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대동력 9,994년 6월 6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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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서쪽 율도군 전투지휘소
율도군은 밤새 쉬지 않고 야포를 쏘아댔다.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천제국군의 군막 등 시설들은 폭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멀리 날아가 버리고,
주인 잃은 말들은 폭발 소리에 놀라 미친 듯이 날뛰었다.
반면 천제국군의 반격은 미미하기만 했다. 진지에 틀어박혀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포탄을 피하는 데에만 급급할 뿐 별다른 공세를 취할 엄두도 못 내는 중이었다.
반격하고 싶어도 대응 포격을 할 만한 전력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화력 자원을 천제벽력포에 투자했던 것을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상황,
게다가 가장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던 두억시니 부대들마저 천제벽력포탄의 화염에 녹아 없어져 버린 데다가 순수 전투 병력도 불과 3, 4만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니,
이제 천제국군의 목표는 흥원 탈환이 아니라 생존, 그리고 탈출로 바뀌고 있었다.
율도군은 금양장과 가까운 마을의 가옥 하나를 빌려 전투지휘소 겸 대원수의 거처로 사용하고 있었다.
마침 강운예가 전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가옥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그는 새 전포와 갑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어제 입은 것들은 계속 입기 힘들 정도로 적의 피로 더러워졌던 것이다.
“군사들은 모두 아침 식사를 마쳤는가?”
대원수의 물음에 그를 따라 나온 전속부관이 대답했다.
“제대 별로 돌아가며 식사를 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적에 대한 압박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식사를 하지 않는 제대를 적 진영 앞에 계속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지금도 천제국군 진영 주변에는 검은 갑주의 율도군 기병 수천여 명이 어지러이 말을 달리며 적진을 위협하는 중이었다.
율도군의 경우 각자 휴대하고 있는 전투식량으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천제국군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근무지원 부대에서 취사병들이 만든 주먹밥 등을 군사들이 있는 진지로 추진시켜 밥을 먹여야만 했는데, 율도군의 포격에 솥, 아궁이 등 근무지원 부대의 취사 시설이 일부 부서지면서 아직도 다른 때보사 식사 배급이 늦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주먹밥을 가져다주는 일도 보통 위험한 게 아닌 것이, 시도 때도 없이 머리 위로 포탄들이 날아오고 있고 진지 위로 아주 잠깐 만이라도 머리를 들어 올리기만 하면 어김없이 율도군의 총탄과 화살이 날아와 박히기 일쑤였으니, 밥 가져다주는 이들도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당번병이 가옥 밖에 마련된 식탁으로 대원수의 식사를 가지고 왔다.
군사들이 먹는 것과 똑같은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 비빕밥이었는데, 그래도 대원수의 식사라서 그런지 몇 가지 곁들임 반찬들과 함께 미리 준비해온 그릇에 정갈하게 담아 가지고 왔다.
그때 대원수가 있는 곳으로 적영단 무사들이 누군가를 데리고 왔다.
목라촌에서 만난 그의 증손자, 강지헌이었다.
“어서 오거라. 아침 아직 안 먹었지? 나와 같이 먹자꾸나.”
강운예는 당번병에게 그가 먹을 식사를 더 가지고 오라 명한 뒤,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강지헌은 군례를 올린 뒤 조심스럽게 증조부를 마주 보고 앉았다.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 자대로 복귀하고 싶습니다.”
“자대? 115 기병 여단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네 자대라면 이미 이곳 서래번으로 이동 중일 게다. 전투 후 잔적 소탕을 맡길 계획이거든. 그렇지만.”
강운예가 증손자를 바라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거와 상관없이 넌 계속 내 곁에 남아있거라.”
“하, 하지만 전 제 전우들과 함께...”
“네 증조부 곁에서 싸우고, 네 증조부를 지키는 일을 맡아라. 이건 군 통수권자로서 내리는 인사 명령이니 군말 없이 따르도록. 알겠지?”
강운예는 당번병이 가지고 온 비빔밥 그릇을 증손자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했던 게 네가 어렸을 적 네 부모와 평연당으로 새해 인사 왔을 때였지? 그때 떡국 먹었을 때 내가 네 그릇에 소고기랑 만두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퍼주었던 거 기억하니?”
“네, 그때 떡국에 있던 만두가 다른 곳에서 먹던 것보다 참 맛있던 게 아직도 기억납니다...”
강지헌의 눈가가 붉어졌다.
“전쟁 끝나고 돌아가면 네 아비 데리고 평연당으로 같이 오려무나. 네 아비도 내 손자이자 내 핏줄이다. 그때처럼 너와 네 아비 모두 다 함께 모여 같이 식사 하자꾸나.”
“네, 기하... 아니, 증조 할아버지...”
강지헌은 기어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전 9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서쪽 율도군 전투지휘소
전투지휘소에서는 수십여 명의 참모 무관들과 행정병들이 커다란 지도 위에 놓인 율도군과 천제국군 부대를 의미하는 여러 개의 나무 조각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전투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강운예는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지도 위에 천제벽력포가 있는 언덕을 가리키며 물었다.
“새벽에 출발한 우리 포병들은 모두 도착했다고 하는가?”
