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77화 (177/217)

〈 177화 〉 대동력 9,994년 9월 16일

* * *

대동 사람들 모두 이번 여름 수십 년 전 일어났던 계몽 전쟁 같은 대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사람들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대월국에서 율도와 천제국이 맞붙었던 이른바 ‘삼국 전쟁’은 천제의 일방적인 항복 선언으로 싱겁게 끝을 맺었다.

초원길을 끊고 거록에 새 무역로를 개척하는 등 전방위로 율도를 압박하려 했던 천제국은 도리어 엄청난 액수의 전쟁 보상금을 물어주고 천제가 다시 포로로 잡히는 수모까지 당하고 말았다.

드넓은 영토와 수많은 인구 덕분에 국가부도 위기는 가까스로 모면했지만, 이번에도 또 율도, 그리고 강운예에게 대패하면서 천제국과 천제 정선교의 위신은 저 밑바닥 너머까지 추락하게 되었다.

천제국의 국력이 약해지자 이를 틈 타 대동 동부에 있던 주신이 천제국의 영토를 넘보기 시작했다.

수 세기 동안 천제국에게 시달리기만 했던 주신이 마침내 복수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대월국에서 수많은 병력을 잃은 데다가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던 천제벽력포까지 모두 율도군에게 빼앗기고,

거기에 국가 재정마저 파탄 난 지금 그들에게는 주신과의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천제는 주신과의 전쟁을 포기하고 굴욕스러운 협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을불군 대장이 예상한 대로 주나라 황제 황치우는 곧 율도로 화친을 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그것도 통령이 있는 진양의 행정부가 아닌, 대월국에서 행군으로 복귀하고 있는 강운예의 친위 군단이 있는 곳으로 직접 말이다.

황제가 보낸 국서에는 황자 정국을 진나라 공물론자들에게 넘긴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 같은 말은 단 한 줄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천제국과 잠시 연합하여 거록에 새 무역로를 건설하고 율도와의 국경에 군사력을 증강했던 일은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 힘쓰겠다는, 건조한 투로 쓰인 사과 아닌 사과문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강운예 역시 매우 건조한 외교적 수사로 국서를 작성해 황제의 사절들에게 건네주었다.

[율도와 주나라 양국 간의 항구적인 평화를 고대합니다.]

이로써 양국 간의 긴장 상태는 다시 해소되고 있었다.

김사미와 함께 진나라 공물론자들에게 끌려간 정국은 그곳에서 인질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황제 황치우는 진나라로 3만의 병력을 추가 파견하기는 했지만, 황자의 안전을 위해 이전처럼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공물론자 색출 작전이나 은거지를 찾아 공격하는 등의 군사 작전을 더 이상 펼칠 수 없었다.

관군들의 활동이 뜸해지자 공물론자들은 이를 기회로 진나라의 소작농들을 대상으로 세력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백성의 고혈들 빨아먹는 지주, 세습 양반들에 대한 깊은 원한을 갖고 있던 수많은 촌부들이 낫과 곡괭이를 들고 이들에게 가담하게 되면서 공물론자들의 세력은 금세 20만에 육박하게 되었다.

이는 진나라에 있는 관군의 2배 이상 되는 규모였다.

비록 관군들에 비해 무장은 빈약할지 몰라도 머릿수에서만큼은 압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공물론자들이 하나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김사미가 정국을 진나라로 끌고 왔을 때,

율도의 흑영단원들도 공물론자들 사이에 몰래 숨어 들어왔다는 사실 말이다.

김사미도 흑영단이 자신을 항상 감시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아예 자신의 조직 안에 자리 잡았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흑영단은 공물론자들 사이에서 실체를 감춘 채,

강운예의 다음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 달 후 7월 33일.

3은 도깨비들이 길하다고 여기는 숫자였다. 3이 두 개나 들어간 33일은 한 달 중 가장 운이 좋고 복이 충만한 날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이런 좋은 날에 맞춰 대월국의 수도 은허에서는 7왕자 진효명의 국왕 즉위식 겸,

율도 태상국의 영애, 강예나와의 혼인식이 동시에 거행되었다.

대월국 각 번의 번주들과 귀족들은 물론.

강운예과 영록 등 율도의 주요 인사들도 모두 이 자리에 참석했다.

