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유민의 지난 이야기 2027년 9월 5일 (2)
* * *
오전 1시, 경기도 우성시 일월촌
“야, 이리 와봐.”
유민은 두려움에 떨며 박광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손으로 가슴과 하복부를 가리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 성모인가 하는 걔 기다리냐?”
“...”
“...걔 기다리냐고?”
그가 위협적인 말투로 물었다.
유민이 바들바들 떨며 대답했다.
“아, 아뇨. 그냥 궁금해서...”
“걔랑 여기 어디 있는 오피스텔에서 한동안 동거했다는 소리는 듣긴 했다만, 병신같은 년, 그런다고 걔가 너 아직 사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냐?”
“...”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은 거다. 처음에는 좋아 죽을 것 같고 잠시라도 떨어지면 못 산다고 지랄지랄을 해도 결국 몇 달만 지나면 싫증 나서 같이 못 살겠다고 지랄지랄... 서로에게 단물만 쪽쪽 빨아먹으면 금방 나몰라라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본성이다 이 말이야.”
“...”
“성모인가 그 새끼도 마찬가지인 새끼야. 그러니 널 선욱 조카한테 던져주고 지 혼자만 필리핀으로 쏙 내뺐지.”
유민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새끼 보고 많이 보고 싶냐?”
“아뇨, 그게 아니라... 속은 게 분해서... 아니,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어요...”
“쳇, 남자란 다 그런 거다. 영원한 사랑? 그딴건 애초부터 없는 거라는 걸 알았어야지. 뭐, 그런다고 다 여자들만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어리숙한 남자들 순정 이용해서 등골이나 빼먹으려는 년들도 세상 천지에 넘쳐나니까.”
박광의 눈앞에 지금껏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떠나버렸던 여자들의 얼굴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 유민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게 되었다.
다들 자는 밤이라 현관 쪽 작은 불만 켜놓고 있었는데,
밝지도 않은 불빛 아래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도 아름다웠다.
화장도 안 했는데 뽀얀 피부의 작은 얼굴은 그 어떤 술집 여자들, 아니 TV에 나오는 연예인들보다도 더 고와 보였고,
빛과 어둠이 만들어주는 효과로 대문자 S자 같은 그녀의 굴곡진 몸매는 더욱 극명한 윤곽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한 바퀴 돌려 보았다.
‘새끼들이 왜 이 년 보고 미쳐 하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겠군.’
정말 호불호가 있을 수 없는, 조각같이 아름다운 몸매였다.
이 조각 같은 몸에 단점이 있다면 아직도 엉덩이와 허벅지에 남아 있는 시퍼런 멍자국들,
몸 여기저기 달라붙어 있는 딱쟁이 진 상처의 흔적들 뿐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장롱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근육통에 바르는 로션과 상처 연고를 꺼내 가지고 왔다.
“내 무릎 위로 엎드려봐.”
박광이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유민은 그가 시키는 대로 소파 위로 올라와 그의 무릎 위에 배를 대고 엎드렸다.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 엉덩이 때리는 체벌을 할 때 모습이었다.
다소 우스꽝스럽고 수치스러운 자세였지만 유민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수치스러운 짓이라면 지금껏 얼마든지 당해왔으니, 이번에도 그냥 이를 악물고 참고 버텨보려는 중이었다.
그런데,
박광은 아무런 말없이 그녀의 엉덩이 위에 근육통 로션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처음에는 차갑고 시원했다가 점점 피부가 뜨거워지고 따끔거리는 근육통 로션 탓에 그녀의 몸이 움찔거렸다.
“가만 있어 봐, 이 년아.”
박광은 퍼렇게 멍든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근육통 로션을 마저 발라준 후,
몸에 있는 상처 위에 연고까지 발라주었다.
“이거 저기 싱크대 위에 두고 매일 발라.”
하던 걸 다 마친 뒤,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손에 로션과 연고를 쥐어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유민은 부끄러운 듯 붉어진 얼굴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다 됐으니 들어가 자라.”
“네...”
손에 묻은 로션을 씻으려 주방에 한 번 다녀오는데,
유민은 여전히 거실에 서서 서성이고 있었다.
“야, 안 들어가?”
“저... 그냥 여기 거실에서 자려구요.”
“거실에서? 왜?”
“안에... 사람들 너무 많이 있어서...”
그녀의 말대로 큰 방 침대 위나 건넌방 이불 위에는 모두 덩치 큰 조폭들이 대자로 뻗어 드러누워 있는 중이라 다리 뻗고 몸을 누일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 그럼 니 맘대로 해라.”
박광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소파 아래 자리를 잡고 벌러덩 누워버렸다.
유민은 여전히 거실에 서서 한동안 머뭇머뭇 거리다가
그가 드러누운 곳 옆에 빈자리로 조용히 다가와 몸을 옆으로 하고 자리에 누웠다.
박광이 고개를 돌려보니 돌아누운 그녀의 굴곡진 허리와 엉덩이, 매끈한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와, 씨발...’
