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대동력 9,994년 6월 5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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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3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북쪽 목라촌
쿵... 쿠우웅...!
천제벽력포를 쏘는 소리, 포탄이 떨어지며 폭발하는 거대한 굉음과 진동은 금양장으로부터 수십 리 떨어진 이곳 목라촌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포성이 울릴 때마다 마을 주변 벼이삭들이 파르르 떨렸고,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가옥 위 기와들이 흔들거리기도 했다.
몇 시간 만에 목라촌은 논으로 둘러싸인 요새처럼 변해 있었다.
마을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에도 급조해서 만든 울타리, 거마창 등 각종 장애물이 길게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적이 이걸 치우고 들어오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 보였다.
가옥과 가옥 사이에도 흙벽과 돌담 등으로 쌓은 성곽과 같은 급조진지가 이어져 있었다. 80여 명의 철기병들은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활과 총을 들고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용마로 소장은 진지를 돌며 경계 상태를 확인한 후, 영매를 다루는 전령을 불렀다.
“영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가?”
전령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금양장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중은 아닐 텐데... 혹여 영매가 적의 손에 떨어진 건...?”
강운예가 천제국군과 전투를 벌이려 했다면 남쪽과 북쪽에 있는 1군단과 3군단에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당연히 작전을 지원하는 2군단에도 그에 대한 명령서가 하달되었을 텐데, 부군단장인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영매가 오지 않았다는 건 대원수가 아직 결정적 전투의 순간을 결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럼 왜 그가 보낸 영매의 답이 오지 않는 걸까?
항상 차분함을 잃지 않았던 용마로 소장의 얼굴에도 초조한 빛이 드리워졌다.
“영매가 돌아오는 즉시 지체없이 내게 보고해야 한다.”
“네, 부군단장님!”
전령이 돌아간 후 영록이 그에게 다가왔다.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마루한?”
용마로 소장은 짐짓 태연한 척 그에게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네, 부군단장님께서도 식사하셨나요?”
“아까 전투식량으로 간단히 요기를 때웠습니다. 안에 공녀는 좀 어떠하던지요?”
그도 아까 영록이 군경 여단 무사가 건빵과 육포로 만들어준 죽을 가지고 흥원공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던 걸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랫동안 들려오던 두 사람의 울음소리도 모두 들었던 것이다.
“다행히 가져다 준 죽을 조금 먹기는 했어요. 아직 여러모로 안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요.”
두 사람은 천천히 마을 주변 진지들을 둘러보며 함께 걸음을 옮겼다.
“마루한이 말씀하셔서 공녀를 구하긴 했지만... 괜한 짓으로 위험을 자초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아, 공녀를 구하다가 무사 한 분이 다치셨죠? 그 분은 어떠신가요?”
용마로 소장은 마을 남쪽으로 펼쳐진 드넓은 논이 바라보이는 급조진지에 몸을 숨기고 앉아 있는 철기병 무사를 가리켰다.
다리를 보호하는 갑주의 철갑 사이로 붉은 피가 흥건하게 묻은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구천락이 던진 단도에 맞은 자리였다.
“보시다시피 저렇게 멀쩡합니다. 거동하는 거만 조금 불편하다고 하는 거로 보아 단도에 독 같은 건 묻어 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군요... 그럼 위험을 자초했다는 말씀은?”
“네, 공녀를 구하는 일로 마루한께서 위험해지신 것 말입니다.”
용마로 소장의 얼굴에 불만스러운 빛이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영록은 그제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나만 위험해지는 게 아니라 부군단장님과 여기 있는 무사들 모두 위험하게 만들었지.’
다른 이들의 마음이 이해되는지 영록도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공녀를 죽게 그냥 둘 수 없었어요. 관장님을 위해서도 율도를 위해서도 공녀가 죽으면 안 되잖아요?”
그 말에 용마로 소장은 무언가 고민스러운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그가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루한 사실... 공녀는 대원수 기하와 율도에게 있어 더 이상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이제는 그녀가 죽어도 우리에겐 아무 상관 없는 존재일 뿐이란 말씀입니다.”
몹시 혼란스러운 듯 영록의 눈동자가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공녀는 부친을 대신해 흥원을 다스리는... 율도군이 합법적으로 흥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협력해 준 동맹이잖아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관장님도 알고 계신 일인가요?”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리신 분이, 바로 대원수 기하이십니다.”
