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대동력 9,994년 6월 4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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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북쪽 일대
용마로 소장의 철기병 무사들은 금양장 너머 강운예의 본진으로 회군하지 않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흥원공녀 진미령을 구출하기 위함이었다.
용마로 소장과 함께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자기 주장을 펼치지 않고 조용히 동행하기만 하던 마루한 영록이었는데,
강지헌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며,
“마루한으로서의 명령입니다, 흥원공녀를 반드시 구해내세요! 여러분이 하지 않겠다면 저 혼자라도 가겠습니다!”
라고 완강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결국 용마로 소장은 그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흥원공녀를 찾기 위해 다시 천제국군들이 있는 방향으로 무사들을 이동시키기로 했다.
목표는 자신들을 뒤쫓던 두억시니 무리들.
용마로 소장은 소수의 무사들을 여러 방향으로 보내어 그들의 행방을 먼저 찾기로 했다.
원 소속대인 115 기병 여단 무사들은 용마로 소장의 철기병들과 떨어져 먼저 흥원으로 복귀하는 중,
강지헌과 동료 무사는 이번에도 하는 수 없이 흥원공녀를 구하는 일에 동행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제길, 뜨거운 물로 목욕하는 건 좀 더 기다려야겠군.”
동료 무사는 몸이 가려운지 갑주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몸 여기저기를 북북 긁으며 말했다.
“그런데 말야, 과연 공녀가 아직 살아있기나 할까?”
강지헌도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억시니들이 아무리 여색을 밝힌다지만, 제 욕구를 다 채우면 여자고 뭐고 고기로 밖에 보지 않는 것들이지. 우리가 찾아도 허사일 수 있을거야.”
“강 중사, 전에 마루한과 독대하고 이야기도 나눠봤다면서? 자네가 마루한께 말씀드려보면 안될까? 찾아봤자 벌써 두억시니 뱃속에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야. 게다가,”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어차피 여차했으면 우리가 직접 공녀를 묻어버렸을지도 모르는데 왜 굳이 그 여자 도깨비를 구하겠다고 이 난리인지 원... 아, 마루한께서는 이 일을 모르실 수도 있겠구나?”
진미령이 자신의 부친 흥원공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환강산성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박윤수 중장은 그녀와 동행하는 115 기병 여단 무사들에게 은밀한 명을 내려 놓았다.
[보호를 명목으로 환강산성으로 가는 여정을 최대한 지연시켜라. 그래서 천제가 이끄는 친정군이 환강산성에 당도하기 전에 공녀가 먼저 환강산성에서 흥원공과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만일 공녀가 흥원공과 만나게 될 것 같다면 사전에 은밀히 제거하고 시신은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은닉하라. 율도군이 흥원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명분에 티끌만큼의 오점도 남지 않도록 유의하라.]
진미령은 부친인 흥원공을 대신해 율도군이 흥원에서 군사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승인을 해준 인물이었다.
그녀가 인장을 찍은 국서를 확보했으니, 이제 율도는 진미령의 존재가 크게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흥원공과 만나 자신이 인장을 찍은 율도와의 협정을 파기하지는 않을까 그 점이 신경쓰일 뿐.
그렇다면 율도 입장에서는 그녀가 조용히 사라지는 게 속 편한 해결책이 된다.
게다가 실제로 흥원공은 물론 진미령마저 천제국군에 의해 해를 당한 상태.
율도로서는 골치꺼리들이 깨끗이 사라진 셈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에 대해 알지 못하는 마루한이 공녀를 구하라고 하고 있으니, 율도군 무사들은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부군단장님도 이에 대해 알고 계시겠지?”
“군단 지휘부가 이에 대해 모를 리 없겠지.”
“하긴, 그러니 부군단장님도 마루한을 설득하시려고 그리 애를 쓰신 거겠지. 사실대로 말씀드리기 힘들어서 더 애를 먹으셨을 테고.”
“마루한께서 잔정이 많은 분이셔서 그런 거 같아. 저번에 보니까 공녀하고도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는 걸 봤거든. 아, 이야기를 나누었다기보다 공녀가 뭐라고 신세한탄 같은 소리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걸 상당히 진지하게 들어주시던걸?”
“아직 어리다고는 하지만 역시 마루한은 마루한이신가 보네. 참, 강중사. 마루한께서 자네하고는 무슨 얘기 나누셨어?”
“...태상국, 아니 대원수 기하에 대한...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활 이야기랑 궁금한 거 물어보시는 거에 답변 드렸던 것 뿐이야.”
강지헌은 얼른 말을 돌렸다.
군 동료들에게까지 자신이 누구의 자손인지 비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강운예의 증손자라는게 알려질까봐 두려운게 아니라,
계몽 전쟁 당시 외세를 끌어들여 반란을 주도했던 강원의 손자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 그것이 너무나 두렵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타고 다가왔다.
영록과 친위 군경여단 성시우 대위였다.
“그러고보니 다시 만났는데도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요. 이렇게 살아서 다시 만나 기쁩니다, 강중사님.”
영록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처럼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어둠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아까 흥원공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마루한의 표정은 알수없는 분노로 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마치 흥원공녀가 당한 일을 제 일처럼 여기는 듯이 말이다.
오후 6시, 대월국 흥원번 흥원성 일대 율도군 주둔지
오늘 아침 흥원으로 뜻밖의 손님들이 도착했다.
