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 유민의 지난 이야기 2027년 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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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경기도 우성시 일월촌
북한의 최고 권력자 김성운이 한국 땅에 도착했다.
그것도 대한민국의 새 대통령 김창수가 보내준 특별기를 타고 말이다.
김성운이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트랙을 따라 내려오는 그의 모습은 예전보다 많이 야위어 있었다.
몸이 불편한지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고, 쿠데타 기간 중 부인과 자녀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그 시신이 조리돌림까지 당한 탓인지 정신적으로도 크게 불안정해 보였다.
‘진보정당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직접 나가 두 팔 벌려 환영하겠지?’
라던 많은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새 대통령은 북한의 지도자를 마중 나가지 않고 서울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김성운을 맞이하는 일은 신임 통일부 장관이 대신하고 있었다.
국무총리도 아니고, 장관이 영접하러 나온 것이다.
이는 곧 있을 정상 회담 자리에서 한국이 북한보다 얼마나 우위를 점하게 될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이로써 김성운 위원장은 분단 8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남한 땅을 밟게 되는 최초의 북한 지도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김성운 위원장은 곧장 서울로 이동해 김창수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가질 예정입니다. 이번 회담에서 남북 양측은 2차 한국 전쟁의 종전과 향후 양국 관계에 대해 집중 논의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일각에서는 우리 군이 개마고원을 제외한 전 북한 영토를 수복하게 된 만큼 종전이 아니라 항복에 동의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며...]
일월촌에 숨어 있는 조폭들도 핸드폰으로 실시간 뉴스 영상을 보는 중이었다.
조폭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야, 전쟁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냐?”
“어떻게 되기는, 그냥 전쟁 나기 전처럼 돌아가게 되겠지.”
“전쟁 나기 전처럼? 크으~ 전쟁 나기 전에 나 강남에서 미러룸 관리했었는데. 확실히 그때가 좋긴 좋았지. 잘 빠진 기집년들도 실컷 보고. 얼른 그때로 다시 돌아갔음 좋겠다.”
“잘 빠진 기집년들 실컷 보는 건 지금도 하고 있잖아?”
“아, 그렇지? 존나 예쁜 우리 거유민이랑 거유민이보다 더 거유인 아줌마! 크크크~!”
조폭들이 편하게 뒹굴거리고 있는 거실에는 알몸의 두 여자도 함께 있었다.
유민은 고문 전담 조폭 중 하나였던 종만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는 다리 사이에 유민을 앉혀 놓고 그녀의 크고 탐스러운 젖가슴과 봉긋한 젖꼭지를 두 손으로 열심히 희롱하는 중이었다.
유민은 배 밑으로 방에서 가져온 담요를 덮고 있었다.
조폭들은 아지트 안에서도 담배를 피워댔는데, 연기를 빼느라 창문을 계속 열어놓고 있었다.
이제 9월 중순이 되다 보니 확실히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 늦더위로 고생하며 늘 웃통은 기본으로 까고 생활하던 조폭들도 이제는 이것저것 옷을 껴입고 있었다. 물론 보일러를 틀고 난방을 할 수도 있지만 아직 찬바람도 불지 않는데 벌써부터 보일러를 마구 틀어대면 나중 석유가 부족해질 수도 있다는 박광의 지시로 지금은 저녁에 씻을 때만 잠깐씩 보일러를 트는 중이었다.
긴 소파 위에 엎드려 경삼의 성기를 입으로 빨아주고 있는 운용 엄마의 몸 위에도 담요가 덮여 있었다.
이럴 거면 그냥 여자들에게도 옷을 사줘도 좋으련만,
그들은 여자들에게 옷을 줬다가는 그대로 그 옷 입은 채로 도망가 버릴 수도 있다며 절대 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벗겨 놓은 채로 희롱하며 계속 보고 싶은 마음도 있을 테고 말이다.
“아까 광이 형님이 그러시는데 전쟁 끝나면 우리 많이 바빠질지도 모른다더라.”
“왜, 또 도망 다니느라 바빠진다는 거야?”
“아니, 임마~! 원래 전쟁 끝나면 힘 있고 주먹 센 놈들 찾는 데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거라고, 뭐 그런 쪽으로 사업 루트 뚫어보고 계시다는데?”
“힘 있고 주먹 센 놈들 찾는 데면... 클럽 기도 같은 일?”
“뭐 어디 지키는 보안 같은 일은 경호업법 어쩌고 저쩌고 해서 경찰 통제받아야 하는 일이라 그런 건 안될 거 같고, 아마 용깡(용역 깡패)들 하던 일들 따오려는 거 같아. 전쟁 끝났으니까 우리 남한이나 북한이나 여기저기서 재개발 붐이 불 거 아니겠냐? 그런 이권 싸움 생기는 데엔 우리같이 떡대 있는 사람들이 딱 가줘야 그림이 나오니까. 크크크.”
