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62화 (162/217)

〈 162화 〉 대동력 9,994년 6월 4일 (3)

* * *

­ 오후 6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서쪽 율도군 진지

쾅...! 콰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전날보다 포탄이 날아오는 빈도는 많이 줄었지만 천제벽력포의 포탄이 한 발 한 발 떨어질 때마다 느껴지는 엄청난 위력은 변함없었다.

포탄이 떨어지며 하늘 위로 높게 솟구친 흙더미들이 율도군 진지로 쏟아지면서 참호와 교통호를 메워버리기도 했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깨어진 돌덩이들이나 부서진 장애물에 맞아 부상 당하는 군사들도 속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율도군은 아직 별다른 반격을 가하지 않고 있었다.

사거리가 10리 (약 4km)에 달하는 천제벽력포에 비해, 율도군의 야포, 비화포 등의 사거리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늘 위로 천제벽력포의 포탄이 무서운 바람 소리를 내며 율도군의 진지로 날아가는 가운데,

천제국의 보병들이 두터운 진을 짜고 천천히 전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율도군의 진지가 있는 언덕으로 곧바로 공격해 들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천제국군들은 율도군의 포병 사거리 밖에 있는 금양장 시장의 동편까지 와서 율도군 진지 위로 뭉게뭉게 피어나는 커다란 검은 포연을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는 가운데, 진지 정상부 관측소에 있던 강운예가 망원경을 듥도 천제국 부대들이 포진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경보병들이 정면, 중장 보병들은 양익에... 역시 우리 기병들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군.”

그는 망원경을 돌려 금양장 일대를 돌아보았다.

금양장 시장터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는 크고 작은 마을들과 농장들, 밭으로 이루어진 벌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 중 몇 곳은 이미 율도군들이 거점으로 점령하고 매복해 있는 중이었다. 지난밤 자그니들로 이루어진 천제국 척후병들이 몰살당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천제국도 이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들은 산포 등 작은 포를 끌고 와 마을들을 향해 방렬하는 중이었다. 곧바로 마을로 들이쳤다가는 군사들의 희생을 각오해야 할 테니, 우선 포격부터 때려 놓고 군사들을 보내 율도군들을 소탕하려는 모양이었다.

“각 마을에 매복해 있는 우리 군들을 모두 본진으로 철수시키라 명하라.”

“네, 기하!”

뒤에 대기하고 있던 청영단 무사 몇이 강운예의 명을 받자마자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전속부관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전방 거점을 적에게 넘겨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강운예는 ‘넌 아직 멀었구나.’하는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우리가 이곳에서 물러서지 않고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한다면 저 마을들을 포기해서는 안 되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 군의 전략 목표가 거점 사수가 아니니만큼, 전방 거점을 점령하고 있는 군사들을 무의미하게 희생시킬 필요는 없다.”

“그럼 천제국군을 더 가까이 유인하시려는...?”

“그러고 싶지만 정선교 저 찌질한 인간이 그렇게 과감하게 병력들을 전진시킬까? 난 그렇지 못할 거라 보는데?”

강운예는 마루한 정선교를 ‘인간’이라 부르며 피식 웃었다.

“어차피 저들도 금양장을 넘어 전진하는 순간 우리 포병들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을 거야. 놈들도 기회를 잡기 전까지는 저 신무기 쏘는 거 외에 별다른 군사 행동은 못하겠지. 다만.”

그는 금양장 가까이까지 진출한 보병들 너머로 보이는, 수천여 동의 천막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천제국군의 본진을 손으로 가리켰다.

“전방 거점의 우리 군사들을 철수시키면 자연히 천제국군도 금양장 방향으로 더 많은 병력들을 보내겠지. 예비대까지 본대에서 나와 전진한다면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우리 군이 놈들의 신무기를 무력화시키기 더 수월해질 것이다.”

