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대동력 9,994년 6월 5일 (6)
* * *
오후 3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북쪽 목라촌
두억시니들은 모두 물러났지만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천제국군의 포위망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 사이 율도군들은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부서진 진지를 복구하며 천제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집 안에 있던 진미령도 이제 밖으로 나와 부상자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을 돕고 있었다.
영록은 부상 입은 용마로 소장의 어깨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다.
“참으로 놀랐습니다. 전에도 마루한께서 두억시니를 잡으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은... 대원수 기하의 가르침을 따라 부단히 수련한 결과인 듯 합니다.”
“운이 좋았어요. 놈이 망치를 놓치는 걸 보니까 자신이 생기더라구요.”
“마루한께서 죽인 놈이 두억시니들의 대장이었던 모양입니다. 힘과 용력이 엄청난 놈이었는데, 마루한께서 그놈을 쓰러뜨린 덕이 우리 모두 한숨 돌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아 있는 율도군들의 수는 이제 겨우 30여 명뿐,
그중 멀쩡한 이들은 고작 10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탄환과 화살 모두 바닥나고 가지고 있는 창과 칼 등 무기도 많이 상한 상태,
이제 천제국군이 또다시 대규모로 밀고 들어온다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두억시니 대장의 목을 벨 생각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원래 삼국지 같은 거 보면... 아, 아니, 전쟁 소설 같은 거 보면 상대편 대장 목을 베니까 그 부하들이 모두 도망가더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저도 해본 건데 정말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부러진 칼로 목을 치는 일이 절대 쉽지는 않으셨을 텐데. 혹, 목을 베면서 떨리지는 않으셨습니까?”
영록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많이 무섭고 겁도 많이 났죠. 하지만 부군단장님이 말씀하셨었잖아요? 세상을 살아가고, 세상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더 냉철해지고 차가워질 필요가 있다고. 또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말아야 할 때도 있다고.”
“마루한...”
“지금 같은 상황을 위해 하신 말씀은 아니시겠지만, 확실히 지금만큼은 제가 좀 더 냉철해지고 차가워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저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싸우고 계신 거잖아요? 그래서 여기 계신 분들을 위해 제가 좀 더 어른스럽게 행동해야겠다고 생각되더라구요.”
용마로 소장이 영록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따스히 감싸주며 말했다.
“이제 어른이 다 되신 것 같습니다, 마루한.”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직 멀었어요, 전.”
영록은 씨익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천제국 기병 하나가 길을 따라 마을로 다가오고 있었다.
전에 천제의 말을 전하러 왔던 바로 그 기병이었다.
“마루한께 천제 성하의 말씀을 전하러 왔다!”
기병의 외침에 영록이 진지 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곳에 있는 율도군들이 거의 전멸했다는 사실 다 알고 있다! 전투의 승패는 이미 정해진 터, 그럼에도 자비로운 천제 성하께서 마지막 호의를 베풀고자 하신다! 마루한께서 한 시간 내로 천제국에 투항하신다면, 그곳에 남아 있는 율도군들은 모두 살려주실 것이다! 마루한께서는 자신의 부하들을 살리는 대승적인 결정을 하시길 권고드린다!”
불쾌한 표정으로 기병의 말을 듣고 있던 영록이 곁에 있던 강지헌을 바라보았다.
“거절 의사를 확실히 하고 싶은데, 혹시 남은 화살 있나요?”
강지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통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애깃살을 꺼내 통아에 집어넣었다.
“마루한께서는 한 시간 내로 천제국에... 커헉...!”
말이 다 끝나기 전,
작은 애깃살이 날아와 기병의 목을 꿰뚫어 버렸다.
놀란 말이 급히 머리를 돌려 천제국 진영 쪽으로 달리기 시작하고,
말 안장에서 떨어지다가 등자에 한쪽 발이 걸려버린 기병의 시체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질 끌려갔다.
“이 정도면 천제도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강지헌이 이제 화살이 남아 있지 않게 된 전통에 활을 집어넣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영록도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럼 관장님이 지원군을 보내주실 때까지 조금만 더 힘을 내 봐요, 우리.”
“목숨 바쳐 마루한을 보위하겠습니다.”
강지헌은 결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오후 4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북쪽 목라촌
천제는 곧장 두두리 등으로 이루어진 경보병 부대부터 먼저 보냈다.
그들로 하여금 율도군의 힘을 빼고 마지막에 다시 한번 두억시니들을 투입 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제 탄환도 화살도 하나도 남지 않은 율도군들은 창과 칼 등을 움켜잡고 진지 뒤에 숨어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부상을 당한 이들도 갑주 안에 붕대를 칭칭 동여 감은 채 고통을 참으며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시시각각, 천여 명에 달하는 천제국군들이 마을을 향해 계속 다가왔다.
그들이 20보 가까이 다가오고,
“모두, 박살내라!”
용마로 소장을 시작으로, 율도 철기병들이 무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모두 박살내라!”
무사들 모두 죽기를 각오한 표정들이었다.