저도 모르게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이제 현관 쪽 센서 등도 자동으로 꺼지고,
창밖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만이 두 사람을 희미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포니테일로 묶어 놓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 너머로 보이는 작고 예쁜 어깨와
등과 허리선 너머 보일 듯 말 듯 살짝 드러나 있는 커다란 젖가슴의 윤곽이
그녀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둥실둥실 위아래로 흔들렸다.
이를 보는 박광의 심장은 위아래로 크게 방망이질 쳐댔다.
‘이런 년이라면... 내가 품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는 그동안 여자를 혐오했던 거지 여색을 멀리했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유민이 두목의 아들 선욱의 여자라고 생각해서 더더욱 별 관심을 안 가지려 했던 건데,
지금껏 지켜보니 선욱의 여자라기보다는 마치 공동의 소유물처럼 다뤄지고 있는 중,
때로는 다른 조폭들이 유민을 범하는 걸 지켜보면서 즐기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을 정도로, 선욱은 생각보다 유민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예쁜 년이 배신 안 하고 말만 잘 듣고 내 곁에만 있어 준다고 하면... 암만 전도한 꼬봉들이나 다른 지역에서 온 똘마니 새끼들한테 다리 벌려 준 년이라고 해도 충분히 데리고 살만하지 않을까...? 어차피 형님 안 계신 동안 국회파는 내 차지인데, 이년도 보스 여자 되는 거라고 하면... 당연히 나 따르지 않을까...?’
박광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와 가슴을 끌어 안았다.
“아...!”
박광의 억센 손길이 탄력 있는 유방을 꽉 움켜잡자 그녀의 입에서 자그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녀의 등에 몸을 밀착시킨 채,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하아...”
유민의 몸에서는 아직 풋풋한 냄새가 났다.
나이가 있는 운용 엄마와는 완전 다른 냄새였고,
그와 잔 적 있는 화류계 여자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도 확연히 비교되는 신선한 냄새였다.
보통 그런 여자들은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사느라 아무리 향수로 떡칠을 해도 몸에서 나는 악취를 가릴 수 없었는데,
유민의 몸에서는 순한 비누 냄새나 연한 꽃냄새와 같은 좋은 향기가
방금 전에 바른 근육통 로션 냄새보다 더욱 그윽하게 느껴졌다.
그가 그녀의 몸을 돌렸다.
유민이 수줍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박광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냥 껴안고 키스만 하다가 잘 테니 걱정 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이 혀를 부비며 진한 키스를 나누는 동안,
유민의 두 팔은 저도 모르게 그의 목을 꼭 끌어 안고 있었다.
오전 10시, 경기도 우성시 일월촌
확실히 부식 상황은 전보다 많이 나아져 있었다.
요리를 할 줄 아는 운용 엄마는 스팸에 계란물을 묻혀 프라이팬에 굽기도 하고,
통조림 참치를 넣은 김치찌개도 끓였다.
아직 요리가 서투른 유민은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계란후라이를 하며 그녀를 도왔다.
그렇게 조폭들이 아침 식사를 다 마치면,
두 여자는 그들이 먹은 것을 치우고 싱크대에서 함께 설거지를 하곤 했다.
물론, 여전히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 상태로 말이다.
“와, 저년 설거지하면서 엉덩이 흔들 때마다 꼴려 죽을 거 같은데? 내가 좀 이상한 건가? 크크크.”
“응, 네가 변태라서 그래 임마~!”
“변태는 씨발~?! 넌 저런 년이 홀딱 벗고 졸라 엉덩이 흔들고 있는데도 거기가 안 서냐? 하기야 뭐, 넌 서도 선 것 같지가 않지?”
“뭐 임마? 너 내가 선거 본 적 있냐?”
“왜 못 봐, 임마~! 여기서 맨날 보고 있구만.”
옥신각신하던 조폭 하나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따, 우리 유민이 엉덩이 흔드는 거 보니까 도저히 못 참겠다! 너 잠깐 이렇게 해봐!”
그는 그녀가 두 손으로 싱크대를 붙잡게 한 후,
다리를 양쪽으로 넓게 벌렸다.
그리고 바짓춤을 내리고, 자신의 그것을 꺼내 그녀의 엉덩이에 비비기 시작했다.
“헤헤헤, 저 새끼 아침부터 꼴났네~!”
“야, 순서 지켜 이 새끼야~! 오늘 첫빠따로 우리 거유민이랑 연애하기로 한 건 나야 임마~!”
조폭들이 그 모습을 보며 휘파람을 불고 야유를 퍼부었다.
그때,
“야, 그 짓 하려면 안에 들어가서 해, 임마! 아침부터 무슨! 여기가 무슨 동물의 왕국이야, 이 새끼야!”
건넌방에 들어갔던 박광이 밖으로 나오며 호통을 쳤다.
모두 놀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유민의 뒤에서 그녀를 희롱하던 녀석은 후딱 바지를 올려 입고 머쓱한 표정으로 주방을 빠져나왔다.
박광의 손에는 전에 선욱이 사온 츄리닝 상의가 들려 있었다.