서래번 북쪽의 산악 지대를 통과한 강운예의 친위 기병 부대들과 4군단 병력들은 천제국군의 후방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친위 기병 부대들과 4군단이 천제벽력포를 모조리 파괴해 버리고 보급로까지 끊어버리면, 남쪽과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1군단과 3군단은 물론, 소부대 규모로 기습 작전을 펼쳤던 2군단과 6군단 기병들까지 합세해 포위를 완성할 수 있다.

적이 퇴각할 수 있는 방향이라고는 유송천이 있는 동쪽 뿐.

하지만 박윤수 중장이 유송천의 모든 다리를 끊어버린 데다가 천제국군이 설치했던 급조 부교들도 도하를 마치면서 모두 수거해간 터라 그들이 하천을 넘을 방법은 전무 했다.

이제 천제국군은 강운예가 준비한 덫에 완벽하게 걸려들게 된 것이다.

언덕 아래에서 또 다른 청영단 무사 몇 명이 강운예가 있는 관측소로 올라왔다.

손에 문서가 든 봉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디선가 보낸 보고서를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전속부관이 그들로부터 봉투를 받아 대원수에게 전해주려는 순간,

“전황이 급하니 그건 나중에 보도록 하지.”

강운예가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는 망원경을 들어 전방 관측에 몰두했다.

전속부관은 옆에 내려놓았던 서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서류 가방에는 청영단이 가져온 것과 같은 모양의 봉투들과 보고서들이 한 꾸러미 가득 들어있었다.

전쟁터에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율도의 태상국이자 대원수에게 올라오는 문서들이 하루에서 수십에서 수백 건이나 접수되고 있었다.

전속부관은 봉투를 가방 안에 넣으며 어디서 보낸 것인지 살짝 확인해 보았다.

발신인은 흥원에 있는 6사단장이었다.

‘아까 낮에도 6사단장이 영매를 보냈었는데? 이따 상황 봐서 기하께 다시 보고드려야겠군.’

전속부관은 낮에 받은 6사단장의 문서를 찾아 지금 받은 것과 나란히 가방의 맨 앞쪽에 넣어 두었다.

­ 오후 7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동쪽 천제국군 진영

쿵...! 우르르르릉...!

천제벽력포의 포성이 들려올 때마다 천제의 수레도 부르르 흔들렸다.

바퀴가 달린 수레 위에 올려진 가옥이라 그런지, 기둥이며 장지문들은 포격의 진동에 겁먹은 것처럼 마구 떨리고 있었다.

천제는 오늘따라 율도군 진지가 바라다보이는 관측소에서 일찌감치 내려와 수레 위 자신의 호화로운 가옥으로 돌아와 있었다.

포탄과 화약의 보급이 추가로 도착하기 전까지는 천제벽력포를 쏘는 빈도를 줄여야 했기에, 율도군 진지에 떨어지는 폭발의 화염이 어제만 못하자 이내 싫증을 느끼고 자리를 뜬 것이다.

그는 가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황실에서 데리고 온 궁녀들을 모아놓고 또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도깨비는 물론 아리랑과 한자손, 대동에서도 흔치 않은 미호랑 미녀들까지.

여러 종족 중에서도 가히 최고의 절세미인들만 모아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신으로 숭배되는 마루한이자 한 나라의 지도자인 천제의 술판이라고 하기엔 격이 너무 떨어져 보였다.

궁녀들은 헐벗은 상태에서 속이 훤히 비치는 얇고 하늘하늘 거리는 속창의 같은 것만 간신히 걸치고 천제의 곁에서 술 시중을 들고 있었다.

궁녀 하나가 술상 앞에서 현실 세계의 가야금과 비슷하게 생긴 고쟁을 연주하는 동안,

아무것도 입지 않은 정선교가 불룩한 배를 보기 흉하게 내밀고 크고 푹신한 등받이에 기대 누어 궁녀가 따라주는 맑은 술은 연거푸 비우고 있었다.

천제가 술을 한 잔 마시면 옆에 앉은 궁녀가 고기로 된 안주를 입에 물고 그의 품에 안겼다.

