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75화 (175/217)

〈 175화 〉 대동력 9,994년 6월 10일

* * *

­ 오전 10시, 율도 백화 대원수부 평연당

어머니와 함께 평연당으로 돌아온 예린은 외출을 금지당한 채 한동안 집안에만 틀어박혀 생활하고 있었다.

경무관에 다시 다니는 문제도 아버지 강운예가 돌아올 때까지 잠시 결정을 미루기로 했다.

이소영은 백영단장을 불러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평연당 주변 경계와 순찰을 강화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이에 백영단장은 평연당 입구를 경계하는 병력 외에 평연당 건물 주변, 특히 예린의 방이 보이는 지점에도 백영단 무사들을 배치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진채연 등 여무사들이 평연당 2층 거실에 대기하며 30시간 내내 (대동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30시간이다.) 예린을 감시할 수 있도록 했다.

2층에는 예린과 예은 여자아이들만 남아 있기에 남자들보다는 여무사들이 있는 좋을 것 같아서였다.

진채연 등 여무사들이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평연당 집사가 가져다준 다과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더니 예린이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 가니?”

진채연의 물음에 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요.”

“뭔데? 물어봐.”

“어제 엄마가 그러시던데, 아빠 전쟁 이겨서 이제 곧 돌아오실 거라구요. 언제쯤 돌아오시는지 아세요?”

“글쎄? 아무래도 대월국과의 거리가 있으니까 몇 주 걸리시지 않을까? 배를 타고 오시면 며칠 만에 오실 수도 있지만.”

“그렇구나... 그러면은요...”

뭔가 말하기 부끄러운 주제인 건지 예린은 계속 쭈뼛거리고 있었다.

“뭔데? 왜, 아빠 돌아오시면 많이 혼날까봐 무서워서?”

“아뇨, 그게 아니라요... 정국이... 어떻게 된 지 들으신 거 있으세요?”

진채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얘가 아직도... 주나라 황자에 대해 따로 들은 건 없어.”

“정말요...? 정말 들으신 거 하나도 없어요?”

“난 흑영단이 아니라 백영단이잖니? 그런 것까지는 나도 잘 몰라.”

예린은 아쉬운 듯 울상을 지었다.

그때 계단으로 평연당 집사가 다과가 가득 든 쟁반을 들고 올라왔다.

“혹시 부족한 건 없으신지요? 아까 따뜻한 차를 내어드렸는데 이제 여름이라 시원한 음료가 필요하실 거 같아 더 준비해 봤습니다.”

집사를 본 예린이 후다닥 그에게 달려갔다.

진채연과 무사들은 그녀가 또 엉뚱한 짓을 하는 줄 알고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저씨! 아저씨, 저 하나만 물어봐요! 아저씨는 흑영단에서 온 보고서 같은 거 아빠한테 많이 가져다 드리니까 웬만한 정보는 다 알고 계실 거잖아요? 그쵸?”

예린도 그가 평연당을 관리하는 일 외에 국가 중요 정보 문서도 취급하고 있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집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말했다.

“큰 아가씨, 무사님들이 듣고 있어요. 그런 말씀은 아무데서나 하면 안됩니다.”

“알았으니까 하나만 물어볼게요! 정국이, 주나라 황자 말이에요. 지금 어디 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아저씨는 알고 계시죠?”

“어... 그게...”

“정국이 어떻게 되었어요? 주나라로 아예 돌아간 거예요? 아니면, 우리 군에 잡혀 있는 거예요? 그거 하나만 말씀해주세요, 네?”

예린은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집사는 잠시 진채연과 무사들을 바라보고는, 예린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자는 얼마 전 주나라에서 온 무사들과 함께 국경을 넘다가 우리 군에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예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요? 그럼 아직도 율도에 있는 거예요?”

“그것이...”

집사는 잠시 사실대로 말을 해줘야 하나 마나 망설였다.

“주나라 군대가 우리 국경까지 몰려와서 무력 시위를 했지요. 그들도 우리가 황자를 체포해 데리고 있다는 걸 알았던 겁니다.”

“그럼 이제 정국이는 어떻게 되요?”

“그래서 태상국 기하께서는 주나라와의 전쟁을 피하시기 위해 황자를... 율도에서 추방하기로 하셨답니다.”

집사도 정국이 주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물론자들의 반란이 진행 중인 진나라로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말했다가는 또 예린이 돌발 행동을 할까봐 일부러 추방이라고 에둘러 말한 것이다.

그 말에 예린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럼... 정국이는 결국 주나라고 돌아간 거예요?”

“예, 아마도.”

“앞으로 다시 볼 수 있겠죠? 저랑 정국이... 그래도 다시 볼 수 있는 거죠?”

“황자를 내보냈으니 주나라도 국경에서 군대를 물릴 거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양국의 관계도 전처럼 회복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큰 아가씨와 황자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집사의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예린은 불안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건강히만 있어 줘, 정국아. 언젠가는... 언젠가는 꼭 내가 널 다시 만나러 갈게. 그때까지 꼭... 다른 여자 만나지 말고 나 기다리고 있어야 해. 꼭!’

