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63화 (163/217)

〈 163화 〉 대동력 9,994년 6월 5일 (1)

* * *

­ 오전 1시, 대월국 호문번 환강산성 폐허 서쪽 일대

천제국군들은 본국에서 보낸 무기, 식량 등 보급물자들을 폐허가 된 환강산성 아래 설치한 보급기지에 모아두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물자들은 대사마 주진경이 짜놓은 수송 계획에 따라 천제의 친정군이 있는 서래번 금양장까지 이동하게 되는데, 율도군 기병들이 곳곳에서 기습을 해오는 터라 많은 반드시 병력들이 붙어 수송단을 호위해야만 했다.

어제 오후 보급기지를 출발한 수송단의 규모는 다른 때보다 커 보였다. 호위하는 병력들도 천여 명은 족히 넘었다.

화약과 천제벽력포의 포탄을 싣고 가는 수송단이었기 때문이었다.

포탄이 워낙 무겁고 거대한지라 수레 하나당 고작 한두 개 밖에 싣고 갈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수송단을 구성하는 수레들의 숫자가 상당히 많을 수밖에 없었고, 행렬이 길어지다 보니 이동 속도도 다른 때보다 엄청 더뎌졌다.

게다가 율도와는 달리 대월국에는 제대로 된 도로가 거의 없었다.

가는 내내 바퀴가 땅바닥에 박히거나 수레가 부서지고 물자들이 땅에 쏟아지는 일이 잦아 여정은 계속 늘어졌다.

환강산성을 출발한 게 낮 시간이었건만, 수송단은 자정이 될 때까지 20여 리도 채 가지 못했다.

밤이 늦었기에 수송단은 수레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채 야영을 하기로 했다.

아직 7, 8월이 되지 않아 찌는 듯한 열대야는 없었다. 모닥불을 피울 필요도 없었고 그냥 푸른 들녘에 등을 대고 누워도 잠이 잘 올 것 같은 훈훈한 날씨였다.

“율도놈들이 이 근처까지 와 있을지도 모르니 죽기 싫으면 졸지 말고 경계 똑바로 서!”

수송단 호위를 맡은 지휘관은 보급 물자를 실은 수레를 둥그렇게 감쌀 수 있도록 병력을 배치하고,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경계를 서도록 지시했다.

대부분 두두리나 도깨비, 혼혈들로 구성된 천제국 보병들은 무기를 손에 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의 깊은 어둠 속을 바라보며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경계 근무 중에 옆 사람과 잡담 나누는 것만큼 시간 때우기 좋은 일도 없을 터,

병사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어서 빨리 교대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 전쟁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언제 한번 1개 연대가 전멸되었다고 시신들이 산더미만큼 후방 보급기지로 실려 온 적도 있잖아? 설마 우리 군이 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다른 나라도 아니고 율도하고 싸우는 거잖아? 쉬운 싸움은 아니겠지.”

“그래도 우리한테는 천제벽력포인가 뭔가, 쐈다 하면 웬만한 산 하나도 가루로 만들어버린다는 신무기가 있잖아?”

“이번 수송단이 가지고 가는 것도 그 신무기에 들어가는 화약하고 포탄들이라고 하더라. 수레에 실린 포탄 크기 봤어? 난 무슨 바윗덩어리인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본국에서 온 수송대가 보급기지에 화약이랑 포탄 싣고 왔을 때 말이야... 내가 그때 창고 근무 서고 있었거든? 그때 수송대 장교가 보급 담당관한테 그러더라고. 더는 가져다줄 화약이랑 포탄이 없다고. 아무리 장인들이 열심히 만들어도 전쟁에 들어가는 수요 맞추기 힘들다고 말이야.”

“신무기 크기가 어마어마하니 들어가는 화약도 어마어마하겠지. 그래도 설마 나라에 있는 화약이 몽땅 바닥 났을라고? 대동에서 유황을 직접 얻어서 화약 만들 수 있는 건 우리 천제국 뿐인데?”

“멍청아! 주신도 유황굴이 있잖아?”

“아, 맞다! 백여 년 전에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빼앗겼다고 했지? 그럼 율도는 화약을 주신에서 수입하는 건가?”

“율도는 주신에서 유황만 수입한다고 들었어. 염초나 목탄 같은 건 직접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주신 말고도 서남 대륙 포각수들한테서도 유황을 사 온다는 말도 있고.”

병사들이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휘익.

