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74화 (174/217)

〈 174화 〉 대동력 9,994년 6월 9일

* * *

­ 오후 2시, 대월국 서래번 서쪽 일대

흥원으로 철군하던 강운예의 친위 군단들이 잠시 행군을 멈추었다.

대월국 7왕자 진효명을 데려오던 병력과 조우했기 때문이다.

강운예는 길 위에 군막을 설치하도록 하고, 그 안에서 7왕자와 장시간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다.

두 사람 간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당시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말에 따르면 대화를 마치고 군막에서 나오는 7왕자의 얼굴은 마치 무서운 것을 본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고 했다.

7왕자를 호위해서 이곳까지 온 병력 중에는 율도의 군경 여단 무사들 외에도 흥원번 무사단 소속 도깨비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공녀와 함께 환강산성으로 향했던 무사들이 전원 전사했다는 연락을 받았기에, 돌아오는 공녀를 맞이하기 위해 함께 이곳까지 온 것이다.

영록은 행군이 멈춘 사이 잠시 쉬고자 말에서 내렸다.

말도 오래 타고 있자니 엉덩이며 허벅지가 제법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흙으로 다져진 오래된 길 주변으로 논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농민들이 나와 논밭을 일구고 있었다. 이들도 지난번 금양장에서의 전투에서 천제국군이 항복하고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쭉정이를 뽑고 쓰러진 밀단, 볏단을 일으켜 세우는 그들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그런데 길가에 길게 늘어선 수많은 율도군들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농사에 전념하던 농민들이,

갑자기 나타난 흥원번 도깨비 무사들을 보고는 단박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일부러 고개를 돌린 채 흥원번 무사들이 지나갈 때까지 그들 쪽을 쳐다보지도 않으려 했다.

영록은 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흥원번 무사들을 반란군들이라고 착각해서 저러는 거 같은데요? 아무래도 일반 농민분들이라 갑주의 문장만 보고 어디 번 무사들인지 알 수 없을 테니 말이에요.”

곁에서 그를 호위하던 성시우 대위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농민들은 저들이 무사라는 것 때문에 무서워 본능적으로 피하려는 것입니다.”

“무사라는 것 때문에 피한다구요? 혹시라도 자신들을 괴롭힐까 봐?”

“아닙니다, 마루한. 대월국의 맹약 무사들, 혹은 성주나 영주들이 평시에 하는 일 중 제일 중요한 일이 무언지 아십니까?”

“음...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는 일이요?”

“그도 그렇지만 그들의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세금을 걷으러 다니는 일입니다.”

“세금이요?”

“네, 덩치 크고 무기도 가지고 있고 싸움 실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무사들보다 농민들 상대로 세금 걷는 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할 사람들도 없는 법이지요.”

“아, 그래서 저들도 세금 걷으러 다니는 무사들이라 착각하고 저렇게 무서워하는 거였어요?”

“안타깝게도 그런 것 같습니다. 대월국에서는 영주나 성주들에게까지 재판권이 있고 심지어 사형 집행도 할 수 있다고 하지요. 그러니 세금 걷으러 다니는 무사들이 폭력을 휘두르거나 심지어 칼을 뽑아 들고 협박하는 일도 종종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농민들이 무사들만 보면 무서워 저럴 수밖에요.”

“7왕자가 왕이 되면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많이 바꿔주었으면 좋겠네요.”

“왕이 바뀐다 해서 오랜 악습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이제 대월국이 율도와 손을 잡고 더 많은 교류를 하게 된다면 눈에 보이는 변화들이 생길 거라 봅니다.”

마침 그들 곁으로 진미령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루한...”

그녀는 여전히 영록이 보이지 않을 때면 많이 불안해하는 등, 여러모로 그를 의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원래 입고 있던 옷들이 없어진 관계로 율도군의 전포를 빌려 입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무엇이 그리도 불안한지 방풍의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자신의 몸이 조금이라도 보이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공녀님, 어서 오세요. 마침 흥원에서 무사단이 도착했는데 함께 만나보시겠어요?”

그 말에 진미령은 무엇이 두려운지 갑자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흥원번 무사들이 곧 마루한과 공녀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마루한, 위험천만한 전쟁터에서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녀님, 함께 간 무사들이 모두 전사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이제 이곳에서부터는 저희가...”