예린은 눈물을 훌쩍이며 자신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진채연은 그녀의 축 처진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 오전 10시, 율도 남쪽 바다 일대

율도의 남쪽 바다는 대동 서부 주나라의 제후국들과 율도의 무역선, 그리고 이들을 호위하는 군선들로 항상 북적이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기잡이하는 어선들만 간간이 눈에 띌 뿐이었다.

주나라가 율도의 국경 일대에 군대를 배치하면서 양국 간의 해상 무역이 잠정적으로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선단이 있었다.

1척의 호위함, 2척의 초계함, 그리고 1척의 무역선이었는데, 이들 모두 흰색 바탕에 붉은색과 푸른색이 섞인 율도의 깃발을 달고 있었다.

무역선은 사실 흑영단이 소유하고 있는 공작선이었다. 흑영단은 해외로 사람을 보낼 일이 생기면 주로 어선이나 무역선으로 위장한 배를 이용하곤 했는데, 이 무역선 또한 그런 목적의 배들 중 하나였다.

뱃사람들이 갑판 위에서 활대를 잡아당기고 돛을 펴고 감으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초췌한 얼굴의 정국이 뱃머리에 서서 자신 앞에 펼쳐진 드넓은 푸른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정국이 율도를 떠나기 전, 율도군으로 보이는 (정국은 자신을 데리고 가는 이들의 정체가 흑영단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이들이 자신과 예린을 쫓던 김사미를 배에 같이 태우는 것을 보고는,

‘나를 주나라에 데려다주면서 저 공물론자도 함께 넘겨주려고 그러는 건가?’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배는 가장 가까운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율도의 남쪽 바다와 반도를 지나고 대동 서부의 대양을 건너 공물론자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 북쪽 섬 진나라로 향하는 것이고,

진나라에 도착하면 김사미의 손에 이끌려 공물론자들에게로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것까지 모두 알게 된 것이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율도군에게 잡혔을 때에는 나중 가서 강운예에게 무서운 꾸지람을 듣게 될 거라고만 생각했었지,

이렇게 자신을 반란군에게 넘길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사실 정국을 진나라로 옮기려면 육지를 통해 북쪽으로 이동한 다음 그곳에서 배를 타고 해협을 건너 진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자면 우선 누리마루의 높은 산맥을 넘어야 하고 두억시니들이 득실거리는 거록의 고원을 지나야 했다.

게다가 거록은 배를 탈 만한 항구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정국을 데리고 주나라의 제후국인 위나라나 조나라를 통과할 수는 없는 일,

대동 대륙 서쪽으로 멀리 돌아가야 하지만 결국 방법은 바닷길 하나 뿐이었다.

‘이대로 바다에 뛰어들어 버릴까?’

정국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뱃머리 아래로 넘실거리는 파도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바다에 빠지는 것도 맘대로 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황자, 뱃전에 너무 기대 서 있지 마시오. 그러다 떨어집니다.”

어느 틈엔가 다가온 뱃사람 (뱃사람으로 위장한 흑영단원)들이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정국은 그들에게 끌려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선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정국은 눈 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예린아... 만약 우리가 원래 하려던 대로 배를 타고 대동 동부로 갔다면... 우리가 헤어지는 일은 없었지 않을까...? 예린아... 우리 이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 살아서 널 다시 볼 수 있을까?’

이제 선실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며 더 이상 그를 비춰주던 햇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 오전 14시, 율도 서부 국경 지대 일대

“확실히 국경 일대에 있던 주나라 군대들 모두 철수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최기의 말에 서부 육군 2군 사령관 을불군이 망원경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제국이 이렇게 빨리 항복할지 몰랐을 테지. 대월국에서의 전쟁이 정리되면 율도의 다음 상대가 누가 될지 저들도 잘 알 테니.”

두 사람은 관측소에서 내려와 철책이 펼쳐진 토성을 함께 걸었다.

저 멀리 주나라 국경 너머로 보이던 천막들은 벌써 절반 이상 해체되어 있었고,

율도 국경 토성을 향하고 있던 포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는 듯 포진지에서 꺼내 수레에 매달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가 곧장 공세를 취할까봐 겁먹은 걸까요?”

최기의 물음에 을불군은 호탕하게 웃었다.

“당연히 겁을 먹었겠지. 믿고 있었던 천제국이 그리 허망하게 무너졌으니, 곧 자신들에게도 대원수 기하의 진노가 미칠 걸 생각하니 겁이 날 수밖에. 하하하!”

을불군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또 주나라 입장에서는 이곳보다 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이 하나 있지.”

“진나라 말씀이십니까?”

“응, 그렇지.”

“하지만 주나라에서 5만 이상의 병력을 보내면서 반란군들을 완전히 진압하기 일보 직전이라고 들었습니다.”

을불군은 고개를 저었다.

“대원수께서 또 하나의 변수를 만드셨네.”

“변수라 하시면?”

“얼마 전 자네가 붙잡은 주나라 황자 말이네. 대원수 기하께서 황자를 진나라에 있는 반란군들, 공물론자들에게 보내기로 하셨거든.”