꽃과 비단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왕성 내부로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예복을 입은 수많은 이들이 몰려든 가운데,

새 국왕의 친척 진미령 역시 즉위식에 함께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왕명으로 흥원을 떠나 가족들과 함께 은허의 왕성에서 왕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그녀는 물론 그녀의 가족들 모두 전쟁에서 입은 몸과 마음의 상처로 인해 흥원을 다스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새 국왕의 명에 순순히 따르기로 한 것이다.

이제 흥원은 새 국왕의 명으로 율도에 할양되어 다른 나라의 땅이 되어 있었다.

원래 흥원에 있던 도깨비들 중 절반은 율도의 지배를 받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른 번으로의 이주를 선택했고,

나머지 반은 그래도 천민이나 귀족의 구분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대우받으며 살 수 있다면서 율도의 국민으로 귀화하기로 했다.

명천백 피호석 등 반란군 번주들도 이제 모두 성산 등 대월국의 서북쪽 땅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번주가 바뀐 땅의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누가 자신을 지배한들 죽어라 일해 세금 갖다 바쳐야 하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며 말이다.

율도는 약속대로 흥원에서부터 대월국 서북쪽을 연결하는 도로를 놓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새 국왕 진효명이 다스리게 될 대월국 영토 안으로도 율도의 도로가 놓여지고 있었다.

도로는 단순히 ‘길’이라는 의미 말고도,

‘율도의 영향력과 지배력’이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율도의 태상국 강운예은 대월국 새 왕비의 아버지 자격으로 혼인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그의 곁에는 영부인 이소영이 아닌 예나의 모친 한유리와 함께 하고 있었다.

국가 지도자 가문끼리의 결혼식인데, 한 나라의 왕비가 될 사람의 어머니가 정실이 아닌 측실이라는 걸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강운예는 이소영을 설득해 이번 결혼식에는 한유리와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이소영은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유리의 입장을 고려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고 한다.

“...이로써 대월국을 다스리는 새 국왕 전하와 새 왕비 전하께서 즉위했음을 선포합니다! 국왕 전하, 왕비 전하! 두 분 모두 장수의 축복을 누리소서!”

귀족 원로회 대표가 진효명과 예나의 머리에 화려한 왕관을 씌워주고,

대월국에 새 국왕과 왕비가 즉위했음을 만방에 선포했다.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색유리(스테인드글라스)로 가득한 수정궁 은허의 왕성 안에 흥겨운 나팔 소리와 함께 꽃잎이 휘날리고,

많은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서 두 사람의 앞날을, 그리고 대월국의 미래를 축복하며 손뼉을 쳐주었다.

진효명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도 신부측 부모석에 앉아 있는 강운예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고,

예나는 진효명의 팔짱을 낀 채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밝게 웃으며 왕비가 된 지금 이 순간을 마냥 즐기고 있었다.

결혼식을 마친 후, 강운예는 최근에 완공된 율도 – 흥원 – 태진의 초원길을 잇는 도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는 항구에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1급 전함 충무공함을 타고 백화로 출발했다.

이 배에는 영록은 물론 한유리와 그녀를 호위하는 유경패도 함께 타고 있었다.

이제 유경패는 정식으로 백영단 무사가 되어 있었다.

계급은 진채연과 같은 대위.

아직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지만 진채연도 유경패가 백영단에 들어왔다는 걸 영록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딴 애가 어떻게...?”

두 사람 사이 어떤 앙금이 남아있는 건지 모르지만 진채연은 그녀의 소식을 듣고 몹시 불만스러워했다.

백영단에 들어왔지만 당분간 두 사람이 만날 기회는 적을 듯 했다. 진채연의 근무지는 평연당이지만 유경패는 대원수부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한유리의 저택에서 근무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록이 충무공 함의 갑판 위에서 한유리, 유경패 등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다들 여기 모여 있었군?”

강운예가 선실에서 나오며 밝게 웃었다.

“앗, 관장님!”

영록은 그에게 목례를 한 후 자리를 피해주려 했다. 그가 한유리를 만나러 나온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니, 넌 남고, 당신은 안에서 기다려 주겠어?”

