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대동력 9,994년 6월 5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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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북쪽 목라촌
영록이 마을로 돌아오자 용마로 소장이 가장 먼저 그에게 달려왔다.
“마루한! 대체 어쩌시려고 천제에게 총을 겨누신 겁니까?!”
영록은 허탈한 표정으로 투구를 벗으며 대답했다.
“저도 관장님이나 천제가 하는 것처럼 정치질이란 걸 해보려 한 건데... 역시 쉽게 안되네요. 제가 아직 많이 미숙한가 봐요.”
“마루한...”
“천제가 제게 투항하라고 해서 싫다고 했어요. 지원군은, 곧 도착하는 거죠?”
부군단장의 영매를 관리하는 전령을 돌아보니, 항상 그의 팔뚝 위에 앉아 있던 영특해 보이는 영매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대원수 기하께서 보고를 받으셨다면 곧 지원군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보시지요.”
“그때까지 우리, 버틸 수 있을까요?”
용마로 소장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응당, 버텨낼 것입니다. 마루한께서 천제국으로 가시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저도 그런 곳에 가고 싶지 않아요. 천제국군이 오면 저도 같이 싸우겠어요.”
영록은 여전히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의 약실을 열어 안에 든 탄환과 화약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결연한 표정으로 허리에 있는 권총집에 집어넣었다.
이내 천제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격 목적이 마루한의 생포인 만큼 총포나 화살 등에 의한 원거리 공격은 없었다.
그들은 마을을 둥글게 포위하고 방패를 든 보병들을 앞세워 포위망을 점점 좁혀나갔다.
하지만 목라촌은 드넓은 논으로 둘러싸인 마을,
물이 가득 고인 진흙투성이 땅바닥에 벼이삭까지 가득 자라 있어 군사들이 접근하기 여간 불편한 곳이 아니었다.
논의 진흙탕 속에 발이 푹푹 빠지고 미끄러져 넘어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그러면서도 칼로 다 자라지 않은 벼를 베어내고 방패로 이삭을 짓이기며 간신히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선두에 서서 마을로 다가가는 이들은 두두리 등 혼혈 종족으로 이루어진 경보병들이었다.
그들이 목라촌의 50보 거리까지 도달했을 때,
“사격 개시!”
용마로 소장의 명령이 떨어지고 진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철기병 무사들의 소총이 불을 내뿜었다.
탕! 타당! 탕! 타다당! 탕! 탕!
율도군이 사용하는 강선식 뇌홍소총의 원추형 탄환은 천제국군이 들고 있는 방패를 손쉽게 꿰뚫어 버리고, 갑주를 입고 있는 군사들 두세 명까지 한 방에 관통해 버렸다.
“돌격! 돌격하라!”
“놈들이 장전할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마을로 돌입하라!”
무수한 군사들이 논바닥에 나뒹구는 가운데, 천제국군 지휘관들이 칼을 휘두르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율도군의 총격에 그 자리에 돈좌 되어 있던 군사들은 지휘관의 다그침에 다시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뒤에 천제까지 와 있는 마당에 조금이라도 우물쭈물 거리거나 등을 돌려 도망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살아 돌아간다 하더라도 처형을 면하기 힘들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뿌연 화약 연기가 여전히 마을을 휘감고 있고,
총을 든 율도군들이 진지 아래로 몸을 숨기고 총구에 화약과 탄을 넣고는 꼬질대를 밀어 넣고 서둘러 재장전을 하는 사이,
강지헌 등 활을 든 무사들이 화살을 날리며 마을로 다가오는 천제국군들을 하나씩 하나씩 쓰러뜨렸다.
철기병들은 주로 총으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린 뒤 장창을 들고 적진을 돌파하는 임무를 주로 수행하는 병종, 궁술은 그들의 주특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본적인 궁술 실력은 50보 안으로 들어온 적의 얼굴을 맞추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벌써 수십 명이 논바닥에 죽어 넘어졌는데도, 천제는 군사들을 계속 앞으로 내보냈다.
두두리 등 혼혈 종족으로 이루어진 경보병들을 총알받이 삼아 내보내어 율도군의 탄환과 화살을 모조리 소모시킬 요량이었던 것이다.
반 시간도 되지 않아 푸르른 벼이삭들로 가득했던 넓은 논 위는 온통 붉은 핏물을 뒤집어쓰게 되었고,
목라촌 마을 주변에는 총과 화살에 맞아 죽어 넘어진 천제국군의 시신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그와 함께 율도군이 가지고 있던 탄환과 화약, 화살도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율도군이 평소 휴대하고 다니는 탄환과 화약은 30발 정도를 쏠 수 있는 분량 정도,
화살도 50 ~ 100여대 정도를 가지고 다닌다.
