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대동력 9,994년 6월 6일 (2)
* * *
오전 12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동쪽 일대
율도군 기병들은 마치 현실 세계의 인디언처럼, 혹은 유럽을 정복했던 몽골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천제국군 진영을 포위하고 말을 달리며 잔뜩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적병이 보이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총과 활을 쏘아댔는데,
달리는 말 위에서 사격을 하는데도 그들의 탄환과 화살은 어김없이 적의 머리에 명중하곤 했다.
지난 새벽 천제국군 기병들이 어둠을 틈타 진영 밖으로 나와 포위를 뚫으려 한 적이 있었다.
밤이 되었으니 아무리 사격술이 뛰어난 자라도 자신들을 맞추기 힘들 거라 생각했지만,
율도군이 부대 단위로 화망을 구성하고 기다렸다가 명화시로 밤하늘을 밝게 밝히고는 탄환과 화살로 십자포화를 쏟아부어 버리는 바람에 수백여 명의 사상자만 내고 도로 자신들의 진영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해가 높다랗게 뜨고 초여름의 열기가 금양장 일대에 가득해질 무렵,
다시 천제국군 진영에서 한 떼의 군마가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놈들이 또 나온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바라는 대로 해줘야지!”
율도군 기병들이 활과 총을 들어 진영을 나오는 천제국군들을 겨누었다.
그때,
기병들을 지휘하던 율도군 무관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사격 중지! 무사들은 무기를 내리고 모두 대기하라!”
기병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총과 활을 내렸다.
“뭐야, 갑자기?”
“아니, 왜 쏘지 말라는 거지? ...응?”
천제국군 진영에서 나오는 이들은 10여 명 정도의 도깨비들과 아리랑이었다.
갑주를 입은 군사도 있었지만 그중 절반은 천제국 관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맨 선두에 선 기병은 창날이 제거된 긴 창끝에 커다란 백기를 묶어 들고 있었다.
오전 13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서쪽 율도군 전투지휘소
천제의 사절들은 무기를 모두 압수당한 채 금양장 너머 위치한 율도군의 전투지휘소로 끌려갔다.
지나면서 돌아보니 금양장 장터는 율도군들의 임시 주둔지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수천의 기병들이 장터 건물 안에 들어가 앉아 물을 마시고 전투식량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천제국군 진영 앞에서 말을 타고 달리다가 다른 부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쉬러 들어온 무사들이었다.
무사들은 천제국군의 갑주와 복장을 한 이들이 끌려가는 것을 보고 죽일 듯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살벌한 눈빛에 기가 죽은 관리들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땅만 보고 걸었다.
금양장을 지나 인근에 있는 작은 마을에 들어가니, 그곳도 검은 갑주를 입은 수천여 명의 율도군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모두 적의 가득한 눈으로 천제의 사절들을 잡아 먹을 듯 노려보았다.
율도군들은 사절단을 마을에서 가장 큰 가옥이 있는 곳으로 인도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는 붉은 방풍의를 두른 수십여 명의 적영단들이 칼을 빼 들고 시립해 있는 가운데, 율도군의 고위 장성들로 보이는 무관들이 탁자 양쪽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탁자의 가운데 자리에, 황금빛 사자의 모피를 어깨에 두르고 있는 강운예가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뒤편으로 천제가 그토록 찾았던 어린 마루한 영록이 앉아 있는 것도 보였다.
“유, 율도 태상국 기하께 문안드립니다...”
사절단의 대표로 보이는 아리랑 출신의 중년 남자가 강운예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를 따라온 다른 사절들도 강운예에게 예를 표했다.
강운예가 사절단 대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에 온 용건에 대해 고하라.”
조용하지만 아주 또렷한 목소리.
어떤 위협도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음성이었지만, 사절단 모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저, 저희는 천제 성하의 명을 받자와 이곳까지 오게 되었나이다. 천제국과 율도 양국은 오랜 세월 동안 숱한 전쟁을 겪으며 다시는 회복하기 힘든 외교적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로 인해 양국 간의 교류는 물론 국가간 소통도 미진했던바, 이번 전쟁 역시 양국 간 소통의 부재에서 온...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려됩...”
사절의 말이 길어지자 강운예가 탁자를 가볍게 쾅, 내리치며 말했다.
“불필요한 말은 그만 두고 본론을 얘기하라.”
강운예의 음성은 여전히 작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사절단들은 6월 초여름 날씨에도 서늘한 한기를 느끼며 오금을 떨어야만 했다.
“하, 하여... 이쯤에서 전쟁을 멈추시고 양국 간의 평화를 도모하시어 불필요한 희생이 없도록 하심이... 천제 성하께서 태상국 기하께 그리 청원한다 하셨습니다...”
사절의 말에 강운예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청원? 살려달라는 말은 빙빙 돌려 너무 길게 하는구나. 그냥 무조건 항복한다고 말하면 될 것을.”
대원수의 말에 안에 모여 있던 율도군 장성들 모두 껄껄 웃었다.
사절들은 벌게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강운예가 사절단 대표에게 물었다.
“그래, 항복을 받아주는 대가로 천제가 내게 무엇을 준다 하더냐?”
“처, 천제 성하께서 말씀하시길... 우선 아군 진영을 겨누고 있는 천제벽력포의 포구를 다른 곳으로 돌려주시면 바로 그에 대한 협상을 시작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런 요청을 내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나?”
“그, 그것은...”
“보통 항복을 받아달라고 부탁할 땐 먼저 우리가 이만큼 내어드리겠으니 항복을 받아달라, 이렇게 제안을 하는 게 순서가 아닌가? 내 귀를 솔깃하게 할 정도의 제안도 가져오지 않았으면서 먼저 자신들에 대한 위협을 제거해주면 그때 다시 협상을 시작하겠다? 이건 전혀 항복하려는 이의 자세로 보이지 않는데?”