강운예는 도리어 한유리와 유경패을 보내고 영록과 단둘이 갑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대동에 온 지 9개월 정도 되었지? 아직 1년은 안 되었고 말이야.”

“네, 맞습니다.”

“9개월... 전에 성산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내가 너보고 네 여자친구 구하려면 10년은 수련해야 한다고 했던 말 기억하니?”

“네, 그래서 앞으로도 관장님 밑에서 열심히 수련하려고...”

“아니, 이제 됐다. 이만하면 돌아가도 될 만큼 넌 충분히 수련을 마쳤다.”

그 말에 영록이 깜짝 놀라 강운예를 올려다 보았다.

“그럼... 저 진짜 다시 돌아가도 되는 거예요...?”

“혼자서 두억시니를 때려잡을 실력이면 된 거지. 평연당에 도착하면 바로 돌아갈 짐을 싸거라. 내가 준 철편들도 꼭 챙겨가고. 여기서 입던 옷 그대로 입고 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수 있으니 여기 넘어올 때 입고 있었던 네 청바지랑 후드티 꼭 챙겨서 가도록 하고.”

영록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드디어... 드디어 유민이를 구하러 가는 거야...!’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강운예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돌아가면 그곳은 고작 며칠이 지나 있을 게다. 그곳과 대동은 물리적 시간이 서로 다르니까. 너도 알고 있지?”

“네, 그래서... 그래서 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돌아가야 네 여자친구를 찾을 가능성이 더 커지겠지.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란다. 그리고.”

그가 영록의 눈을 찬찬히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널 전쟁터에 보냈던 이유, 네가 그곳에서 잘 배웠기를 바란다.”

영록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살생... 복수... 그것보다 유민이를 구하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복수 때문에 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겠습니다.”

“그래, 그 약속 꼭 지켜야 한다.”

강운예는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누리마루로 떠나기 전날 밤, 강운예가 별당 2층 자신의 서재로 영록을 불렀다.

“돌아가면 안양에 있는 국군정보사령부를 찾아가라. 위병소에 가서 변성일이라는 사람을 만나러 왔다고 하고, 이걸 보여주면 널 만나 줄 거다.”

그는 비단에 쌓인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237AJ865YT194SU... 이게 대체 뭐죠?”

“나하고 변성일 그 사람만 아는 암호 같은 거다. 이걸 보면 내가 너를 보냈다는 걸 알고 잘 도와줄 거야.”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을까요? 국군정보사령부에 있다니까 군인이신건가요?”

“그렇지. 지금 계급이 소장이나 중장 쯤 되었을 것 같은데, 워낙 능력이 뛰어난 사람인데다가 원래 정보사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잘 옮겨 다니지 않으니까 아직도 거기 남아있을 거다. 아주 높은 자리에 있을지도 모르지.”

“그럼 이 분이 유민이를 찾아줄 수 있는 거예요?”

“100%라고 장담은 못 해도 우리나라에서 이 사람보다 더 정보 수집 위치 추적에 능한 사람도 없어. 네 여자친구 있는 곳은 이 사람이 찾아줄 테니, 넌 이제 그 아이를 어떻게 구할지 잘 고민해보렴. 그리고 또,”

그는 서랍에서 웬 카드 하나를 꺼내 영록에게 내밀었다.

신용카드처럼 생긴 마그네틱 카드였는데, 영록은 오랜만에 보는 현실 세계 물건을 받아들고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내가 쓰던 은행 체크카드야. 여기 올 때 내 지갑 속에 있던 건데 기념으로 계속 간직하고 있었지. 이거 줄 테니 가서 쓰도록 해라. 돌아가서 네 여자친구 찾으러 다닐 때 옷이라도 사 입고 밥이라도 사 먹으면서 다녀야 할 거 아니냐? 잔고 많이 들어있으니까 걱정 말고 마음껏 쓰고, 혹시 현금 필요하면 카드 비번 뒷면에 적혀 있으니 빼서 써라.”

“아, 관장님...! 하지만 이건 관장님 돈이잖아요?”

“하하, 난 이미 이곳에서 대동 최고의 부와 권력을 갖고 있는데 거기 든 통장 잔고의 돈이 뭐가 아깝겠니? 부담 갖지 말고 마음껏 쓰도록 해.”

