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대동력 9,994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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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서쪽 율도군 전투지휘소
결국 천제는 강운예가 항복을 받아주는 대가로 요구한 조건들을 모두 수용하기로 했다.
요구 조건 중에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전쟁보상금 배상에 대한 것은 물론 천제국이 주나라와 손잡고 추진 중이던 거록 고원으로의 무역로 개발 중단, 파림 등 율도 남부 국경지대 국가로의 화약 무기 지원 중단에 대한 요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과거 이구 전투 패전 이후 겪었던 치욕을 넘어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정선교는 그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전력을 기울여 만든, 이것만 있으면 천하의 율도군도 감히 상대가 되지 않을거라 호언 했던 신무기 천제벽력포가 도리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리라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강운예는 약속대로 천제국군 진영을 겨냥하고 있던 모든 천제벽력포의 포구를 돌리도록 지시했다.
그런 후 천제국군 전 병력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무기, 갑주는 물론 군마와 수레까지 모조리 압수했다.
하지만 천제와 천제국군들을 둘러싸고 있는 포위망은 절대 풀지 않았다.
항복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제시한 전쟁보상금이 도착할 때까지, 그들 모두를 볼모로 잡아두려는 것이었다.
환강산성과 천제국으로부터 이어지는 보급로 상에 남아 있던 잔존 병력들도 모두 체포되어 이곳 금양장으로 끌려오고,
천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대월국 영도 대부분이 율도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전쟁은 이렇게 서서히 막을 내리는 듯 했다.
영록은 성시우 대위와 함께 짐을 싸서 자신의 말들 위에 싣는 중이었다.
강운예가 볼모로 잡아 놓은 천제국군들을 감시할 병력만을 남기고 모두 흥원으로 철수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흥원으로 갔다가 곧 율도로 돌아가는 거죠? 군사들 모두 말이에요.”
영록의 물음에 성시우 대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모두는 아니고 당분간 흥원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1, 2개 군단 정도는 계속 남겨둘 것 같습니다.”
“그럼 흥원 땅을 진짜 율도가 점령하는 거예요?”
“점령, 이라기 보다 할양이라고 봐야겠지요? 이제 곧 대월국왕 자리에 오를 7왕자의 왕권을 지켜주고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된 것에 대한 보답으로 말입니다.”
“아... 그럼 흥원공녀는 어떻게 되요? 이제 공녀가 부친을 대신해서 흥원의 번주가 되어야 하는데, 율도가 흥원을 차지하게 되면 다른 곳으로 내쫓기게 되는 건가요?”
“음... 그 문제는 7왕자가 알아서 잘 처리하지 않을까요? 공녀를 흥원 대신 다른 곳의 번주로 임명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어차피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주인 잃은 땅들이 여럿 남게 될 테니 말입니다.”
금양장 일대에서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동안 뜻하지 않은 변수가 생겨 버렸다.
명천백 피호석 등 반란군 번주들이 흥원의 율도군 주둔지에 방문했을 때, 이 소식을 들은 7왕자 진효명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난입, 칼을 휘두른 것이다.
이로인해 반란군 번주 2명이 그 자리에서 진효명이 휘두른 칼에 맞아 죽고, 피호석도 부상을 입고 말았다.
반란군 번주들은 그 즉시 흥원을 떠나 은허 인근 자신들의 주둔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율도와 손을 잡는다 해도 진효명이 대월국의 왕위에 오르게 되는 이상 앞으로 자신들의 땅과 재산, 목숨을 부지하기는 힘들 거라 판단하고, 이번엔 천제국과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천제가 이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전 율도군에 항복을 선언하게 되고,
반란군은 이제 다시 홀로 남겨진 처지가 되고 말았다.
전투 지휘에 집중하느라 흥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보고를 늦게 확인하게 된 강운예는 무척 격노했다고 한다.
그는 즉시 흑영단으로 하여금 반란군의 동향을 확인할 수 있도록 지시하는 한편,
7왕자 진효명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어차피 천제국과의 전쟁이 끝나면 7왕자를 은허로 데려가 왕좌에 앉히려는 생각이었지만,
그 전에 또 한 번 자신의 말을 거역하고 함부로 준동한다면 왕위를 계승하기 힘들 수도 있다는 걸 확실히 경고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참, 7왕자가 흥원에서 출발했다면서요?”