어둠 속에서 작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저 밤하늘로 날아오르는 작은 새의 날갯짓 소리려니 생각하는 순간,

푹!

투구와 무두질 된 가죽 갑주 사이, 아주 살짝 노출된 병사의 목 부분에 화살이 관통했다.

“허억~!”

옆에 동료가 목이 화살에 꿰어진 채로 땅바닥에 쓰러지는 걸 본 병사는 기겁해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그가 뒤돌아 무언가 외치려는 순간,

푹! 푹!

두 대의 화살이 날아와 그의 뒷덜미와 등을 정확히 꿰뚫어 버렸다.

그렇게 경계 근무를 서는 병사들은 밤의 어둠 속 어디선가에서 날아온 화살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렇게 공격당한 곳은 이곳 한 곳만이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도 경계를 서던 천제국 병사들이 어둠 속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소리 없이 쓰러졌다.

화살 소리는 열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디 작은 소리였다.

수송대 수레 주변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다른 병사들을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쿨쿨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경계를 서는 병사들 대부분이 쓰러지자,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말 탄 군사들이 나타났다.

율도군 특유의 검은 갑주를 입고 있었지만, 진녹색 전포에 검은색 곰털모자를 쓰고 있는 경기병들,

101 대원수 친위 기마 엽병 여단 무사들이었다.

“놈들이 아직 자고 있다... 모두 잠든 채로 보내 버려라...”

여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활을 든 수 백명의 무사들이 수레가 모여 있는 곳으로 천천히 말을 몰아 나아갔다.

그들을 말 위에서 땅바닥에 누워 잠든 천제국 병사들을 노려보며 활시위를 당겼다.

슉! 슉!

목에 한 대,

심장에 한 대.

그렇게 말을 탄 무사들이 소리 없이 천제국 병사들에게 활을 쏘고 지나가면,

말에서 내린 또 다른 수백 명의 무사들이 그 뒤를 따라가며 화살이 박힌 시신들을 확인했다.

화살에 맞고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자가 있다면 군도로 목을 베었고,

죽은 자의 몸에 박힌 화살들도 일일이 부러지지 않게 빼어 수거했다.

‘엽병’이란 말은 원래 사냥꾼 부대라는 뜻이다.

전투 후 패잔병들을 추격하는 임무를 맡는 부대들을 모두 엽병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강운예의 부대들 중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101 대원수 친위 기마 엽병 여단의 임무는 단순히 패잔병 추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처럼 여단급 대규모 부대로 이동하면서도 발각되지 않고 적을 추격하는 건 물론이고,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접근해 적의 부대 하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지워버리는 게 이들의 특기였다.

그들은 달아나는 먹잇감을 잡는 사냥꾼들이 아니라,

대규모로 이루어진 암살자들과 같았다.

친위 기마 엽병 여단 무사들이 내는 활시위 튕기는 소리, 군도 휘두르는 소리는 불과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더는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천여 명이 넘는 천제국 병력들 중 이들의 기습에서 살아남은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깨끗하게 해치웠습니다. 적의 물자들은 시체들과 함께 모두 소각할까요?”

무관의 보고를 받은 여단장이 수레가 있는 곳으로 말을 타고 이동했다.

상황이 모두 끝나서인지, 이제 무사들은 횃불을 만들어 수레에 실린 보급 물자들을 확인하는 한편, 천제국 시신들에게서 전리품들을 취하고 있었다.

수레가 있는 곳을 돌아본 여단장은 이곳에 있는 것들이 화약과 포탄, 그것도 이번에 천제국이 새로 만들었다는 엄청난 위력의 신무기에 들어가는 포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모두 불태우기엔 아까울 정도로 많군...”

“하지만 우리가 가져가기에도 너무 양이 많습니다. 이걸 끌고 다니면 보급로 상에 있는 천제국놈들을 모두 청소하라는 대원수 기하의 명을 수행하는데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여단장이 입을 열었다.

“우선 우리 총병들이 쓸 화약들을 챙기도록. 나머지 화약과 포탄들은...”

여단장은 무관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 오전 3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북쪽 일대

정찰을 나갔던 철기병 무사들이 돌아온 건 지난 저녁 해 질 무렵 때의 일이었다.

“두억시니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흥원공녀도 함께 있었습니다.”

용마로 소장 곁에서 보고를 듣던 영록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왔다.

“공녀는 무사하던가요?”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다른 흥원번 무사단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115 기병 여단 무사들의 보고 대로 이미 모두...”