“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록은 눈물을 흘리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너를 지키기 위해 성산에서 쓰러져간 주혁 등 4군단 무사들, 목라촌에서 함께 싸웠던 2군단 철기병 무사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그곳에서 잘 살아야 한다. 대동으로 다시 돌아와도 상관없지만... 네 여자친구와 그곳에서 부디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 잘 가거라. 꼭 성공하길 바란다.”

강운예는 영록을 따스히 안아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

영록은 영부인 이소영과 예린, 예은 등의 배웅을 받으며 평연당을 출발했다.

정국이 떠난 후, 예린은 상당히 조용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경무관에 다니고는 있지만 학업이나 수련에 정진하지 못하고 매일 의욕 없는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영록이 떠날 때도 아주 잠깐 나와 얼굴을 비출 뿐, 금세 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영록의 곁에는 대월국에 함께 갔었던 성시우 대위 등 친위 군경 여단 무사들과,

최용준, 사승범 두 명의 적영단 무사가 동행했다.

강운예와 함께 현실 세계에 다녀오면서 그곳으로 가기 위한 입구가 누리마루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루한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국가적 기밀에 붙여져 있었다.

혹시라도 마루한을 노리거나 현실 세계로 가는 입구를 알아내고자 하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해가 뜨기 전 한산한 거리를 지나 백화항에 도착한 일행은 그곳에 준비된 작은 군선을 타고 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갔다.

북쪽의 누리마루에서 발원한 강물들은 모두 남쪽으로 흐르기 마련인데, 그 지류를 역으로 올라가다 보니 생각보다 누리마루까지 가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고 누리마루까지 가는 데에는 배를 타는 것보다 나은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영록은, 10년보다 빨리 누리마루로 돌아오게 되었다.

­ 오후 3시, 누리마루 경월당

“이렇게 다시 뵐 수 있어서 무한한 영광이었습니다, 마루한. 며칠 더 모실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럼 살펴 돌아가소서...”

경월당의 당접사 은대명의 눈가는 벌써 촉촉해져 있었다.

그와 함께 있던 경월당의 다모랑들 모두 울먹이는 표정으로 영록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당접사님. 다시뵐 수 있어서 너무 기뻤어요. 당접사님과 여기 계신 모든 분들, 절대 잊지 않을게요.”

영록은 은대명과 다모랑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이제 성시우 대위와 군경 여단 무사들에게 인사를 나눌 차례,

현실 세계로 가는 입구는 이곳 경월당 사람들에게도 알려줄 수 없는 기밀 사항이기에, 여기서부터는 최용준, 사승범 만이 영록과 동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전쟁터에 절 지켜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모두들.”

마루한과 악수를 나누던 성시우 대위는 울컥하는 것을 참으려는 듯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허락하신다면 저 세상 너머까지 마루한을 지키기 위해 따라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곳 대동에 대위님이 사랑하시는 분들이 남아계시잖아요? 저를 따라갔다 돌아오시게 되면... 그때 그분들이 더 이상 남아계시지 않을지도 몰라요, 이곳 대동과 그곳은 서로 시간의 흐름이 너무 다르니까요.”

“마루한...”

“항상 건강하세요, 그럼...”

영록은 군경 여단 무사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모두 악수를 나눈 후, 최용준, 사승범을 따라 누리마루를 오르기 시작했다.

경월당에 모인 사람들 모두, 이제 청년처럼 듬직해진 마루한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세 사람은 거대한 폭포가 떨어지는 누리마루의 정상 부근까지 오르고 있었다.

가는 길에 영록이 물었다.

“어제 보니까 경월당에 다모랑 말고 한자손 여자가 한 분 계시던데요? 원래 전에는 경월당에 다모랑 말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던 거 같은데, 그분은 누구세요?”

그의 물음에 사승범이 대답했다.

“마루한이 오시기 전 흑영단이 데리고 온 주나라 무녀라고 합니다.”

“주나라의 무녀요? 무녀면 무당을 말하는 거예요?”

“정확한 건 모르지만 그 여자가 마루한과 그 자손의 기운을 읽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지난번 주나라에서 황자와 큰 영애를 찾으려 무사들을 보냈을 때, 그때 그 여자의 능력으로 두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던 거라고 합니다.”