담담한 어투로 대답하는 용마로 소장,
영록은 충격을 받은 듯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흥원공녀는 부친인 흥원공의 생사를 확인하겠다며 2군단장의 요청을 무시하고 흥원을 떠나 환강산성으로 향했었지요. 만약 공녀가 바라던 대로 그녀의 부친과 만나 율도군이 흥원으로 들어온 사실을 털어놓게 된다면... 우리가 받아낸 그녀의 서명이 적힌 공문은 한낱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공녀는 정식 흥원의 번주가 아니므로, 흥원공이 그녀가 한 일을 모두 백지화시킨다면 우리가 흥원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명분을 잃게 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만약 공녀가 흥원공과 만날 가능성이 있다면 사전에 그녀를 없앨 계획이었습니다. 하늘의 뜻이었는지 천제국군에 의해 환강산성이 초토화되면서 흥원공이 사망했기에 망정이지, 공녀는 애초부터 언제든 우리 손에 제거될 수 있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영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되요... 관장님은... 그리고 율도는 항상 정의로운 일만 해 왔다면서... 어떻게 그런 일을...”
“대원수 기하와 율도는 항상 정의로운 일만 해온 것이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왔을 뿐입니다.”
용마로 소장은 혼란스러워하는 영록의 어깨를 따스히 감싸주며 말했다.
“비정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도자란 그 무엇보다도 국가의 이익을 우선해서 생각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대원수 기하의 모든 결정은 결국 율도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일도 말입니다.”
“그럼 처음부터 공녀를 속였던 건가요?”
“우리가 공녀를 속인 적은 없습니다. 율도군은 공녀와 흥원 무사단을 대신해 반란군을 섬멸해주었고 그녀의 가족들을 구출해주었으며 흥원번의 주민들에게 손톱만큼의 해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공녀와 율도 양측이 약정한 내용 중 어느 누구도 그 내용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다만, 공녀와 율도가 협정을 맺었다는 사실을 그녀의 부친 흥원공이 알게 해서는 안 되었던 것 뿐입니다. 흥원공은 율도의 오랜 숙적인 전 대월국왕의 최측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다스리는 번에 율도군을 들이는 일을 찬성할 리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지금은요? 흥원공도 죽고 그 가족들도 모두 죽거나 폐인이 된 지금이라면, 흥원을 다스릴 수 있는 건 공녀 한 사람 뿐이잖아요? 그런데도 공녀가 필요 없다는 말씀인가요?”
“...이미 흥원은 율도가 점령한 땅입니다. 기존에 있던 지배 세력들은 없어지는 편이 나은 법이지요. 공녀가 없다면... 우리 율도가 직접 다스리면 되는 일이니까요.”
영록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애초부터 흥원을 차지하려고 계획을 세웠던 거였던 거군요?”
“우리는 천제국처럼 야만적인 침략 전쟁으로 다른 나라의 땅을 빼앗으려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대월국왕 자리가 비었으니 율도에 있던 7왕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것입니다. 7왕자는 우리 율도와 협력해 흥원은 물론 대월국 전체를 전쟁이 있기 전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것입니다.”
영록은 지난날 4군단 무사들의 도움으로 자신과 함께 성산성을 탈출했던 대월국의 7왕자 진효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럼, 이제 진효명 왕자도 이용하고 버리려는 건가요?”
“대원수 기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저도 그 이상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건 너무 도덕적이지 못한 일이잖아요?”
참고 있던 용마로 소장이 마침내 언성을 높였다.
“마루한께서는, 항상 도덕적인 결정만 하며 살아오셨습니까?”
그 물음에 영록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우성시에서 있었던 그 많은 일들,
외국인 노동자 포로들이 재판도 받지 못하고 학살당하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던 일,
마선욱 패거리들과 함께 여대생을 집단 성폭행하는 데 가담했던 일,
나중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자신은 성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던 것처럼 거짓말했던 일,
일월촌 조폭들의 아지트에서 두 명의 조폭을 총으로 쏴 살해했던 일,
그리고,
자신이 감옥에 갈까봐 무서워 비겁하게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던 일...
스스로 강운예의 도덕을 논할 만큼 깨끗하지 못하다는 걸 깨닫자 영록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용마로 소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세상 모든 일이 도덕, 선의와 같은 바르고 깨끗한 방법으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라를 경영하는 일은 더욱 그러하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쟁터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공녀나 7왕자는 우리가 보호해야 할 율도의 국민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을 희생시켜 율도의 군사들이 불필요한 싸움을 피할 수 있게 되고 국가의 성장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그들을 희생시키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결정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나, 난... 누구를 희생시키는 방법이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네, 다 함께 상생하며 화목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요.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될 일이라면 우리가 지금 왜 이 전쟁터에 나와 있겠습니까? 세상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처럼 녹록한 것이 아닙니다.”
“...”
마음속에 있는 말을 모두 쏟아낸 듯, 용마로 소장은 다시 언성을 부드럽게 낮추며 말했다.