예를 갖춰 인사를 하던 그들은 공녀의 변한 모습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흥원의 여장부로 항상 당당하기만 하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시종일관 고개를 떨구고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피하려고 하는,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폐인 같은 모습으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 그녀가 전장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지 못했다. 당시 그녀가 두억시니들에게 험한 짓을 당했다는 걸 알고 있던 율도군들 모두 그 일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흥원번 무사들을 보고 진미령은 어두운 표정으로 영록의 뒤로 숨어 버렸다.

“괜찮아요. 저들 모두 공녀와 함께 싸웠던 흥원번 무사들이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영록이 달래 보았지만 그녀는 무사들 앞에 서기를 두려워했다.

두억시니들에게 험한 꼴을 당했던 일과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이 산 채로 잡아먹혔던 기억 때문에,

무사들의 얼굴을 마주하기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꾸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꼭 감고 이를 꽉 깨물고 있었다.

“마루한, 대체... 공녀께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레 공녀께서... 공녀께서 이러시는 겁니까?”

나이가 지긋한 맹약 무사가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영록은 차마 진실을 말해줄 순 없었다.

“전쟁은... 원래 사람을 많이 변하게 하잖아요. 공녀도 이번 전쟁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으니까... 공녀의 가족들도 그렇고 공녀도...”

“하아... 그래도 어찌...”

“당분간 공녀는 저희가 계속 데리고 있도록 할게요. 그러니 잠시 공녀와 거리를 두고 기다리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도깨비 무사 말했다.

“그럼 저희도 태상국의 군대와 함께 흥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가시는 길에 공녀께서 저희를 찾으신다면 언제든 기별해 주십시오.”

영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막을 설치했던 곳으로 가보니 이제 다시 행군을 시작하려는 듯 군사들이 군막을 도로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제법 화려한 모양의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소녀와 여인 한 명이 마차 앞에 서서 강운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애는 그때 평연당에서 본?’

영록은 그 소녀가 예나라는 걸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한유리는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아줌마라고 하기엔 너무 젊고 예쁜데? 인터넷 방송 유부녀 BJ들보다도 훨씬 예쁜데, 누굴까?’

모녀는 강운예와 이야기를 마친 듯, 그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그러다 예나와 영록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제 예나도 그가 마루한이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는 도도한 표정으로 살짝 목례만 하고는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여전히 싸가지 없는 모습이네. 예쁘긴 한데 인성은 참...’

마차가 행군을 준비하는 군사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고,

영록은 홀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강운예에게 다가갔다.

“관장님!”

“아, 영록이 왔구나?”

강운예가 영록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아까 7왕자가 왔다고 들었는데, 바로 은허로 보내시려는 거예요.”

“아니, 다시 흥원으로 데리고 같이 돌아갈 거란다. 은허 주변에서 곧 전투가 있을 예정이라서 말이지.”

“네? 그럼 왜 7왕자를 여기까지 오라고 하신 거예요?”

“응, 내가 없는 사이 7왕자가 우리 주둔지에서 제멋대로 행동했거든. 그런 모습은 왕이 되기 전 확실히 교정해 줄 필요가 있을 거 같아서 부득이하게 여기까지 불렀던 거란다.”

강운예는 푸른 들녘이 펼쳐진 길을 따라 영록과 함께 걸으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럼 그 반란군 놈들을 모두 용서하고 땅도 내어주기로 하신 거예요? 그걸 7왕자가 동의할까요?”

“이미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다.”

“네? 흥원 주둔지에서 반란군 번주들을 죽이기까지 했다면서, 그들에게 땅을 내어주는 데 동의를 했다구요?”

영록은 ‘혹시 관장님이 협박 같은 거 해서 어쩔 수 없이 동의한 거 아님?’이런 눈빛으로 강운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 대월국왕이 천제국에 반란군을 제압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에 대한 대가로 12개 번의 땅을 내어주기로 양국이 협정을 맺었었지. 어차피 반란군에 의해서든 천제국에 의해서든 멸망했을 나라, 대월국의 왕권을 유지시켜 주는 대가로 나 역시 7왕자에게 그와 비슷한 수준의 영토를 요구할 권리가 있지 않겠니?”