그 말에 최기도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

“황자를 반란군들에게 보내시면, 그럼 황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연히 그를 인질로 사용하겠지. 이미 반란군들이 주나라 황실에 이를 알린 모양이야. 지금 주나라 군대들이 철수하는 것도 이 일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고.”

최기는 지난날 누리마루에서 함께 싸우기도 했던 정국의 모습을 떠올렸다.

“주나라 황제가 황자 때문에 무척 속을 끓이고 있겠군요.”

“마루한이지만 부모 심정은 다 똑같겠지. 자기 자식이, 그것도 황가의 가장 중요한 황손이 반란군 손에 넘어갔다고 하니 다른 곳에 정신을 쏟을 겨를이 없을 거야.”

“그럼 지금 우리 국경에서 철수시킨 병력들을 모두 진나라로 보내려는 걸까요?”

“그건 아직 알 수 없네. 하지만 황자가 인질로 잡혀 있으니 당분간 반란군들에 대한 공격은 할 수 없을 것이야. 그리고 또,”

을불군 대장은 서쪽을 향해 이동하는 주나라 병력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제 지금 같은 상황에서 주나라는 우리 율도와의 관계 개선이 절실하겠지. 우리도 그렇지만 저들도 전선이 나뉘어지면 힘든 전쟁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더욱이 그 상대가 우리 율도라면 국가의 모든 것을 걸 각오까지 해야 할 것이고.”

“그래도 우리가 황자를 반란군에게 넘겨준 걸 저들도 알 텐데, 저들이 먼저 우리에게 화친을 청해 올까요?”

“그럴 수밖에 없을 거네. 놈들이 천제국과 손잡고 거록 고원에 도로 놓던 일이나 우리 국경 앞까지 군대를 끌고 왔던 일, 이 일들만으로도 우리 율도가 주나라를 공격할 명분은 충분하니까. 이제 곧 대원수 기하께서 친위 군단을 이끌고 대월국에서 돌아오신다고 하셨으니 머지않아 주나라도 외교 사절을 보내 먼저 화친을 제의할 걸세. 우리와 전쟁을 하기 싫다면 말이야.”

최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저들이 화친을 제의하지 않는다면, 대원수 기하께서는 주나라와 전쟁을 벌일 생각이실까요?”

“오랫동안 대원수 기하를 곁에서 모셔 왔지만, 내 생각엔 다른 나라도 아니고 주나라와는 절대 전쟁을 하지는 않으시려 할 걸세. 주나라만큼 좋은 무역 상대국도 없으니까.”

“그럼 왜 황자를 반란군에게 넘기셨죠? 그냥 우리가 데리고 있어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황제를 도발하려 하신 게지. 그동안 황제는 율도의 국력이 강해진 후 표면적으로는 우리와 잘 지내려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사석에서는 여전히 우리 대원수 기하를 자신의 밑으로 여기는 언행을 자주 했다고 하더군.”

“지금도 대원수 기하를 자신의 용병 대장 정도로 치부하는 모양이군요. 몇백 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말입니다.”

“그런 거겠지, 그러니 이번에도 천제국과 뒤로 몰래 손잡고 우리를 기만했던 것일 테고. 그래서 대원수 기하께서도 이번 기회에 황제에게 확실히 보여주려 하셨던 거 같아. 나한테 버릇없이 굴면 난 이렇게까지 할 수 있지만 너희는 나한테 아무 짓도 할 수 없을 거다, 이렇게 말이야. 이번 일로 황제의 자존심이 아주 납작하게 짓뭉개질 수밖에 없겠군. 하하하!”

원래 이맘때면 주나라 군대가 있는 곳에서 점심밥 짓는 연기가 솔솔 올라오는 게 보이곤 했는데, 오늘은 더 이상 그런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밥 먹을 새도 없이 철수를 서둘러야 하는 듯 했다.

“참, 그러고 보니 자네가 황자를 체포할 때 같이 잡힌 여자가 하나 있지 않은가? 흑영단이 와서 백화로 데려갔다고 하더군. 그 여자한테 신비한 능력이 있다면서 말이야.”

“신비한 능력이라면, 어떤 능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루한과 그 후손들의 기를 느낄 수 있다고 그러던가? 황자와 영애를 바로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능력 때문이라고 하더군.”

“마루한과 그 후손의 기를 느낀다구요? 허무맹량한 요설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넓은 율도 안에서 황자와 영애를 단시간만에 찾아낼 수 있었겠나? 흑영단도 뭔가 일리가 있을 법하니 백화로 데려가 다시 확인하려는 거겠지.”

“주나라는 그저 공자 맹자 주자의 가르침 외엔 모두 사문난적이니 뭐니 하면서 경시하는 줄만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대동에서 마루한들이 가장 많은 곳이 주나라이지 않은가? 마루한의 은혜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된 자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네.”

두 사람은 전쟁의 고비를 넘기며 한숨 돌리게 된 덕인지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토성 위를 여유롭게 거닐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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