사절단 대표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런 문제로 오랜 시간 담론을 주고받지 않을 것이다. 항복을 받아주는 조건은 내가 제시할 테니, 그대는 가서 천제에게 이대로 전하라. 내가 그대들의 답을 기다려주는 건 오후 2시까지이다.”
강운예는 적영단 무사를 통해 문서 하나를 사절단 대표에게 전해 주었다.
율도 태상국이 준 문서를 받아 읽어보던 사절단 대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 하오나 태상국 기하...! 여기에 적힌 전쟁 보상금의 액수는 우리 천제국의 5년치 세액과 맞먹는 금액입니다!”
“그대 나라의 세액이 그것밖에 안 되는가? 그래도 우리 군이 4개 군단 20여만 병력을 여기 대월국까지 데리고 오면서 들어간 비용은 모두 보상받아야겠는데? 게다가.”
강운예가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대들의 왕, 정선교의 간계로 인해 얼마 전 남쪽 국경에서 파림과 국지전을 치러야 했지! 지금은 주나라와의 국경에서 양국 병력이 대치하고 있고! 또 율도의 초원길을 막고자 주나라와 함께 거록의 고원에 새로 교역로를 만들려 했잖나? 이 모든 게 너희의 모자란 왕, 정선교의 머리에서 나온 거란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천제를 왕이라 칭하고 심지어 이름까지 들먹이는데도,
사절단 중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모두 강운예의 몸에서 뿜어져 엄청난 위압감에 바들바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강운예가 자신의 손목에 있는 시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오늘 2시까지 기다릴 것이다. 2시 이후에도 아무런 답을 보내지 않는다면... 너희들의 왕 정선교는 물론 너희와 너희 나라 군대 모두 오늘 저녁 석양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는 사절단 대표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록도 스승을 따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지휘소 밖으로 나갔다.
오후 1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서쪽 율도군 전투지휘소
천제의 사절들이 돌아간 후, 강운예는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4보병 사단을 천제벽력포가 있는 언덕으로 이동시켰다.
천제국군이 언덕을 탈환하려는 시도를 원천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사절단이 답을 가지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강운예는 자신의 증손자 강지헌을 불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얘가 예린이고 옆에 있는 애가 셋째 예은이야. 네가 예은이를 본 적이 있던가?”
강운예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가족 초상화를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예성이하고 예린이는 아주 어렸을 때 잠깐 본 적 있지만 예은이는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이 분들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되겠군요? 촌수로는 할아버지 할머니 뻘인 분들인데.”
강운예가 그의 증조할아버지이니, 예성, 예린, 예은은 항렬 상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뻘이 된다.
“그러고보니 네가 예성이보다 다섯 살 위던가?”
“여섯 살 위입니다, 증조 할아버지.”
“아, 그렇지? 내가 워낙 오래 살다 보니 매번 이렇게 후손들끼리 족보가 꼬이는 일이 일어난단 말이지. 허허허.”
강운예도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두 사람이 초상화를 보며 가족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영록이 기쁜 얼굴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관장님! 천제의 사절들이 다시 오고 있데요! 백기를 들고 다시 우리 쪽으로 오고 있데요! 이제 진짜 항복하려나 봐요!”
강운예와 강지헌도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복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을 테니, 정선교 그놈도 어쩔 수 없었나 보군.”
그가 웃는 얼굴로 증손자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따가 네 아비와 가족들에게 편지 한 장 써서 보내려무나. 이제 전쟁은 모두 끝났고 너는 증조 할아버지와 함께 백화로 가게 되었다고. 이 편지를 보는 즉시 네 아비더러 가족들 모두 데리고 백화의 평연당으로 찾아오라고, 그렇게 써서 보내려무나.”
“네, 증조 할아버지!”
강지헌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록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런데 관장님! 원래 이번 전쟁에서 정선교 그 사람을 꼭 잡아 없애고 천제국도 없애 버리면 더 낫지 않았나요?”
그의 물음에 강운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놈이 다시는 간교한 머리를 굴리지 못하게 아예 없애 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게 꼭 좋은 방법은 아니란다.”
“왜 그런지 여쭤봐도 될까요?”
“정선교도 우리 같은 마루한이야. 천제국에서는 신으로 숭배되는 중이란 말이지. 만약 그를 없앤다면 율도는 그를 숭배하던 천제국 사람들과 기나긴 전쟁을 치러야 할 거다. 지금 당장 대월국을 안정시키고 주나라와의 대치 국면을 해소시키는 것도 급한 마당에, 또 하나의 전선을 만들게 되면 우리의 국력 소모가 너무 클 거란 말이다.”
“아...”
“전에도 말했지만 정치란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고 전쟁이란 결국 정치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이니 전쟁 또한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만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국가와 국민의 이익에 반하게 된다면 지금 당장의 이익이 있더라도 전쟁을 해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전쟁이란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면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오로지 소모적이고 파괴적이기만 한 일이기 때문이다.”
저 멀리 금양장으로부터 천제의 사절단을 호송하는 율도군 무사들의 행렬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이란 이겨도 득보다 실이 더 많은 법이지. 지금까지 대월국에서 전쟁을 벌이며 들어간 돈이 율도 1년 예산의 1할에 가깝다는 보고서를 받은 적이 있는데, 우리가 유리한 조건을 선점한 상황에서 이를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을 만큼의 비용을 받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정선교 따위 하찮은 목숨 정도는 살려주어도 괜찮다. 어차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거두어 갈 수 있는 목숨이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