“네, 작은 부인과 영애도 동행한다고 들었습니다.”
“작은 부인 영애라면, 예나요?”
지난날 평연당에서 본 도도하고 새초롬한 예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걔도 대월국에 와있었어요? 근데 걔가 왜 7왕자 하고 동행해요?”
“마루한께서는 아직 듣지 못하셨군요? 기하께서 영애를 7왕자와 혼인시키시려 한다는 거 말입니다.”
“혼인이라구요? 그럼 걔가 대월국 왕비가 되는 거예요? 도깨비 나라 왕비요?”
“네, 그렇지요. 그렇게 되면 아마 대월국 역사상 최초로 도깨비가 아닌 여인이 왕비가 되는 일이 벌어지겠군요. 대월국 귀족들 중에서 반대하는 이들이 많긴 하겠지만, 영애의 부친이 누구인지 다들 알 테니 불만이 있어도 함부로 입에 올리기는 힘들 겁니다.”
대월국의 왕비는 자국의 명망 높은 귀족 가문 영애나 같은 도깨비의 나라 태진의 왕족, 또는 귀족들 중에서 나오곤 했다.
도깨비가 아닌 이가 왕가의 핏줄에 섞이는 일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아리랑, 한자손 등 다른 종족 출신 여인이 후궁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왕비의 자리는 오직 순혈 도깨비 여인만이 선택 되어지곤 했다.
예나가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지금껏 대월국 역사에 전례가 없던 일이 되게 된다.
오랜 세월 동안 도깨비들과 깊은 원한을 쌓아온 강운예인데,
이제 그의 딸이 도깨비들의 왕비가 되려 하다니.
이 일로 대월국 내에서 큰 분란이 생기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짐들을 확인하고 있을 때, 용마로 소장이 그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출정을 앞둔 사람처럼 갑주를 갖춰 입고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마루한! 이제 복귀할 준비를 하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부군단장님 어서 오세요! 다치신 곳은 괜찮으신가요? 그런데 복장이...?”
영록이 반갑게 다가가다 말고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대원수 기하의 명을 받아 지금 바로 저희 2군단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떠나기 전 마루한께 인사드리기 위해 찾아뵈었습니다.”
“북쪽이라뇨? 북쪽 어디로 가시는데요?”
“은허를 위협하고 있는 반란군들을 제압하라는 대원수 기하의 명입니다. 아무래도 반란군 번주들이 마음을 고쳐먹은 모양이더군요. 흑영단의 보고에 따르면 지금 그들의 군세가 은허를 공략하기 위해 다시 이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원수 기하께서는 더 이상의 전투를 바라시지 않지만, 저들이 구태여 피를 원한다면 그리 해줄 수밖에요.”
“은허라면 대월국의 수도 말이지요?”
“네, 아무래도 수도 은허를 점령하고 7왕자와 협상을 벌이려는 계략인 것 같습니다. 7왕자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해서 이판사판 벼랑 끝 전략을 쓰려는 거겠지요.”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군요...”
“대원수 기하께서 반란군들이 저항을 중단할 수 있도록 사람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기하께서 보낸 사람이 반란군들을 설득한다면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겠지요. 만일 그렇지 않게 되더라도 조만간 저와 저희 2군단 군사들의 손에 이 전쟁이 마무리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용마로 소장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빠졌던 영록,
갑자기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럼 성산백은요? 성산백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지요?”
“성산백의 무리는 은허 남쪽 악뢰관 이라는 곳에 아직 남아 있다고 합니다. 듣자 하니 잠시 천제국과 손을 잡기도 했다는데, 이제 천제국이 우리에게 항복한 이상 다시 명천백 등 반란군들과 연합하는 것도 힘들 테고,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아니면 자신의 본거지인 성산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 성산으로 돌아가면, 관장님이 그 사람을 그냥 놔두지는 않으시겠죠?”
“대원수 기하께서도 그렇고 7왕자도 분명 성산백을 반드시 벌하려 할 것입니다. 애초에 이 전쟁을 시작하게 된 게 모두 다 성산백 그 자의 책임이니 말입니다.”
“성산백 그 사람, 반드시 전쟁을 일으킨 대가를 치렀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욕심 때문에 나라 전체를 망치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도 망가뜨렸잖아요? 그런 사람, 반드시 혹독한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대원수 기하께서도 분명 마루한과 같은 생각이실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곧 돌아와 좋은 소식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용마로 소장은 영록을 향해 손을 올려 군례를 올렸다.
