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 대동력 9,994년 6월 5일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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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북쪽 목라촌
강운예가 이끄는 적영단 무사들은 천제의 친위대를 사정없이 베어 넘기고 있었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두 동강 난 두억시니의 몸뚱이들은 말발굽에 마구 짓밟혔고,
아직 살아있는 이들이 어깨를 맞대고 두텁게 방진을 구축해 어떻게든 율도군의 돌격을 막아보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 버티기는 힘들어 보였다.
강운예는 여전히 선두에 서 있었다.
그는 두 자루의 검을 휘둘러 친위대 전사들을 마구 베고 찌르며 천제에게로 향하는 길을 열고자 했다.
“놈이 도망간다! 모두 서둘러라!”
강운예의 우렁찬 목소리에 적영단 무사들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친위대를 도륙했다.
죽기 살기로 덤비는 친위대들의 반격에 십여 명이 전사하기는 했지만, 강운예가 고르고 고른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가진 젊은 무관들답게 적영단 무사들은 미늘창을 휘두르며 발악하는 두억시니 친위대를 가뿐히 압도했다.
본진을 향해 도망치던 정선교가 불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강운예와 적영단 무사들의 창칼이 번쩍일 때마다 그들을 막고 있는 친위대의 방진이 점점 얇아지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정선교는 급히 영매를 다루는 전령을 호출했다.
“포병 지휘관에게 영매를 보내라! 당장 강운예가 있는 이곳으로 천제벽력포를 쏘라고!”
전령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오나 그리되면 우리 군사들이...! 그리고 마루한은 물론 천제 성하께서도 위험해지실 수 있습니다!”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너 따위가 감히 천제의 말에 토를 다는 게냐?!”
전령은 하는 수 없이 천제가 시키는 대로 명령을 받아 적을 수밖에 없었다.
영매가 천제벽력포가 있는 동쪽을 향해 날아가고,
군사들은 천제가 탄 가마를 들고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가는 천제벽력포탄의 어마어마한 폭발 범위에 휘말릴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매가 날아가고 얼마 후,
마침내 천제의 뒤를 막아주던 친위대의 마지막 두억시니 전사 한명까지 모두 적영단에 의해 깨끗이 전멸당했다.
“놈을 쫓아라!”
강운예와 붉은 방풍의를 두른 적영단 무사들은 숨도 고르지 않고 곧장 천제가 있는 곳을 향해 말을 달려갔다.
거리는 불과 몇 리 정도.
정선교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포병 놈들, 대체 뭐하고 있는 게야?! 포진지에서 뭐하고 자빠져 있길레 왜 아직도 포를 안 쏘고 있어?!”
그는 가마 위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자신을 쫓아오는 강운예의 율도군들과 천제국 본진 뒤로 아스라이 보이는 천제벽력포 포진지를 번갈아 쳐다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꽈앙...!
꽝...! 꽝...!
꽝...! 꽈광...! 꽝! 꽝!
천제벽력포가 있는 스무 곳의 언덕,
바로 그 아래에서 엄청난 폭음이 연달아 터지면서 거대한 검은 연기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포를 발사한 것이 아니라, 분명 그 아래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천제벽력포를 지키던 두억시니 전사들이 있는 곳이었다.
우르르르르릉...!
마치 작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폭발의 진동이 정선교가 있는 곳까지 전해졌다.
“아니, 저건 또 무슨 일인 게냐...?”
정선교는 찢어진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마에서 벌떡 일어났다.
폭음과 폭발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한 언덕 당 세 번에서 네 번씩,
7, 80여 회가 넘는 엄청난 폭발에 천제국군의 본진마저 검은 연기에 휩싸일 정도였다.
오후 4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동쪽 언덕 일대
7, 80여 개의 천제벽력포탄이 연달아 터지는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언덕 아래에서 포를 지키고 있던 두억시니들은 물론, 비교적 포가 있던 언덕과 가까이 자리 잡고 있던 예비대 병력 일부까지 폭발에 휘말리며 눈 깜짝할 사이 완전히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한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폭발의 화염과 날아오는 파편 덩어리들에 맞아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엄청난 폭발음에 고막이 찢어진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기어 다니기도 했다.
폭발의 검은 연기가 모두 개이고 살아남은 자들이 살려달라 소리를 지르며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있을 때,
저 멀리 동쪽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박살내라!”
“모두 박살내라!”