“뭐, 그럴 수도 있을 거 같긴 해요. 그런데 왜 그 땅을 반란군 번주들에게 주시는 건데요? 그냥 율도의 영토로 삼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대월국은 오랫동안 순수 도깨비들만의 나라였다. 우리 율도나 천제국 같은 다민족 국가가 아니란 말이지. 그런 사람들은 다른 나라, 다른 종족 사람들이 와서 자신들을 다스린다고 하면 이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이를 관리하기 위해서 엄청난 군사력과 경제력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겠지. 즉, 율도의 영토로 만들어 직접 다스리는 것보다 이렇게 원래 이 나라에 살던 사람들에게 관리를 맡기고 세금을 받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 된다는 말이다.”

“아아~ 그래도, 반란군들을 살려주고 땅까지 줘버리면 7왕자와의 사이가 나빠지시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동의를 했다지만 반란군들은 7왕자의 원수나 마찬가지잖아요? 아무래도 7왕자가 이 일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까요?”

“불만스러울 수밖에. 하지만 7왕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야. 내 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겠지.”

“경각심이요? 그게 무슨 말씀인지...?”

강운예는 다른 이들이 들리지 않도록 영록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소근거렸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영록은 머리 아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치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로군요.”

“하하하, 지금은 이해가 안 되더라도 나중 되면 너도 다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반란군들한테 너무 퍼주시는 거 아니에요? 원래 죽어 마땅한 사람들 목숨도 살려주시고 땅까지 주시고 말이에요.”

“공짜로 준다고는 안 했다. 그들이 새 땅으로 들어가기 전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지.”

“그게 뭔데요?”

“진짜 쓰레기를 없애는 일.”

전속부관이 다가와 행군 출발 준비가 다 되었다 보고하고,

두 사람은 다시 율도군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오후 5시, 대월국 수도 은허 남쪽 악뢰관

금양장 전투에서 천제가 항복을 선언하던 날,

구천락과 그의 수하들은 천제국군 진영을 몰래 빠져나와 곧장 악뢰관으로 도주했다.

그러던 중 율도군의 추격을 받아 대부분이 죽고 구천락만이 간신히 살아 돌아오게 되었고,

그의 보고를 받은 성산백 심운보는 악뢰관에 주둔하고 있던 자신들의 번군들에게 곧장 행군 준비를 시켰다.

“그동안 허송세월만 하고 있었구나! 천제국군을 믿었던 내가 잘못이지! 더 이상 여기서 머뭇거릴 필요 없다! 당장 성산으로 돌아가 방어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번군들이 모두 준비되자마자 심운보는 즉시 악뢰관을 나서려 했다.

그때,

행군로를 미리 확인하기 위해 나갔던 정찰대 무사들이 다급히 돌아와 보고했다.

“각하! 북쪽에 있던 명천백의 무리들이 남하하고 있습니다!”

심운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하라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허를 다시 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남하라니? 어디로 향하려 한다는 말이냐?”

“확실하지는 않으오나, 그들이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게 된다면 필시 우리가 있는 이곳 악뢰관에 이르게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심운보의 동공이 크게 요동쳤다.

“설마 명천백 그 자가...?”

그도 정보원들을 통해 흥원의 율도군 주둔지를 방문한 피호석 등 반란군 번주들이 7왕자에게 피습을 당해 몇몇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반란군들이 율도군과 연합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하지 않으리라 판단했는데,

‘명천백 그놈이 다시 율도와 무슨 작당이라도 한 건가? 그래서 나를 치려고? 그런데 나를 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그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당황해하고 있을 때,

요새 감시탑에 있던 번군이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나, 남쪽에서 율도군이...! 율도군이 몰려온다! 율도군들이 오고 있다!”

그 말을 들은 심운보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북쪽에서는 명천백의 반란군이, 남쪽에서는 율도군들이...? 정말 저들이 연합을 하고 나를...?’

심운보는 행군을 출발하려는 번군들에게 다시 소리를 질렀다.

“요새의 성문을 닫고 모두 다시 안으로 들어가라! 전군 방어 태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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