영록도 그의 군례에 손을 올려 답례를 하고는,
나이 어린 사람이 웃어른에게 하듯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작별의 인사를 했다.
오후 1시, 대월국 왕성 은허 서쪽 20리 밖 반란군 주둔지
명천백 피호석은 상기된 표정으로 지휘소로 쓰고 있는 군막을 향해 분주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왼팔에는 피에 물든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흥원 율도군 주둔지에서 7왕자 진효명이 휘두른 칼을 팔로 막다가 입은 상처였다.
다행히 팔이 절단되지는 않았지만 흰 뼈가 훤히 보일 만큼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반란군 번주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고래고래 악을 쓰는 7왕자 때문에, 치료를 해주겠다는 율도군의 호의도 무시하고 곧장 반란군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제 율도와 손을 잡는다 해도 7왕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면 대월국에서의 안전을 장담하기 힘들게 되었다고 판단한 반란군들은, 율도군과 천제국군이 금양장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지금 먼저 수도 은허를 점령한 후 전투에 승리하는 쪽과 협상을 벌여 자신들의 살길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그런데 바로 어제,
천제국군이 율도군에 포위당해 너무 허무하게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불과 하루도 안 되어 자신들의 진영으로 율도 태상국이 보낸 이가 반란군 번주들의 대표, 명천백 피호석을 만나러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율도군에서 누군가 찾아왔다는 소문은 벌써 반란군 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는 모양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번군들 모두 또 한 번 힘겨운 공성전을 치러야 한다는 부담감에 표정들이 잔뜩 굳어 있었는데,
피호석이 지휘소로 가는 길에 마주친 번군들의 얼굴에는 잘하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인지 오랜만에 밝은 생기가 돌고 있었다.
한동안 진중에서 듣지 못했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도 했다.
피호석은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들을 간신히 정리하며 지휘소 안으로 들어갔다.
지휘소 안에는 행정 업무를 보기 위해 상주하는 10여 명의 무사들 말고도 소식을 듣고 달려 온 번주 몇 명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회의용 탁자 위에 놓인 밥과 국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낯선 도깨비 남자가 하나 앉아 있었다.
“역시 대월국 음식 맛은 너무 형편없단 말이야. 갑자기 율도에서 먹던 산해진미가 그리워지네.”
지난날 흥원에서 활동했던 흑영단원, 율도 도깨비였다.
율도 도깨비는 지휘소 안으로 들어오는 피호석을 곁눈질로 흘끗 쳐다보고는 마치 들으라는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점심시간이라고 나 같은 불청객 한테도 밥이랑 국이랑 챙겨주는 정성이 고맙기는 한데, 본인 부하들 먹일 병량도 얼마 안 남았을 텐데 남 챙겨줄 여유가 진짜 있어서 이러는 건가? 후후후.”
그 말을 들은 피호석이 탁자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대가 염려할 일이 아니다. 어차피 은허를 점령하면 병량 문제로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율도 도깨비는 놀란 척 연기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이고, 귀하가 바로 말로만 듣던 명천백 나으리신가 보군요?”
“그래, 내가 바로 명천백이다. 그대가 율도 태상국이 보낸 사람인가?”
“네네, 맞습니다. 율도 태상국께서 보낸 사람이 맞습니다, 헤헤.”
피호석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경박해 보이기 이를 데 없는 이 수상한 도깨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생긴 걸로 보나 말투로 보나, 혹시 그대는 대월국 출신이 아닌가?”
“네, 이 아래 서래번 출신이지요.”
“대월국 사람이 어찌... 뭐, 우리나라 사람들이 율도나 천제국으로 많이 넘어가고 있다는 건 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피호석이 회의용 탁자의 상석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율도 태상국께서 무슨 말씀을 전하시려는지는 이야기 해 보겠나?”
다른 번주들도 율도 도깨비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에~ 우선 태상국... 아! 지금은 전쟁 중이니 대원수 기하라 칭하겠습니다. 아무튼 우리 율도 대원수 기하께서 지난번 흥원에서 있었던 불상사에 대해 심히 유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은 전쟁으로 부왕과 형제 가족을 잃은 7왕자가 잠시 분을 주체하지 못해 일어난 불행한 사고이며, 대원수 기하께서는 우리 군 주둔지 안에서 비명에 간 번주들의 가족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하신다 하셨습니다.”