“그래? 근데 우리 다 수배 중이라며? 그런데 가도 괜찮을까?”
“원래 이런 난리 통이 짭새나 공무원 대가리들한테 샤바샤바하기 좋은 타이밍 아니겠냐? 다 광이 형님이 알아서 손을 쓰고 계시겠지. 쫌만 기다려봐. 이 달동네 같은 곳 뜰 날도 멀지 않았을 테니까.”
조폭들은 저마다 어리숙한 희망을 품고 어서 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며 히히덕 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 년들은 어떻게 하지?”
“어떻게 되긴, 누가 데려가도 데려가겠지. 아니면 나라도 데리고 살면 되는 것이고. 히히히.”
“이 정도 와꾸인 년들이면 진짜 데리고 살만하지! 저거 봐, 저 아줌마는 전쟁 끝나도 우리힌테 같이 데려가 달라고, 그러고 따라올 거 같지 않아?”
조폭들은 경삼의 무릎 위에 천박한 모습으로 다리를 벌리고 올라탄 채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 농밀한 키스를 나누는 운용 엄마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저 아줌마 학교 다니는 아들내미도 있다며? 이제 그 아들내미는 까맣게 잊고 우리랑 떡치는 거에만 정신 팔려있는 모양인데?”
“우리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떡도 쳐주는 거가 삶의 유일한 낙인 모양이지. 뭐 우리한테는 고마운 일이지만. 크크크.”
“근데 우리 유민이는 어쩌려나? 유민이도 아줌마처럼 그러려나?”
종만에게 안겨 있는 유민의 표정은 운용 엄마의 표정과 크게 상반되어 보였다.
그가 아무리 손으로 젖꼭지며 클리토리스며 여자의 성감대를 마구 자극해보아도 그녀는 그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을 뿐, 운용 엄마처럼 적극적인 반응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저 년은 선욱 조카가 되었든 광이 형님이 되었든 누가 꼭 데려가긴 할 거 같아.”
“맞아. 요새 광이 형님이 거의 매일 유민이 저년 혼자 독점하다시피 데리고 놀고 계시잖아? 형님이 푹 빠진 건 맞는 거 같아.”
“그것 때문에 선욱 조카가 은근히 기분 나빠하던 거 같던데. 따지고 보면 자기껀데 광이 형님이 너무 혼자 쓴다고 말이야.”
“아까 광이 형님이랑 선욱 조카 같이 밖으로 나가지 않았어? 그 문제 때문에 싸우는 거 아냐, 설마?”
“야, 도한이 형님이랑 원균 형님도 다 같이 나가셨다. 그런 일로 나간 건 아닐 거다.”
“아~!”
핸드폰에서는 여전히 실시간 뉴스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이제 김성운은 함께 대동한 북한 고위 당국자들과 함께 한국 정부에서 준비해준 차량을 타고 서울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정상 회담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지, 모두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었다.
그 시각,
박광과 마선욱, 전도한과 원균 네 사람은 아지트 밖으로 나와 있었다.
다른 조폭들이 없는 가운데 조용히 의논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박광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께서 어제 평택에서 중국으로 밀항하시려다가 해경에 적발되셨단다. 다행히 바다로 뛰어내려 잡히지는 않으셨다고 하는데, 같이 있던 형수님은 체포되셨다나 봐.”
전도한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뭐여? 그럼 바다 한 가운데에서 다이빙하셨단 말이여?”
“아니, 출항하기 전에 그랬는가 봐. 그러니 금방 안전한 데 찾아서 연락 주신 거겠지.”
“어따, 다행이네, 참말로 다행이야~! 근디 형수님이 잡혔다고? 그럼 우리 형님에 대해 짭새들한테 죄다 부는 거 아녀?”
“같이 중국 넘어가려다 잡힌 거니 지금 형님 어디 계신지 형수님이 알 수 없겠지. 경찰한테 불어봤자 불만한 것도 많이 알고 있지도 않고.”
“형님 지금 어디 계시다는겨?”
“평택 나와서 안성에 숨어 계시다고 하더라.”
“으응~ 안성~? 거기도 공주 맹키로 조용한 곳이라서 숨어 있기는 안성맞춤인 곳이지, 암, 안성맞춤인 곳으로 제대로 고르신겨. 큭큭큭~!”
곁에서 듣고 있던 원균이 말했다.
“전쟁이 아직 끝난 게 아니라서 그런가 해안 경비가 무척 삼엄한 모양이군요?”