그가 유민의 발아래 츄리닝을 툭 던지며 말했다.
“야, 그거 입고 따라 나와 봐.”
유민은 영문을 몰라하며 마른 행주로 손을 닦은 후,
발 앞에 떨어져 있는 츄리닝 상의를 걸쳐 입고 그를 따라 아지트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맨다리에 슬리퍼만 신고 박광을 따라 나가는 걸 보고 조포들이 수근거렸다.
“저 형님, 갑자기 왜 저러시지?”
“그러게? 평소 유민이나 아줌마한테 관심 1도 없어 하시드만. 왜 갑자기 쟤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시는 거지...?”
모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한마디씩 하는 동안,
선욱은 창문을 열고 서서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두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지켜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지트 있는 곳에서 15분 정도 걸어 나왔다.
유민은 아지트를 나와 밖을 걸어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판잣집들과 계단들이 복잡하게 연결된 좁은 길을 따라 무작정 걷는데, 마치 미로를 탐험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곳곳마다 폭발에 부서지고 총탄에 구멍이 숭숭난 건물들이 보이자 살짝 두려운지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제 9월 초,
찌는 듯한 늦더위가 끝나고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판자집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결에 그녀의 긴 포니테일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녀가 바람에 날리는 귀밑머리를 자연스럽게 옆으로 쓸어 넘겼다.
박광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는 중이었다.
“...야.”
그가 드디어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불렀다.
이제 이 정도 왔으니 다른 녀석들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그가 유민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선욱 조카 때문에 여기서 우리 애들 육변기 노릇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는데... 너 계속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지?”
그 말에 유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 내가 너 다시는 육변기 노릇 안 해도 되게 보호해줄까?”
“어떻게요...? 설마... 아저씨도 저한테 같이 살자고 말씀하시려는 건가요...?”
유민은 얼마전 자신에게 똑같은 말을 했던 선욱이 떠올랐다.
“왜, 누가 너한테 같이 살자고 말하든?”
“네...”
“누가? 어떤 썅놈의 새끼가 나보다 먼저 그런 말을 해?”
“...선욱 오빠가요.”
선욱이란 말에 박광은 울그락불그락거리던 표정을 금세 바꾸었다.
“뭐? 선욱 조카가? ...그래서, 넌 뭐라고 그랬는데?”
“아무 말 안 했어요.”
“왜?”
“그 오빠가 하는 말, 아무것도 다 못 믿겠어서...”
유민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럼 난? 난 믿을 수 있을 거 같냐?”
유민이 고개를 올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단 한 번 자신의 몸을 탐한 적도 없고,
어젯밤에는 말없이 멍든 곳에 약도 발라주고,
그저 서로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키스만 해주다 잠들었던 이 사람.
적어도 양아치 짓이나 일삼고 다니던 마선욱보다는 훨씬 어른스럽게 느껴지기는 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래? 너,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라. 난 이제 우리 형님, 그러니까 선욱 조카 아버지를 대신해 우리 조직을 이끌어 나가게 될 거야. 우리 조직 오야붕이 된 거라고.”
“...”
“너 우리 같은 전국구 조직 오야붕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지? 가진 사업체며 한 번에 굴릴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되는지 가르쳐 줄까? 어지간한 중소기업은 뺨따귀 때리고 대기업에도 비빌 수 있을 정도까지 된다고. 하루에 몇 억 정도는 애들 장난처럼 놀릴 수 있을 정도라고. 그런데, 내가 지금 그런 조직의 오야붕이 됐다 이 말이야. 이제 좀 감이 오냐? 응?”
유민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봤자 도망쳐 다니느라 여기 숨어 있는 주제에 허세는,
왠지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린 이제 곧 이 거지같은 델 나가 서울로 갈 거다. 서울이 우리 조직 진짜 나와바리거든. 너 그럼... 나랑 서울 가서 같이 살자. 오야붕의 여자로 남부럽지 않게 평생 재미있게 살 수 있게 해줄게. 어때?”
유민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기 답답했던지 그녀의 어깨를 재차 흔들었다.
“너 그러면 여기서도 다른 애들한테 다리 안 벌려도 되고, 나하고만 같이 있으면 된다고. 옷 입고 싶으면 옷도 입혀주고,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줄거라고. 알아들어?”
한동안 말이 없던 유민이,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치우며 차갑게 대답했다.
“...저, 성모 오빠 직접 만나기 전에는 다른 사람한테 마음 못 줘요.”
“뭐...?!?!”
“제 몸은 어떻게 하시든 상관 없어요. 하지만 제 마음은... 안 되요.”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박광의 손도 뿌리쳤다.
“도망가거나 하지는 않을게요. 그러니... 성모 오빠 소식 들으시면 제게 꼭 말씀해주세요. 거짓 없이 그냥 사실대로만요. 성모 오빠와 연락이라도 닿을 수 있게 되면... 꼭 한 번만이라도 오빠하고 통화라도 할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해요. 전 그거면 되요.”
박광은 성난 표정으로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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