그러면 천제는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으며 입에 물고 있는 고기를 입맞춤하듯 제 입으로 받아먹곤 했다.

“역시 전쟁터에서 마시는 술맛이 남다르긴 하지! 이 전쟁 끝나면 강운예 그놈의 머리를 상 위에 올려두고 신명나게 마셔봐야겠지? 끌끌끌~!”

정선교는 술 취한 목소리로 희희낙락거리며 궁녀의 탐스러운 젖가슴을 주물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궁녀는 한 손으로 천제의 육봉을 잡고 위아래로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 계속 흔들고 있었는데도 그의 것은 좀처럼 딱딱해지지 않고 있었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술과 고기, 여자에만 빠져 살다 보니 이제 그것도 말을 잘 안 듣는 것이다.

마루한은 늙어 죽지만 않을 뿐 병에 걸리거나 건강이 상할 수 있었다.

남자의 정력 역시 어지간해서는 대동으로 넘어왔을 때 수준을 계속 유지하며 살 수 있긴 했지만 정선교처럼 건강 관리를 등한시하고 너무 탐욕스럽고 방종한 생활만을 거듭하면 이와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정선교도 궁녀의 익숙한 손놀림에도 자신의 물건이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자 몹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궁녀의 머리를 거칠게 잡고 그의 사타구니 사이로 잡아당겼다.

궁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의 허벅지 옆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천제의 고환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의 육봉을 입 안에 넣었다.

“음... 으음...”

간드러지는 고쟁의 연주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궁녀의 신음소리가 제법 자극적이었다.

그녀의 혀와 입술 덕인지, 천제의 그것은 조금씩 조금씩 살아나는 기미가 보였다.

그제야 정선교의 입가에도 웃음이 되돌아왔다.

“그러고보니 너, 전에 나한테 주신 출신이라고 했었지?”

천제가 옆에서 술을 따르는 아리랑 궁녀에게 술잔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소녀의 어미가 주신 출신이라 말씀드렸사옵니다. 전 어미가 천제국에 온 후 태어났지요.”

아리랑 궁녀는 공손히 그의 잔에 맑은 술을 따라 주었다.

“네 어미가 주신에서 끌려온 노예 출신이라 했던가?”

“그렇사옵니다. 저 역시 어려서부터 어미와 함께 노예 생활을 하다 천운으로 궁으로 들어와 이렇게 천제 성하를 모시게 되었지요.”

“외모로 보아 네 아비도 분명 아리랑 출신이었을 것이다. 다른 종족의 피가 섞였다면 지금 같은 외모는 얻지 못했을 테니.”

“제 어미는 아비에 대한 말을 일절 해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제 어미가 어디 살아 있는지도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황송하오나 제 아비가 누구였는지는 영원히 알 길이 없을 듯 합니다.”

정선교가 그녀의 엉덩이를 음탕하게 주무르며 말했다.

“네 아비가 누구인지, 네가 무슨 출신인지 신경 쓰며 살지 말아라. 지금은 이렇게 나 천제의 사랑을 받으며 잘 살고 있지 않느냐?”

“황공하옵니다, 성하.”

천제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술병을 잠시 탁자 위에 올려 놓고는 천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이 혀와 입술을 부비는 중에도 천제의 무릎 위에서는 다른 궁녀가 여전히 그의 것을 입에 넣고 정성스럽게 빨아주는 중이었다.

입맞춤을 마친 정선교가 그녀의 어깨를 꼭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럼 너는 내가 주신과 전쟁을 치르던 때를 알지 못하겠구나?”

“제가 태어나기 한참 전의 일이라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옵니다.”