옆에서 보고서들을 잔뜩 들고 서 있던 작전 참모가 대답했다.
“모두 예정된 시간에 도착해 그곳에 있던 4군단 무사들로부터 적의 신무기를 인계받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우리 포병들이 다룰만 하다던가?”
“포에 사용되는 포탄이 너무 크고 무거운 거 빼고는 조작하는 데 아무 문제 없다고 합니다.”
“잘 되었군. 그럼 바로 작전대로 바로 준비하라 전하게.”
“네, 기하.”
강운예가 돌아보니 전투지휘소 한켠에 대기하고 있던 곰털모자를 손에 쥔 친위 기마 엽병 여단 소속 무관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여단장을 대신해 대원수에게 상황 보고를 하러 온 참모 무관이었다.
대원수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무관은 긴장한 표정으로 곰털 모자를 손에 꽉 쥐고 정자세로 서서 군례를 올렸다.
“귀관의 부대가 큰 공을 세웠다. 적의 물자를 운반하는 수송대를 전멸시킨 것도 잘한 일인데 4군단 무사들이 이를 이용해 적진에 침투할 수 있도록 계책까지 마련해주었으니, 돌아가 귀관의 부대 여단장에게 내가 이번 전쟁이 끝나면 친위 기마 엽병 여단 전원에게 큰 포상을 내리겠다 약속했노라고 전해주게나.”
“감사합니다, 기하!”
강운예는 무관과 악수를 나눈 뒤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주었다.
그가 무관들과 전투 진행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관장님!”
영록이 성시우 대위와 함께 전투지휘소로 들어왔다.
그도 새 전포와 갑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용마로 소장과 함께 며칠간 작전을 수행하느라 옷도 못 갈아입고 있었던 데다가 전투를 치르며 많이 지저분해진 탓이었다.
“영록이 왔구나, 잠은 잘 잤느냐?”
“네, 오랜만에 밖이 아니라 안에서 잘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런데 관장님, 오늘 이제 천제국군에 총공격을 하실 건가요?”
영록이 탁자 위의 지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총공격? 왜, 전투가 보고 싶어서 그런게냐?”
“네, 저도 관장님과 같이 전투에 나가보고 싶습니다.”
강운예는 웃으며 영록의 어깨를 토닥였다.
“우리가 곧 천제국 녀석들을 칠 거긴 하지만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일 수 있을는지 모르겠구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잠시 후면 알게 될 게다. 그럼 난 참모들과 의논할게 있으니 이따가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오전 11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동쪽 천제국군 진영
이제 율도군의 포탄은 천제의 수레가 있는 곳 가까이까지 날아와 터지고 있었다.
정선교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수레 위 가옥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천제국군 진영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그동안 값비싼 비단옷만을 입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도 유성금으로 만든 두터운 갑주로 온몸을 꽁꽁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강운예 이 놈... 강운예 이 놈...!”
정선교는 저 멀리 금양장 너머로 보이는 율도군 진영를 노려보며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그가 비 맞은 중처럼 저 혼자 욕설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대사마 주진경이 굳은 표정으로 허겁지겁 천제의 수레로 달려왔다.
“성하...! 아무래도 율도군에게 사절을 보내 이 전쟁을 여기서 그만 중단하자는 협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천제가 격노한 목소리로 악을 쓰듯 소리쳤다.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 아직 승부가 난 것도 아닌데 왜 우리가 먼저 저놈들한테 사절을 보내? 네 놈이 겁을 집어먹고 머리가 돈 게 아니냐?”
“하오나 성하...! 저기, 뒤를 돌아보소서...!”
정선교는 찢어진 작은 눈을 한껏 찌푸리고 대사마가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율도군들에게 점령당한 천제벽력포가 있는 언덕이었다.
천제벽력포가 있는 언덕을 지키던 두억시니 부대들이 모두 전멸당한 후, 이제 그곳은 율도군 기병들이 진을 치고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율도군에게 넘어간 천제벽력포의 포신이 스르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천제벽력포의 포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언덕 아래 바로 앞에 있는 천제국군의 진영을 향해 포를 발사하려는 것처럼.
“아, 아니, 저것들이 설마...!”
정선교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성하, 만일 저들이 우리 진영으로 천제벽력포를 발사하기라도 한다면, 성하와 성하의 군대는 모두 끝입니다! 서둘러 율도군 진영으로 사절을 보내야 합니다!”
만일 모든 천제벽력포가 천제국군 진영으로 발사된다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게 뻔했다.
마치, 지난날 환강산성에 있던 대월국 국왕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놈들이 쏘기 전에 언덕을 재탈환하면 되잖아! 아직 병력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싸워보기도 전에 무슨 협상을 하겠다는 것이냐?”
“천제벽력포는 하나가 아니라 스무 문이나 됩니다! 일시에 모든 언덕을 점령하지 못해 단 한 문이라도 발사된다 해도 우리 군이 입을 피해는 이루 말할 수도 없을 만큼 클 것입니다! 게다가 포격으로 우리 군이 혼란에 빠졌을 때 율도군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해 들어온다면... 성하! 부디 우리 군사들의 목숨을 구하고 옥체를 보존하셔야 합니다!”
주진경의 말에 천제는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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