“이번 일로 율도 태상국께 아무런 감정이 없소. 다만 이번 일로 우린 확실히 깨달았소. 7왕자가 살아있는 한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절대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 말이오.”
율도 도깨비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7왕자가 왕위를 계승해 대월국왕이 된다면, 아무리 대원수 기하라 할지라도 그가 국왕으로서 행하는 모든 일에 배 놔라 감 놔라 시어미 노릇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 율도가 여러분들을 용서해 달라고 조언할 수는 있겠지만, 7왕자에게 이를 강제하도록 명령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피호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말입니다... 대원수 기하께서 여러분께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셨습니다.”
율도 도깨비가 웃으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지도였다.
대월국의 영토가 표시된 지도.
지도에는 산과 강과 같은 대월국의 지형들은 물론 각 번의 경계까지 세세히 표시되어 있었는데,
번주들이 알고 있는 각 번의 구역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이건... 무엇인가?”
반란군 번주 중 하나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것이 바로 대원수 기하의 제안입니다.”
율도 도깨비가 일어서 손가락으로 지도의 서쪽과 북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 성산을 중심으로 거록과 맞닿아 있는 북쪽, 그리고 누리마루와 연해 있는 서쪽 일대의 땅을 지금 여기 계신 번주님들께 새로운 영지로 드리고자 합니다. 이를 수락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이제 대월국왕의 신하가 아니라 율도의 위성 도시 국가를 다스리는 수장으로 거듭나게 되실 겁니다. 즉.”
율도 도깨비는 웃는 얼굴로 번주들의 얼굴을 스윽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대월국으로부터 독립시켜 드리고 앞으로 7왕자가 여러분께 절대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보호해 드릴 거란 말입니다.”
그 말에 반란군 번주들이 수근거렸다.
“하지만 지도에 표시된 곳들 모두 지금 내가 가진 영지보다 척박한 땅들이지 않은가?”
“성산이나 흰서리 산맥 주변은 거록과 맞닿아 있는 땅이다. 그곳은 지금 내가 다스리는 번에 비해 농사지을 땅도 부족하고 가축 키울 땅도 모자란 곳이야!”
“게다가 두억시니들이 수시로 흰서리 산맥을 넘어와 약탈을 일삼는 곳인데, 지금 가진 땅을 내놓고 그런 험한 땅으로 들어가라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율도 도깨비가 번주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면 번군들을 모두 해산시키시겠지요? 그들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농사짓고 가축들을 돌봐야 할 테니까요. 그렇게 여기 모이신 분들 모두 각자 대월국 영토 곳곳에 있는 자신들의 번으로 뿔뿔이 흩어진 후에... 나중 가서 갑자기 7왕자가 여러분들이 반란을 일으킨 일에 대해 복수를 하겠다고 군대를 보내 공격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되시겠습니까?”
지휘소 안에 정적만이 맴돌았다.
율도 도깨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의 말씀대로 대원수 기하께서 제안하신 땅들은 지금 여러분이 가진 번보다 기름진 땅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여러분은 이제 이곳에서 율도의 위성 도시 국가 수장이 되실 것입니다. 즉, 율도의 경제권을 공유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지요. 이제 여러분들의 새로운 영지에 초원길로 연결되는 율도의 도로가 놓여지고 대동 각지의 상인들이 방문하는 시장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영지에서 밀 농사, 쌀 농사나 짓고 소 돼지나 키우면서 가난뱅이 소작농들로부터 쥐꼬리만한 조세나 긁어먹는 것보다, 상인들을 통해 세금을 얻는 게 더 낫다는 거 모르시지는 않겠죠?”
그 말에 번주들이 놀란 표정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율도의 경제권 안으로 들어온다면, 아무리 7왕자가 대월국왕이 되더라도 여러분의 새로운 영지를 함부로 공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율도를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거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피호석이 물었다.
“그럼 태상국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길 원하신단 말씀이오? 은허를 공격하지 말고 군을 다시 뒤로 물리길 원하신다는 거요?”
율도 도깨비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대원수 기하께서 제안하신 땅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하나 있지요.”
“누굴 말하는 거요?”
율도 도깨비가 손가락으로 지도상에 있는 성산을 가리켰다.
“바로 여러분들이 들어갈 땅의 주인이었던 사람, 성산백 심운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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