“참 오랜 세월 동안 주신과 싸웠었지. 그 작은 나라가 감히 신성 천제 제국의 천제이자 대동의 지배자, 나 정선교의 말을 거역하고 조공도 바치지 않고 뒤로 몰래 화약 무기를 만들었었거든. 그래서 대군을 일으켜 주신을 치고 석 달도 안 되어 그 나라의 수도까지 점령했었단다. 놈들의 왕은 남쪽으로 도망쳐 저항해 보려 했지만 주신을 멸망시키는 건 시간 문제처럼 보였었지... 그 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정선교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아리랑 궁녀도 지금 천제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하려는 이야기는 대동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강운예 그놈! 주신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황치우의 뒤치다꺼리나 하던 한낱 용병대장이었던 놈 주제에! 그런데 주신의 황자가 어디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대동 남부까지 갔다는 거야! 황자가 뭘로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강운예 그놈이 선뜻 황자를 돕겠다며 제 부하들 이끌고 바다를 건너 대동 동부로 왔지.”

“용병대장을 하던 자이니만큼 그저 돈이 걸린 전쟁터를 찾아간 것 아니겠사옵니까?”

아리랑 궁녀의 말에 정선교는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웃으며 그녀의 엉덩이를 투닥였다.

“그래, 맞다, 맞아! 네 말이 맞을 거다! 그놈, 예나 지금이나 돈을 엄청 밝히는 놈이니까! 끌끌끌~!”

한동안 이어지던 그의 웃음소리가 딱 끊겼다.

그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놈이 나타난 이후부터 우리는 계속 패하기만 했다. 예전에 황실 사료를 정리하던 자가 내게 보고서를 하나 내밀더구나. 주신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천제국의 군사들의 수가 500만명에 달하고, 전쟁에서 부상 당했거나 부상으로 얼마 못 가 죽은 자들의 수는 그 2배에 달한다고 말이야...”

천제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술잔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예전에 나와 함께 대동으로 넘어온 이준희와 마루한들은 물론 박환성하고 그 녀석과 함께 온 다른 마루한들을 모조리 세상에서 지우면서, 난 내가 머리 쓰는 것 만큼은 대동에서 제일이라 생각했었다. 황치우와 그를 따르는 마루한들, 나보다도 수천 년은 더 대동에서 살아온 그들을 꺾으면서 내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졌었지. 당연히 대동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햇병아리 같은 그놈이 여기서 뭘 할 수 있겠나,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내가 놈을 너무 얕잡아봤던 거였다. 그 때문에 주신의 지하 감옥에서 몇 개월이나 갇혀 지내는 망신까지 당하고 말이다.”

아리랑 궁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도 이구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힌 천제가 얼마나 비참한 일을 겪었는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풍문으로 다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놈은 주신을 떠나 대동 남부로 돌아갔지. 그리고 그곳에 지금의 율도를 세웠다. 난 이구 전투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해 늘 기회를 엿보았지. 그런데 놈이 그놈의 공화정이라는 걸 만들어 놓고는 더 이상 율도를 다스리지 않고 떠나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난 그때 놈이 미친 줄 알았다. 왜 스스로 권력을 버리겠다는 거지? 왜 그 좋은 걸 하찮은 아랫것들에게 맡겨두겠다는 거지? 결국 지금처럼 태상국이니 뭐니 하는 이름을 달고 돌아올 게 뻔한데 왜 그땐 그렇게 떠나려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나에게는 강운예 그놈이 만든 세상을 부숴버릴 좋은 기회였지만 말이다.”

정선교는 자신의 그것을 입으로 빨고 있는 궁녀의 머리를 잡고 좀 더 거칠게 흔들기 시작했다.

“강운예가 없으니 난 율도를 멸망시키는 일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대월국과 태진은 물론 주나라까지 우리와 수호 동맹으로 힘을 모았으니, 사방에서 몰려드는 군대를 율도가 막아낼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지. 그런데 그놈은... 불과 며칠 만에 1, 2만도 안되는 병력을 모아서는 20만이 넘는 수호 동맹군을 패퇴시켰다... 난 그제서야 놈을 다시 보게 되었지. 대체 놈이 대동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길레 군을 이끄는데 저리 능하단 말인가, 알아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어.”