하지만 지금까지 소부대로 활동하며 기습 작전 등에 계속 참여하면서도 물자 보급을 받지 못했던 터라, 목라촌에 들어왔을 때 그들에게 남아 있던 양은 단 한 번의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분량 뿐이었다.
용마로 소장이 입술을 깨물며 외쳤다.
“모두, 백병전을 준비하라!”
부군단장의 명령에, 철기병 무사들은 장창과 군도를 빼어 들고 적이 오길 기다렸다.
“놈들이 총과 활을 쏘는 게 뜸해졌다. 그렇게 쏴 재꼈으니 가지고 있던 게 모두 바닥이 난 게지. 이제 두억시니들을 내보내라! 율도군들은 모조리 죽이되, 마루한은 반드시 산 채로 잡아 내 앞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
목라촌이 바라보이는 곳에 만든 호화로운 상석에 앉아 있던 정선교가 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천제국군들 사이에 있던 커다란 덩치의 두억시니들이 앞으로 나왔다.
“가자!”
그 앞에는 이곽이 거대한 전투망치를 들고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마루한을 쫓았던 두억시니 전사들과 본진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의 수하들 800여명이 일제히 논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짐승 같은 거친 숨소리를 내쉬며 목라촌을 둥글게 감싸고 성큼 성큼 걸어왔다.
일부러 논의 진흙탕에 발이 빠지지 않기 위해 죽어 넘어져 있는 천제국군의 시체들을 밟으며 전진하는 놈들도 있었다.
“두억시니다! 남은 탄과 화살들을 모조리 퍼부어라!”
용마로 소장이 소리치자 철기병 무사들은 마지막 남은 탄과 화살들을 다가오는 두억시니들을 향해 모두 쏟아부었다.
“크와아아아앙!”
수십여 명의 두억시니들이 쓰러지고,
피를 보고 흥분한 두억시니 전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율도 놈들을 모두 죽여라! 산채로 사지를 잘라 죽여라!”
진지 뒤에 대기하고 있던 철기병들이 16자 (약 5m) 길이의 기병용 장창을 달려오던 두억시니의 목에 꽂아 넣었다.
“컥! 커헉!”
창에 목이 꿰인 두억시니는 피를 토하며 죽어가면서도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휘둘러 율도군의 장창을 두 동강 내며 쓰러졌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두억시니 전사가 대도를 머리 위로 치켜들며 번쩍 뛰어올랐다.
“크아아아! 죽어라~!”
무사는 장창이 부러지자 곧장 허리에 차고 있던 장도를 뽑아 들고 몸을 옆으로 피했다.
쾅!
두억시니가 땅바닥으로 내려오며 대도를 내리치자, 나무 기둥과 돌담으로 만들어진 진지가 부서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순간,
슈캉!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비켜서 있던 철기병 무사의 장도가 두억시니의 팔뚝을 내리찍고,
보호대가 감겨 있지 않은 두꺼운 두억시니의 팔뚝이 피를 뿜으며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끄아아아악~!”
두억시니가 절단된 팔을 붙들고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는 찰나,
그의 목에 서늘한 쇠붙이가 들어 왔다.
철기병 무사의 장도였다.
스릉!
무사는 두억시니의 갑주와 투구 사이 목 앞에 장도를 갖다 데고는, 그대로 팔꿈치를 당기며 가로로 베어버렸다.
두억시니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숨이 끊어져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지를 수 없게 된 거대한 몸뚱이가 스르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두억시니들은 죽어 넘어지면서도 계속 마을로 밀고 들어왔다.
철기병 무사들이 필사적으로 항전해 보았지만 머릿수에 밀려 점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전투는 혼전 양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율도군 중에서도 정예라 할 수 있는 철기병 무사들이라 할지라도 자신들보다 10배나 많은, 그것도 엄청난 체구에 무시무시한 힘과 전투력을 가진 두억시니들을 상대로 한 백병전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무사들은 빼어난 무예로 서너 명의 두억시니들을 베어 죽이며 자신의 위치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사방에서 쉴 새 없이 몰려오는 두억시니들에게 하나둘씩 쓰러져가기 시작했다.
80여명이었던 율도군들은 벌써 절반 이상이 전사했고,
모두 마을 중앙에 있는 집 있는 데까지 밀려 두억시니들에게 둘러싸인 채 어려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바로 흥원공녀 진미령이 있는 집이었다.
탕! 탕!
영록도 성시우 대위 등 군경 여단 무사들과 함께 집의 담벼락 뒤에 숨어 마을로 들어온 두억시니들에게 권총을 쏘며 싸우고 있었다.