철기병 무사는 참혹한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억시니들을 감시하기 위해 무사 셋을 남겨 두고 왔습니다. 그들이 이동하면 기별이 올 것입니다.”

영록이 용마로 소장에게 말했다.

“부군단장님, 우리 어서 구하러 가요!”

마루한의 성화에 용마로 소장은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말 탄 기병들이 덩치 큰 두억시니들을 찾아 추격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쇠사슬에 묶인 발가벗겨진 도깨비 여인까지 끌고 다니고 있으니,

어려서부터 드넓은 율도의 평원 지대에서 말을 타며 자라온 무사들의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었다.

철기병 무사들은 천제국 두억시니들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은밀히 미행을 계속했다. 두억시니들은 자신들이 쫓던 율도군들이 도리어 자신들을 쫓고 있다는 걸 까마득히 모르는 듯, 분주히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그들도 언덕 아래 마른 풀이 많은 곳을 골라 하룻밤 쉬어갈 준비를 했다.

두억시니들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 무사 하나가 급히 용마로 소장과 영록이 있는 본대가 있는 곳으로 말을 달려왔다.

“놈들이 야영지를 폈습니다.”

용마로 소장과 영록의 철기병들은 무사의 안내를 받아 그곳으로 말을 달렸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두억시니들의 야영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두 명의 무사들이 주변을 감시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공녀는요? 공녀는 아직 살아 있지요?”

영록이 말에서 뛰어 내려 무사들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영록의 목소리가 다소 크다고 느꼈는지, 무사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저 아래 두억시니들에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음성을 낮추셔야 합니다, 마루한.”

“아,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마루한. 그럼 이쪽으로.”

무사는 자세를 낮추고 영록을 언덕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용마로 소장과 성시우 대위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두억시니들의 수는 대략 백여 명 정도입니다. 그 규모나 땅바닥의 말발굽 같은 것을 찾아 이동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를 쫓던 그 무리가 확실합니다. 그리고 저들 중에는 도깨비들도 몇 있는데, 천제국의 전포나 갑주가 아닌 대월국의 복장을 하고 있는 곳으로 보아 그들에게 협력하고 있는 인근 주민들로 사려됩니다. 그리고 공녀는...”

무사가 손으로 언덕 아래 어느 지점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밤이라 잘 보이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저기 대여섯 명의 두억시니들이 뭉쳐서 자고 있는 곳, 저들 가운데에 있습니다.”

“아직 살아 있는 건 맞지요?”

영록의 불안한 목소리에 무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해주었다.

“예, 아직 살아 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마루한.”

무사도 영록이 시공을 넘어온 덕에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아직 십 대의 어린 소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도착하기 전까지 공녀가 두억시니들에게 당한 일들을 도저히 입에 담기가 민망스럽게 느껴졌다.

야영지를 편 두억시니들은 약속대로 구천락과 도깨비들에게 공녀를 먼저 범할 수 있게 양보했다.

하지만 구천락은 같은 도깨비로서 그녀가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하얀 허벅지 사이에서 쉼 없이 흘러나오는 두억시니의 정액 때문에 거북함이 들어서인지 그 호의를 거절했다.

다른 도깨비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전쟁으로 오랫동안 여자를 맛보지 못해 발정 난 걸 견디지 못하는 두 명 정도가 나서서 그녀의 튼실한 엉덩이를 붙들고 짧게 욕정을 해소하고 끝냈다.

그런 후, 두억시니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위로 번갈아 올라타기 시작했다.

도깨비들과 할 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던 진미령은,

두억시니들에게 안기고 나서부터는 비명에 가까운 고통 어린 신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소리는 언덕 위 무사들이 있는 곳까지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무사는 자신이 본 과정을 어린 마루한에게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경계를 서는 놈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교대하는 시간도 일정하지 않은 것이 놈들 모두 방심하고 있는 듯 합니다.”

무사의 보고를 받은 용마로 소장이 말했다.

“무리하게 두억시니 모두를 공격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루한. 조용히 공녀만 구출해 여기를 빠져나가도록 하시지요.”

영록도 불필요한 싸움으로 무사들이 희생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한이 동의하자 용마로 소장이 철기병 무사들 중 특히 몸이 날랜 이들 다섯 명을 선발했다.

다섯 명의 무사들은 무거운 갑주를 모두 벗고 활과 화살, 군도 만을 휴대한 채 언덕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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