“결례를 범한 점 사죄드립니다, 마루한. 하지만... 마루한께서도 좀 더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고, 더 나아가 세상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더 냉철하고 차가워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을 추진할 때 역시 이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아까지 말아야 할 때도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아마 마루한이시라면... 조만간 모두 깨달으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이제... 전 지원군이 올 때까지 이곳에서 버틸 준비가 잘 되었는지 확인하러 가보겠습니다. 이만.”
용마로 소장은 영록에게 군례를 올린 후 진지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영록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멍하니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전 14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북쪽 목라촌
“3리 (약 1 km) 밖에 천제국군입니다!”
동쪽으로 난 길 저 멀리, 드넓은 농지가 시작되는 곳에 말을 타고 있는 붉은 갑주의 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천제국의 기병들이었다.
“전원 전투 배치! 내 명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
용마로 소장은 가옥의 지붕 위로 올라가 망원경으로 천제국군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붉은 갑주의 기병들은 정찰대였다. 그들은 목라촌으로 가는 입구가 장애물로 막혀 있고 마을 전체가 요새화된 것을 확인하고는 어디론가 기병 전령을 보내고는 계속 마을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두억시니, 두두리, 도깨비 등으로 이루어진 천제국군들이 마을을 포위하며 다가왔다.
대략 봐도 최소 1개 사단 규모, 1만 명 이상 되는 병력이었다.
천제국군들은 드넓게 펼쳐진 논의 외곽에서 둥글게 진을 치고 마을을 포위했다.
하지만 공격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무언가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뭘 기다리는 거지? 포라도 끌고 오려는 건가?”
용마로 소장은 망원경으로 천제국군의 움직임을 계속 살피면서, 전술지도를 펼쳐놓고 눈에 보이는 적의 부대 위치를 하나 하나 기록하고 있었다.
그때,
“적이 접근해 옵니다!”
마을로 난 길 쪽을 붉은 갑주의 기병 하나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용마로 소장이 지붕 위에서 내려와 길이 있는 쪽을 달려갔다.
진지에 있던 철기병 무사들이 총과 활을 장전하고 다가오는 천제국 기병을 겨누었다.
“아직 발사하지 마라.”
용마로 소장은 무사들에게 멈추라고 손을 들어 보이고는 다가오는 적병을 노려보았다.
천제국 기병은 자신의 앞에 쭉 펼쳐져 있는 장애물을 보고는 길 중간쯤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마을로부터 대략 120보 정도 거리.
일반적인 총과 활의 최대 사거리이자,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왔던 것이다.
“마을에 있는 율도군에게 전한다! 나는 대동의 패자이시자 신성 천제 제국을 이끄시는 고귀하고 존귀하신 천제 성하의 명을 전하러 왔다! 지금 그대들 율도군이 대동에 새로 나타나신 어린 마루한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천제 성하께서는 마루한과 만나 긴밀히 좌담을 나누고자 하신다! 시간은 한 시간 뒤! 장소는 지금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지점이다!”
기병은 손에 들고 있던 천제국의 깃발이 달린 창을 땅에 힘껏 내리 꽂았다.
“좌담은 한 시간 뒤에 진행될 것이다! 천제 성하께서 이곳까지 홀로 나오셔서 마루한을 기다리실 것이니, 마루한께서도 군사들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나오셔야 한다! 그 전에 우리는 이곳에 천제 성하와 마루한께서 좌담을 나누실 자리를 마련할 것이다! 불필요한 피를 흘릴 생각 없으니 그대들 율도군도 우리를 공격하는 경거망동은 하지 않길 바란다!”
천제국 기병은 자신의 말을 다 마친 후 말머리를 돌려 돌아갔다.
“천제가 마루한을 뵈러 온다고...?”
용마로 소장은 난처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곁에 있던 철기병 무관이 말했다.
“그럼 천제의 친위군도 같이 오겠군요?”
“우리를 포위하는 군세가 더 많아지겠군. 지금도 1개 사단 규모가 와 있는데 얼마나 더 오려는건지...”
“지원군이 온다 해도 쉬운 싸움이 아니겠습니다.”
“어떻게든 마루한 만큼은 무사히 모셔야 할 것이다.”
“허면, 천제가 마루한을 뵙자 하는데 어찌하실 생각이시온지...?”
길 저편 천제국군들 사이에서 무장을 하지 않은 두두리, 혼혈종족 등 노무자들이 아까 천제국 기병이 창을 꽂아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평상, 차양대 등 좌담을 위한 자리를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용마로 소장이 쓴 입맛을 다시며 이를 지켜보고 있을 때,
언제 왔는지 영록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다녀오겠어요.”
“마루한?! 하지만...”
용마로 소장이 놀라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둘이 만나자는데 두려워할 필요 없잖아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녀오겠어요. 나도 천제라는 사람한테 궁금한 것도 있고.”
영록은 그렇게 말하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의 약실을 열어 화약과 탄환들을 다시 장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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