두억시니는 살육에 미친 괴물들 같았다.
그들은 율도군 한 사람에게 네다섯 명씩 달려들었다.
자신의 동료 하나가 율도군의 창칼에 꿰이고 베이면 뒤와 옆에 있던 다른 놈들이 이때를 노리고 칼과 도끼를 휘둘렀다.
철기병들이 입고 있는 두꺼운 철갑주도, 두억시니들이 엄청난 힘으로 휘두르는 무기 앞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걸레처럼 찢겨지고 우그러지기 일쑤였다.
철기병 무사들의 수가 30여 명으로 줄어들고,
영록과 군경 여단 무사들의 권총 약실 든 탄도 모두 다 떨어졌을 때,
“마루한이 저기 있다!”
“저기 하얀 술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는 게 마루한이다!”
두억시니들이 마루한을 발견하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마침 철기병 무사 하나를 전투 망치로 짓이겨 죽인 이곽이 이 소릴 듣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가겠다! 마루한은 죽이지 마라!”
이곽이 피 묻은 망치를 어깨에 메고 그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멈춰라!”
영록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있는 이곽의 앞을 가로 막는 이가 있었다.
노장 용마로 소장이었다.
갑주 일부분이 찌그러지고 여기저기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이미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두억시니들을 베어 넘겼는지 그의 군도는 두억시니의 피와 살점으로 흥건했다.
“군경 여단 무사들은 마루한을 보호하라!”
용마로 소장이 군도를 두 손으로 붙들고 이곽에게 돌진했다.
“이 하찮은 늙은이 따위가 어딜!”
이곽도 전투 망치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두 사람 간의 치열한 대결이 펼쳐지고,
이미 기력이 다한 용마로 소장이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이곽은 두억시니 특유의 괴력으로 용마로 소장을 몰아붙였다.
두 사람의 무기가 부딪치는 순간,
이곽의 전투 망치에 의해 군도가 산산이 부서지고,
힘에 밀린 용마로 소장이 바닥에 쓰러졌다.
“부군단장님!”
성시우 대위가 말릴 새도 없이,
영록이 허리에 차고 있던 두 자루의 철편을 뽑아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루한! 안 됩니다!”
성시우 대위가 뒤늦게 그의 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영록은 이미 철편을 휘두르며 이곽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아니, 마루한이 제 발로... 윽!”
갑자기 자신에게 달려온 영록을 보고 히죽거리던 이곽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떨어뜨렸다.
영록의 철편이 번개같이 그의 손등을 후려친 것이다.
철편에 맞아 뼈가 부러진 듯, 이곽의 손등을 완전히 휘어져 있었다.
“아니, 이 오살할~!”
이곽이 왼손을 뻗어 영록의 목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두 자루의 철편이 다시 무서운 속도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영록은 왼손의 철편으로 이곽의 손목을 때려 그의 손을 쳐낸 후,
오른손의 철편으로 그의 팔꿈치 관절을 때려 아작을 내어 버렸다.
“어흑!”
아무리 크고 강한 두억시니라도 관절이 부러진 팔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흥원공녀에게 행한 죄, 내가 대신 벌을 내리겠다. 너와 같은 짓을 벌인 놈들도, 모두 너처럼 만들어 줄 거고...!”
영록이 머리 위로 철편을 들어 올렸다.
퍽! 퍽! 퍽!
영록이 휘두른 철편에 이곽의 투구가 마치 장난감처럼 찌그러지고,
그의 머리에서부터 턱까지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곽은 자신을 죽인 마루한을 빛이 사라지는 희뿌연 눈으로 노려보며
그대로 땅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대, 대장이 죽었다...!”
“마루한이... 이곽 대장을 죽였다...!”
마루한에 의해 자신의 대장이 죽는 것을 본 두억시니들이 놀라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영록은 넘어져 있던 용마로 소장을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칼을 빌려주세요.”
용마로 소장은 두손으로 공손히 그에게 부러진 군도를 넘겨주었다.
그는 용마로 소장의 군도를 들고 쓰러진 이곽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후,
죽은 이곽의 목을 내리쳤다.
툭.
커다란 이곽의 머리가 투구 째 몸에서 떨어지며 땅바닥에 굴러다녔다.
영록은 그 머리를 잡아 가까이에 있던 두억시니에게 던지며 말했다.
“천제... 아니, 정선교씨한테 가서 전해. 내가 가야 할 곳은 당신네 나라가 아니라고.”
어린 마루한이 내뿜는 위압감에, 두억시니들은 모두 겁먹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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