아리랑 궁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가 대동에 오기 전 그가 있던 세계에서 무사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 무예 연구도 많이 해서 무예에 관한 서책도 썼는데... 아! 얼마전에 새로 대동에 나타난 마루한이 그가 그쪽 세상에서 썼다는 무예서를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그래, 놈은 자기가 대동에 오기 전에 군인이었고 무예도 가르쳤다는 말을 사석에서도 자주 한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나 역시 대동에 오기 전에 군인이었어. 일본에까지 가서 군사 교육을 받고 우수한 성적으로 장교로 임관한 군인 출신이었다는 말이다.”

아리랑 궁녀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본...이요...?”

“내가 살던 세상에서 난 조선이란 나라에서 태어났다. 수도 한양에 제법 잘사는 양반가의 도령이었지. 그런데 조선이라는 이미 나라는 썩을 대로 썩었고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나라였어. 일본이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가 와서 힘으로 조금만 겁박했어도 조선은 멸망했을 나라였다. 그래서... 난 조선보다 발전한 일본의 신민으로 사는 길을 택했다. 그때는 그 길이 현명한 선택이었으니까. 그래서 일본군 장교가 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나보다 더 나은 장교는 없을 거라 자부하곤 했는데...”

정선교는 벌게진 얼굴로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강운예 그놈은 나보다 100년 후의 세상을 살다 왔다고 했다. 내가 살던 세상에서 100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체 얼마나 많은 발전과 변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군사 지식과 이를 운용하는 것에 있어서 만큼은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결국 우리가 사용하는 무기들은 칼과 활, 창과 총, 그것도 내가 살던 세계에서 쓰던 총에 비하면 골동품이나 마찬가지인 총을 나나 강운예 그놈이나 똑같이 쓰는 거 아니냐? 게다가 나에게는 대동 최강이라는 두억시니들까지 있었다. 그런데... 그놈은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항상 나와 나의 군대를 갖고 놀며 패배시키곤 했어!”

갑자기 그가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에 있는 궁녀의 머리를 거칠게 잡아 눌렀다.

“컥! 커헉!”

궁녀는 그의 육봉에 목구멍이 막히는 듯 빨개진 얼굴로 발버둥 쳐 보았다.

하지만 정선교는 그녀의 머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강운예를 찍어 누를 수 있는 건 오직 화력의 힘 뿐이게 되었다. 이번 전쟁... 반드시 놈의 몸뚱아리가 천제벽력포의 화력 앞에 찢어지는 걸 내눈으로 보고 말 것이다. 그래야 내가 주신의 지하 감옥에서 와신상담하던 시간들을 모조리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니... 그리고 흥원을 점령하고 대월국도 손에 넣고... 그러고 나서 천천히 율도를 점령해 나갈 것이다. 그런 후 강운예 그놈의 처와 여식들을 잡아 궁녀로 삼을 것이다. 듣자 하니 그 처나 여식들 모두 미모가 대단하다던데? 끌끌끌... 아! 그럼 강운예를 죽이면 안되겠군. 그놈이 보는 앞에서 놈의 처와 여식들을 강강하는 걸 보여주고 싶으니 말이야! 두억시니들에게 시켜 팔다리만 자르게 하고 꼼짝 못하게 만들어 매달아 놓은 다음, 그놈 앞에서 그 처와 여식들을 차례로 범하고 내 씨로 임신시키는 모습까지 보여줘야 하니까! 끌끌끌끌~!”

신, 아니 왕, 그것도 아닌 지체가 높은 사람, 그마저도 아니라면 교양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감히 하지 못할 법한 거북한 이야기.

아리랑 궁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그에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필시 이번 전쟁, 성하의 뜻대로 되실 것이라 믿사옵니다.”

천제는 술을 받아 마시고는 사타구니 위에서 켁켁 거리는 궁녀를 옆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아리랑 궁녀를 그 자리에 뉘이고 천천히 두 다리를 벌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