“그런 거 같아. 전에 여기 우성시 뚫린 것도 빨치산들이 잠수함 타고 바다로 들어와서 그런 거였다며? 그러니 군바리 새끼들이나 해경 짭새 새끼들이 바다에 엄청 신경 쓸 수밖에.”
“뉴스 보니까 그 빨치산들 잠수함으로 태워다 준 놈들이 일본 쪽바리들이라고 합디다. 그 새끼들 얼마 전엔 우리 독도랑 7광구까지 꿀꺽 했다고 하드만. 그것 때문에 당분간 바다로 들어오고 나가는 길은 감시 엄청 빡셀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맞아, 형님께서도 중국으로 밀항 나가는 거 더 안전할 때를 기다려야겠다고 하시더라고.”
박광이 나머지 세 사람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형님께서 지시를 내리셨다. 당분간 우리도 어디 이동하지 말고 여기 잘 짱박혀 있으라고. 생활비는 넉넉히 보내줄 테니 군바리나 짭새들한테 걸리지 않게 잘 숨어있으라 하셨어.”
여기 더 있으란 말에 선욱이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볼멘소리를 했다.
“아빠는 공주니 안성이니 그런 좋은데 숨어 있으면서 우리는 이런 거지 같은 동네에나 계속 짱박혀 있으라구요?”
“그래도 여기는 안전하긴 하잖아? 군바리나 짭새들도 안 찾아오고.”
“그건 모르죠! 언제 그 새끼들이 여기 들어올지! 그리고 밤에 가끔 이 근처에서 이상한 소리 나는 거 못 들으셨어요? 여기 우리만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다구요! 아마 여기 뒤져보면 원래 살던 새끼들이나 노숙자들이 우리처럼 몰래 들어와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선욱의 말에 원균도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선욱 조카 말대로 여기 우리 말고 다른 놈들이 있다면... 분명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놈들이 현상금 같은 거 받을 생각에 짭새들한테 신고라도 하게 되면 큰일이니까요.”
박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일 낮에 애들 풀어서 아지트 가까운 곳부터 해서 또 뒤져 보도록 하지. 석유나 쓸만한 물건 더 없나 찾기도 하고 말이야.”
원균이 물었다.
“형님. 만약 그런 놈들 찾으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하긴, 여기 우리가 있다는 걸 그 누구도 알게 해서는 안 되지.”
박광이 눈을 세모꼴로 날카롭게 뜨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전도한이 물었다.
“참! 다른 데 있는 우리 식구들하고는 연락 다 닿은겨?”
“응, 서울에서 형님 모시던 애들이랑 우성시에 있다가 군바리들한테 잡힌 애들 빼고는 대부분 잘 숨어 있는 모양이야. 걔들한테도 전부 대포폰으로 바꾸고 연락 기다리라고 해놨어.”
“우리처럼 걔네들도 형님이 돈 보내주신댜?”
“그런 말은 없는 걸로 봐서는 아닌 거 같아. 아마 자력갱생 중이겠지.”
네 사람은 담배를 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눈 후, 그 자리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다시 아지트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들이 떠나간 후 반절 정도 타지 않고 남아 있던 꽁초 몇 개가
몇 시간 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는 사실 말이다.
오후 7시, 경기도 우성시 일월촌
며칠 전 조폭들이 다른 집에서 구형 세탁기를 찾아 온 덕에 빨래를 하는 일이 꽤 수월해졌다.
빨래를 하면 주방에 놓은 대형 빨래 건조대에 널어놓고 있었는데,
사람이 많다 보니 건조대 위는 물론 옷걸이까지 가져와 걸어야 할 정도로 빨래가 많은 편이었다.
빨래가 다 돼서 마른 옷들은 각자 자기 것을 알아서 챙겨갔고,
선욱이 아울렛에서 사 온 츄리닝과 같은 다 같이 돌려 입는 옷들은 옷걸이에 걸어 건넌방 장롱 안에 넣어두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래가 많다 보면 서로의 옷이 바뀔 때도 있고, 뭐가 하나 사라져도 모를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딱 그런 때였다.
가장 작은 사이즈 (라고 해봐야 남자 XL 사이즈)의 츄리닝 위아래 한 벌이 빨래 건조대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민은 거실 소파 위에서 조폭들과 노닥거리고 있는 운용 엄마를 대신해 혼자 저녁밥을 준비하는 척하며 주방으로 들어가,
행주로 쓰는 낡은 수건들 사이에 츄리닝을 몰래 싸서 싱크대 아래 서랍 안에 조심스럽게 집어 넣었다.
뒤를 돌아보니 모두들 정상회담에 대한 뉴스를 보거나 화투를 치느라 정신이 없는 중이었다.
유민은 그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쌀을 씻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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