103 대원수 친위 철기병 여단을 선두로,
후방으로 돌아갔던 강운예의 친위 기병 여단들이 그들을 향해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폭발에서 살아남은 천제국군들은 이미 전의를 잃은 듯,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검은 갑주의 기병들을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로써 천제국군은 율도군에게 동서남북으로 완벽하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오후 6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북쪽 목라촌
비화포의 포격과 붉은 방풍의의 적영단 무사들이 한바탕 휩쓸고 간 목라촌 일대에 4사단 예하 1개 연대 규모의 보병들이 도착해 전장 정리를 실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천제국군들을 포로로 잡는 한편, 그들의 무기, 갑주 등도 빠짐없이 챙겼다.
목라촌의 철기병들도 아군들이 이 일대를 장악한 것을 보고 모두 안심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마을로 난 길을 막고 있던 거마창 등 장애물을 모두 치우고 대원수 강운예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길이 열리자 강운예와 적영단 무사들이 천천히 말을 몰아 목라촌 마을로 들어왔다.
그들 모두 갑주는 물론 말까지 적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강운예는 친위대를 모두 전멸시킨 뒤 곧장 정선교를 향해 쫓아갔다.
천제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찰나,
대사마 주진경이 보낸 1개 대대 규모의 기병들이 때맞춰 천제를 보호하기 위해 도착했다.
천제는 기병들이 강운예와 적영단 무사들을 막아주는 사이 본진으로 달아나버렸다.
강운예와 적영단이 천제국 기병들마저 모조리 전멸시키고 다시 천제를 추격하려 했을 때는 이미 천제가 자신의 본진 가까이 도달한 상태,
“정선교 그놈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강운예는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부상자들은 후송시키는 한편, 영록을 만나기 위해 목라촌으로 향했다.
영록도 그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 마을 입구까지 나와 있었다.
“관장님!”
말에서 내린 강운예가 영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생이 많았겠구나. 잘 버텨 주어 고맙다.”
“아닙니다. 관장님께서 벌써 세 번 씩이나 제 목숨을 구해주신걸요? 감사는 제가 관장님께 해야죠.”
“세 번? 두 번이 아니라?”
“네, 그때 우성시 야산에서 조폭들한테 죽을 뻔했을 때에도 관장님이 절 살려주셨잖아요?”
“아, 그랬었지! 그때는 총이랑 화약 얻은 것 때문에 너무 기뻐서 널 구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구나. 하하하.”
강운예는 영록과 함께 걸으며 용마로 소장 등 그와 함께 싸운 철기병 무사들을 격려했다.
그러던 중,
투구를 깊이 눌러쓰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강운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 무사를 보게 되었다.
강지헌이었다.
“갑주와 전포를 보니 115 기병 여단 소속인 모양이군?”
대원수의 물음에 강지헌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기하...”
이때 옆에 있던 영록이 강운예에게 말했다.
“흥원공녀를 호위했던 무사로, 정말 뛰어난 궁술을 가진 분입니다. 이름과 계급은... 강지헌 중사라고 합니다.”
영록이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살폈다.
강지헌의 이름을 듣자, 강운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가 강지헌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를 벗겼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던 강운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릴 적 얼굴이 그대로 있구나...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강운예는 자신의 증손자의 이름과 얼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강지헌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그동안 어찌 지내는지 궁금했는데, 참으로 훌륭하게 자라 주었구나... 힘든 전투였을 텐데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영록이와 함께 잘 싸워줬어. 네가 내 증손자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대원수 기하...”
강지헌도 울컥하며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증조 할아버지라고 부르거라. 물론 그렇게 불리기엔 내가 너무 동안이긴 하지만.”
“네, 알겠습니다...”
강운예는 오랜만에 밝게 웃으며 증손자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강운예는 곧장 영록과 모든 병력을 이끌고 금양장 가까이로 이동한 그의 지휘소로 향했다.
율도군 1군단, 2군단, 3군단과 친위 기병 여단이 천제국군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이제 그들을 궤멸시킬 마지막 전투를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용마로 소장과 철기병들은 물론 강지헌 역시 대원수를 따라 함께 이동하고 있었고,
흥원공녀 진미령 역시 비화포를 싣고 가는 수레에 웅크리고 앉아 함께 따라가는 중이었다.
두억시니들에게 욕을 당하면서 하체가 심하게 상해 말을 탈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운예와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가던 영록은 그녀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런데 관장님?”
“왜 그러느냐?”
“진미령 공녀를... 죽이려고 하셨던 게 사실인가요?”
강운예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구에게 들었느냐?”
“공녀를 구할 때 모든 무사들이 반대하는 얼굴이어서요...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강운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만일 필요하다면 죽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다.”
“흥원을 차지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요?”
“이를테면 그렇지.”
“그럼... 대월국을 차지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7왕자도 죽일 수 있으신가요?”
그의 물음에 강운예는 한동안 영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쟁이란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 라는 말을 누가 했는지 알고 있니?”
