 주는 세상인디 우리만 보기 아까운 졸라 예쁜 유민이 야동 놔뚜고 왜 썩히고만 있어야 겄어? 이걸로 돈도 벌고 꿩도 보고 알도 먹을 수 있는디. 크크크~”

유민이 불안한 눈으로 상국을 바라보았다.

상국은 그녀를 향해 노트북을 돌려 보여주며 잔인하게 웃고있었다.

노트북에는 외국 포르노 사이트로 보이는 화면이 떠 있었고,

전에 우성 경찰서에 잡혀 있을 때 찍힌 것으로 보이는 영상의 정지 화면과

데이터 전송 상태를 표시하는 스테이터스 바가 함께 떠 있었다.

그들이 정말 그녀의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는 것이다.

“아, 안 돼!”

유민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려는 순간,

퍽!

어디선가 날아온 발이 그녀의 배를 강하게 걷어찼다.

전도한이 철봉대를 붙잡지 않았으면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개 같은 년, 이년 아직 정신 못 차렸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소리를 질러? 엉!”

어느새 다가온 박광이 그녀에게 발길질을 퍼붓고 있었다.

또다시 이어지는 폭행에 유민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 주여...!”

이 모습을 주방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운용 엄마는 두려움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을 바들바들 떨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하나님만을 찾았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