영록도 성시우 대위 등 군경 여단 무사들과 함께 최전선 진지로 나와 있었다.
그도 양손에 철편을 들고 서서 천제국 두두리 군사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이 10보 앞까지 다가왔을 때,
갑자기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마치 찢어지는 비명 같은 바람 소리들이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휘이이익~! 휘이이익~! 휘이이익~! 휘이이익~!
소리는 서쪽에서부터 들려왔고,
마을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록이 놀라 소리가 나는 곳을 올려다 보았다.
거대한 화살처럼 생긴 수십여 개의 물체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천제국군이 모여있는 방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곁에 있던 용마로 소장이 벅차오르는 목소리로 외쳤다.
“마루한...! 드디어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그는 영록의 어깨를 잡고 서쪽의 어느 언덕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을 보니 마치 신기전을 닮은 거대한 화차, 율도의 비화포들이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드디어...!”
영록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쾅! 콰과광! 쾅! 쾅!
지축이 흔들리는 폭음과 함께,
천제국군이 모여 있는 곳에 무시무시한 폭발이 연이어 일어나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현실 세계의 다연장로켓처럼, 비화포의 대화전들이 적들의 머리 위에 불비가 되어 무수히 떨어지고 있었다.
비화포의 화력이 휩쓸고 지나가자 목라촌의 서쪽과 남쪽을 포위하고 있던 천제국의 군세는 눈 녹듯 녹아 엎어졌다.
포격에 살아남은 이들도 혼비백산해 무기를 버리고 뒤로 내빼고 있었다.
천제국군들의 시쳇더미 위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하늘 위로 사라질 때쯤,
서쪽에서 포연보다 더 어두운 검은 갑주를 입은 기병들이 매서운 기세로 말을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율도군의 철기병들이었다.
“모두 박살내라!”
“모두 박살내라!”
철기병들은 모두 붉은색 방풍의를 두르고 있었다.
영록은 그들이 누구인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들은 관장님의 적영단 무사들...?”
붉은 방풍의를 입은 수백 명의 적영단 무사들이 비화포 포격을 받고 혼란에 빠져있는 천제국군들에게 달려들어 마구 베고 찌르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 만에 목라촌의 서쪽과 남쪽을 포위하기 위해 모여 있던 2개 연대 규모의 천제국군 태반이 시체가 되거나 도망쳐 전장을 이탈해 버렸다.
적영단 무사들은 도망치는 적을 쫓지 않고 곧장 목라촌의 동쪽에 있는 천제국군들을 향해 비호처럼 내달렸다.
그들이 달려가는 곳은 바로 천제 정선교가 있는 곳이었다.
“이 머저리 같은 것들! 율도놈들은 겨우 몇백 명 밖에 없지 않느냐?! 뭐가 무서워 이 난리법석이야?! 도망치는 놈들은 모두 즉결 처형에 처할 것이다! 모두 진을 갖춰라!”
천제가 가마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휘관들이 군사들을 진정시키고 진형을 갖춰 접근해오는 율도군 철기병들을 맞이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는 사이, 친위대장이 천제의 가마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율도군의 포탄이 근방에 떨어졌습니다. 여기 계시면 위험할 것으로 사려되오니 우선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소서.”
정선교는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율도군의 검은 그림자를 보고 침을 꿀꺽 삼키고는,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친위대는 천제를 태운 가마를 호위해 본대가 있는 금양장 방향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율도군 철기병들이 목라촌 주변의 논을 크게 돌아오는 모습이 아스라이 눈에 보일 때 쯤,
쿵...! 쿠궁...! 쿵...! 쿵...! 콰앙...!
갑자기 남쪽에서 포격 소리가 들려왔다.
정선교가 깜짝 놀라 아까 율도군의 비화포가 날아온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비화포가 있는 언덕 위에서는 아까처럼 대화전들이 날아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포격 소리는 그곳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럼 어디서 난 소리란 말인가...?”
정선교는 물론 주변에 있는 천제국군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금양장 동쪽에 있는 본진에서 전령 하나가 헐레벌떡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본진에 있던 대사마 주진경이 보낸 전령이었다.
“대사마로부터의 보고입니다! 지금 남쪽과 북쪽에서 대규모의 율도군 기병들이 금양장에 있는 본대를 포위하고 포격을 날리고 있습니다!”
정선교가 놀라 가마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뭬야? 그럼 지금 포격 소리가 바로...?”
“네, 율도군의 포격 소리입니다. 놈들이 우리 군이 분산된 틈을 타서 아군이 있는 곳 5리 (약 2km) 까지 접근해 야포를 설치한 모양입니다.”
“놈들의 규모는? 율도군이 얼마나 몰려왔길래 10만에 달하는 우리 군을 포위했단 말이냐?”
“정찰을 나간 부대들의 보고를 종합하면, 최소 2개 군단 이상 규모의 기병들이라 합니다!”
“뭣이? 2개 군단 이상?!”
정선교는 그 기병들이 자신이 금양장에 도착하기 전 남쪽과 북쪽으로 흩어져 어디론가 숨어있다가 소규모 기습을 지속해왔던 율도군 기병들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천제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럼 본대는? 우리군은 뭐하고 있단 말이냐? 대사마 그놈은 뭐 하고 있어?”