“옛날 독일 사람 누군가가 쓴 글에 나와 있다고만 알고 있어요.”
“클라우제비츠란 프로이센 군인이 전쟁론이란 책에 쓴 말이지. 그 책 읽어 본 적 있니?”
“서점에서 본 적은 있는데 너무 두껍고 어려운 말로 되어 있어서... 다 읽어보지는 못했어요.”
“그 사람이 한 말대로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은 전쟁은 살육과 파괴만을 목적으로 한 야만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이고. 정치의 목적은 국가와 국민의 이익이다. 전쟁도 정치와 같은 것이라면 당연히 그 목적은 국가와 국민의 이익이 되어야겠지.”
강운예는 저 멀리 금양장 일대 평야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수만 명에 달하는 검은 갑주의 율도군 기병들이 천제국군 진영을 에워싸고 어지러이 말을 달리고 있었고,
그 뒤로 배치된 야포들이 포격을 날리는 굉음도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 전쟁의 최종 목적은 흥원을 차지하는 것이 맞다. 만일 우리가 흥원을 천제국에게 빼앗기게 된다면 앞으로 우리 율도에게 크나큰 위협이 될 테니까. 그런데 이 문제를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을 보기엔 서로를 향한 양국의 원한이 너무나 깊고 오래되었다는 문제가 있어.”
율도군의 포격에 천제국군 진영에서 폭발의 연기가 여기저기 피어올랐다.
천제국군도 율도군을 향해 포를 쏘고 있긴 했지만, 모든 화약과 포탄 자원을 천제벽력포에 쏟아부었던 터라 반격할 만한 여력은 부족해 보였다. 이따금씩 날리는 포탄들도 어지러이 달리는 기병들 사이로 떨어질 뿐,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정치나 전쟁이나 명분이 중요하다. 그런면에서 흥원공녀는 우리 군이 흥원으로 들어올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지. 하지만 그녀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그럼 7왕자의 역할도...”
“7왕자의 역할은 이제 앞으로 대월국을 잘 다스리면서 우리 율도와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다. 이 역할을 못 하겠다고 하면 나로서는 당연히...”
강운예는 고개를 흔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왜, 너무 몰인정하다고 생각하느냐?”
“네, 조금...”
“결국 정치란 그런 것이다. 내게 중요한 건 내 나라 율도와 내 나라 국민들 뿐이야. 대월국이란 어차피 남의 나라이고 흥원공녀나 7왕자 모두 남의 나라 사람들이다. 그들이 율도의 국민이 된다면 모를까, 그러기 전에는 내가 지켜줄 의무는 없는 존재들이란 말이다.”
“...”
“내가 대의를 따르는 것 같지 않아 실망했느냐?”
“조금... 그러려는 중이에요.”
“하하하, 말했다시피 내게 대의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 뿐이다. 조금 더 나아가 대동 모든 나라들이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도 있긴 하지. 이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지금과 같은 정치와 전쟁도 계속할 수 있다. 국가와 국민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말이지.”
강운예는 영록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네게 대의란 무엇이냐?”
“네...? 저는...”
“지금 네 가장 큰 대의는 네 여자친구를 구하는 것이 아니냐?”
“...네.”
“너는 그거에만 집중해라. 그럴 수 있도록 널 단련시키기 위해 이곳에 보낸 것이니. 아까 들으니 마을에서의 전투 때 2군단 부군단장을 구하기 위해 두억시니를 철편으로 때려죽였다면서? 혼자서 두억시니를 때려잡을 실력이라면, 돌아가서 웬만한 놈들은 다 때려잡을 수 있겠구나. 이제 너는 앞으로 네 여자친구를 어떻게 구할지 계획만 세우면 되겠다.”
영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돌아가서 유민이를 어떻게 찾을지부터가 걱정이에요. 그 조폭 녀석들이 유민이를 어디로 끌고 갔는지 알아야 뭔가 계획이라도 세울 수 있을 텐데 말이죠.”
“그건 걱정 말아라. 네 여자친구를 찾을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 수 있으니.”
“네? 그럼 관장님도 저와 함께 돌아가시려는 거예요?”
놀란 표정으로 묻는 영록의 물음에, 강운예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앞으로 내가 대동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당분간 그러지는 못할 것 같구나. 하지만 네 여자친구를 찾는 일을 도와줄 사람을 소개해 줄 수 있어. 내가 보냈다고 하면 분명 널 도와줄 거야.”
“정말이요? 그분은 어떤 분이죠?”
“날 군으로 이끌어 준 사람. 오랜 세월 동안 서로에게 도움을 많이 주고받은 사이라서, 내 부탁이라면 분명 널 도와줄 것이다. 그러니 네 여자친구 찾는 건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영록은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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