“기운을 읽는다... 그거 참 신기하네요. 그런데 주나라 사람이라면서 왜 흑영단이 그녀를 이리로 데리고 온 거죠?”

“그 무녀는 주나라 황자가 체포될 때 같이 잡혔는데 그때 흑영단이 거래를 하나 제안했다고 합니다.”

“거래요?”

“국경을 무단으로 넘어오고 우리 군사들을 상하게 한 죄로 평생 지하 감옥에서 썩던가, 아니면 흑영단이 하는 일에 협조하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 거죠.”

“그래서 그 무녀가 흑영단의 제안을 받아들인 거군요? 그런데 그녀가 여기 누리마루에 있다는 건...?”

“네, 앞으로 그 무녀는 여기서 마루한의 기운을 읽는 일을 맡게 될 거랍니다.”

영록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 제 기운을 읽는다구요? 그럼 여기서 저를 스토킹... 아니, 내가 거기서 뭐 하나 추적한다는 말씀인건가요?”

“하하, 추적이라기보다는 태상국 기하께서 혹시 그곳에서 마루한께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마음에 그런 지시를 내리셨을 겁니다. 실제로 태상국께서 마루한과 함께 저쪽 세상을 다시 한번 다녀올까 최근까지 심각하게 고민하셨으니까요.”

“아아, 그렇군요...”

최용준이 덧붙여 설명했다.

“앞으로 무녀는 이곳에서 마루한의 기운을 읽어낸 결과에 대해 매일 매일 태상국 기하께 보고서를 보낼 예정이라고 합니다.”

“제 기운을 읽는다는 건, 제가 진짜 먹고 자고 싸고... 이러는 것까지 다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겠죠?”

“하하하,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꼭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제가 다시 대동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네, 마루한을 다시 뵐 수 있게 된다면 꼭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영록은 웃으며 최용준과 손을 맞잡았다.

한참을 올라갔을 때,

폭포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오는 산 정상 부근에 아주 작은 돌무더기가 있었다.

“이곳입니다.”

최용준과 사승범이 돌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입구가 나왔다.

“저 밑으로 내려가면 바로 폭포로 향하는 급류가 나옵니다. 하지만 염려 마십시오. 마치 그곳에서 대동으로 올 때처럼, 그 급류에 몸을 던지면 바로 마루한께서 살던 세상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영록은 물에 젖지 않도록 잔뜩 기름을 먹인 한지와 비단으로 만들어진 배낭을 가슴 앞으로 끌어 앉았다.

그리고 두 사람과 마지막 악수를 나누었다.

“감사합니다, 두 분 다.”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두 사람과 작별의 인사를 나눈 후,

영록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작은 입구로 들어갔다.

몇 발자국 내려가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느껴지고,

거친 물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여기 올 때처럼 물 속에 몸을 던지면 된다 이거지?’

물에 빠져야 한다는 사실에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저 뒤편 입구에서 비춰 들어오는 미세한 빛줄기에 어둠 속에서 쏜살같이 흘러가는 물줄기의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영록은 배낭을 꼭 껴안고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유민아... 조금만 기다려...!’

그는 손으로 코와 입을 꼭 막고,

급류 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친 물속의 어둠 속에서 몸이 이리저리 위태롭게 휩쓸려가고,

곧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가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유민을 만나게 될 거란 희망에,

영록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잃지 않으려 버티고 또 버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콜록...! 콜록...!”

영록은 기침과 함께 물을 토해내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아아... 돌아온건가...? 여기... 여기 어디야...? 나, 돌아온 거 맞는 거지...? 여기 한국 맞는 거지...?”

그는 가슴에 있는 배낭을 꽉 끌어안고 엉금엉금 물 밖으로 기어 나왔다.

지금 시간이 밤이라 그런지 주변은 아직 어둠에 묻혀 있었다.

처음에는 아직 대동에 있는 건 아닌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 건 아닌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아, 나 돌아왔구나...!”

영록은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밤하늘에 떠 있는 은빛 달,

분명 대동의 밤하늘에서 보던 붉고 푸른 두 개의 달이 아니었다.

그리고 물에서 빠져나오자 나오는 콘크리트로 포장된 강둑과,

저 멀리 보이는 도시의 불빛까지.

영록은,

정말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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