“대사마는 본대에 있던 기병들을 내보내 적과 교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보병들은 진지를 사수하며 적 기병 돌격에 대비하는 중입니다.”
정선교는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럼 서둘러 본진으로 돌아가자! 내가 돌아가는 동안 본대의 방어를 철저히...”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
휘이이익~! 휘이이익~! 휘이이익~! 휘이이익~!
또다시 서쪽 언덕 위에 있던 비화포의 대화전들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장전을 마치고 2차 포격을 시작한 것이다.
쾅! 콰광! 쾅!
대화전 수십 발이 율도군을 막기 위해 진을 치고 있던 천제국군 진영으로 정확히 떨어졌다.
불꽃과 함께 방어진을 이루고 있던 천제국군들의 시체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대화전이 떨어진 곳에서 피어오르는 폭발의 검은 연기 사이로 붉은 방풍의를 두른 검은 갑주의 적영단 철기병들이 삼각형의 쐐기 모양 진형을 이루고 무서운 기세로 돌격해 들어왔다.
“멈추지 않고 적진을 돌파한다! 목표는 오직 정선교 한 놈뿐!”
철기병들의 선두에 선 장검을 든 무사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무사들은 그의 명대로 자신의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자를 단칼에 베어 버리며 말을 달렸다.
비화포 포격으로 흐트러진 천제국군 진형은 단 한 번의 철기병 돌격으로 그대로 와해 되고 말았고,
적영단 철기병들은 거칠 것 없이 적의 종심을 가로질러 나오고 있었다.
“저, 저놈은...?!”
다가오는 율도군 철기병들을 본 정선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선두에 선 자는 바로,
그의 오랜 숙적,
율도의 태상국이자 대원수,
강운예였던 것이다.
정선교가 미친 듯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친위대장은 병력을 이끌고 나가서 저놈을 막아라! 나머지는 어서 빨리 나와 함께 본진으로 돌아간다! 빨리! 서둘러!”
천제를 태운 가마가 부리나케 남쪽으로 달아나는 사이,
친위대장을 비롯한 천여 명의 두억시니 친위대가 달려오는 철기병들을 막기 위해 방진을 짜고 기다렸다.
친위대 전사들은 모두 자신의 덩치보다 더 큰 엄청난 크기의 미늘창을 들고 있었다.
친위대장이 미늘창을 어깨 위로 치켜올리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누구도! 우리를 지나갈 수 없다!”
천제국 보병들을 짓밟은 적영단 철기병들은 어느새 친위대의 바로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선두에 서서 달려오던 강운예는 친위대장의 외침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확인해볼까?”
강운예가 타고 있는 검은색 군마가 친위대장을 향해 무섭게 달려들었다.
“으라아아아앗~!”
친위대장이 강운예를 향해 거대한 미늘창을 내리치는 순간,
챙!
강운예는 장검을 한 손으로 든 채 두억시니가 휘두른 50근 (약 30kg) 가량 되는 미늘창을 가볍게 받아냈다.
그의 손목이 오른쪽으로 반원을 그리자 그 거대한 미늘창이 거짓말처럼 휙 넘어갔다.
“아, 아니...!”
친위대장이 놀라 무어라 말하기도 전,
강운예가 탄 검은 군마가 그의 곁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함께,
서늘하고 예리한 날붙이가 그의 목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눈 깜짝할 사이, 깨끗이 잘려나간 친위대장의 머리가 부하들이 모여있는 곳까지 날아가 떨어지고,
머리를 잃은 커다란 두억시니의 몸뚱이는 목에서 피를 뿜으며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크, 크아아악~!”
가장 앞에 서 있던 친위대 두억시니들이 놀라 괴성을 질렀다.
강운예의 군마가 두억시니들로 이루어진 방진과 부딪히려는 찰나,
그가 왼손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또 다른 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 양손에 두 자루의 검을 든 강운예는 곧장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가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휙! 쉬익! 슉! 칵!
강운예가 타고 있는 검은 군마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내달렸다.
그와 함께 양손에 든 검들도 보이지 않는 속도로 사방을 향해 빛을 발하고 있었고,
소름 끼치는 칼부림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두억시니들의 두꺼운 몸은 깨끗하게 반쪽으로 두 동강 나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강철로 만든 미늘창은 물론,
다른 천체국군들보다 더 크고 두꺼운 철판으로 만들어진 갑주마저도,
그가 휘두른 유성금 장검에 종이짝 찢어지듯 깨끗이 베어지고 있었다.
“모두 박살내라!”
“모두 박살내라!”
강운예의 뒤를 이어 붉은 방풍의를 입은 적영단 철기병들이 무너진 두억시니들의 방진으로 돌격했다.
율도 최고 정예 무사들이라는 적영단과,
천제국 최강의 두억시니 전사들만 뽑아 놓았다는 천제의 친위대가 대동 역사상 처음으로 맞붙는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