명천백 피호석을 포함한 반란의 핵심 번주 10여명이 불과 수십여명의 부하들만을 대동한 채 백기를 들고 투항해 온 것이다.
현재 강운예의 위치는 율도군 수뇌부 외에 아무도 모르는 기밀사항이기에, 이들은 율도의 봉신이 되겠다며 흥원번으로 먼저 찾아올 수 밖에 없었다.
율도군들은 이들의 무기를 압수한 후 비어 있는 막사 하나를 내어주고 그 안에 머물도록 했다. 우선 강운예에게 보고한 후 그의 지시사항 대로 반란군 번주들을 어떻게 대우할지 결정할 모양이었다.
아침 일찍 강운예가 있는 금양장 일대 진지로 영매가 날아갔으나 저녁이 되도록 아직 답신이 오지 않았다.
오늘 천제국군들이 천제벽력포 일제 사격 이후 2개 사단 규모의 보병들을 금양장 가까이까지 전진배치시켰는데,
그 때문에 율도군도 진지에서 근접전을 준비하는 한편 남쪽과 북쪽에 있는 기병 군단들에게도 공격 대기 명령을 내리는 등 전황이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피호석과 반란군 번주들은 막사 안에서 율도군들이 가져다주는 식사와 다과등을 먹으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막사 밖에서 떠들석한 소리와 함께 무거운 짐을 끄는 수레바퀴 소리, 말울음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번주 중 하나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수천이 넘어 보이는 검은 갑주의 율도군들이 주둔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대부분이 4치 야포가 실린 군용 수레를 끌고 들어오고 있었고,
적에게서 노획한 것으로 보이는 무기와 갑주 같은 것들을 잔뜩 실은 마차들도 수십대 지나가고 있었다.
“두억시니의 갑주와 무기들이로군!”
번주 한 사람이 수레 위에 실려 있는 엄청난 크기의 흉갑과 도끼를 보고 중얼거렸다.
“율도군들이 두억시니 부대를 궤멸시키고 전리품을 실어 오는 모양이오.”
“그럼 벌써 서레번에서 천제와의 싸움이 끝났다는건가?”
“아니, 그 전에 먼저 대월국으로 들어온 군대가 있었지 않았소? 아무래도 그 놈들을 절단내고 오는 모양이오.”
“하아~ 천하무쌍이라는 두억시니조차도 율도군에게는 적수도 안되는 모양이군!”
포와 전리품을 실은 수레 뒤로 부상자들이 타고 있는 수레도 들어왔다.
그래도 두억시니들과 싸웠으니 전사상자가 많이 나왔겠지, 하는 번주들의 예상과는 달리,
검은색 영현가방에 담긴 전사자의 시체 수나 치료를 받기 위해 야전 병원으로 실려가는 부상자들의 수를 아무리 세어봐도 불과 백여명 정도 뿐이었다.
반면 수레에서 나오는 갑주와 무기들의 수를 대충 헤아려봐도 1, 2만 벌은 넘는 양.
이것만 봐도 분며 율도군이 압승을 거두었다는 게 확실해보였다.
“율도 태상국은 지금 이 곳에 없다고 하지 않았소?”
“아마 저 전투를 지휘한 건 율도군의 지휘관 중 하나일 것이오.”
“대체 우리와 율도가 무엇이 그리도 다르기에... 모든 종족들이 대적하기 힘들어하는 두억시니들을, 율도는 어떤 방식은도 싸우기에 이런 차이가 난단 말이오?”
곁에서 듣고 있던 피호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보이는 율도군 주둔지 막사 건물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바로 저것이 그들과 우리의 차이요.”
“무슨 말씀인지...?”
“국력은 물론 국가 체계 자체가 다르단 말이오. 보시오, 여러분들 중 전시에 이처럼 하나의 도시 같은 주둔지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또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분 계시오? 군사 국가라는 주신도 아직 이렇게는 하지 못할 것이오. 또 이번 전쟁 준비하며 병사들이 야전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대형 천막 마련하는 것도 힘들었던게 우리 실정 아니었소?”
번주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율도군 대부분은 이번 전쟁으로 급히 징집된 자들이 아닌 평상시에도 군복무를 하며 군사 훈련을 받는 상비군들이라 하오. 거기에 우리 대월국 같은 신분 계급 제도도 없으니 능력만 되면 종족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군의 요직에도 오를 수 있다고 하지요. 그러니 군의 사기가 높고 군사들도 모두 잘 싸울 수 밖에요.”
번주 하나가 비아냥 거리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태상국이 우리한테 걷어간 전쟁보상금을 전부 다 군에 투자한 모양이지요. 이번에는 또 우리한테 얼마나 내놓으라고 요구할런지, 원... 이렇게 아무 말도 기다리게 하는 걸 보면 우리를 더 애 타게 한 다음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내려는 수작이 아닌가 싶어서 불쾌하기만 합니다. 쯧!”
피호석이 그를 달래며 말했다.
“태상국이 여기 없다 하니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전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지요. 너무 애태우지 마고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도록 하지요. 그래도 율도군 주둔지로 들어와 우리 눈으로 직접 보니 더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지 않습니까?”
“무슨 확신 말입니까?”
“이번 전쟁도, 율도가 틀림없이 승리하게 될 거란 확신 말입니다.”
번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들 막사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그저 방금 주둔지 안으로 들어온 군사들 소리라고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
막사 출입문 밖에서 거친 고함 소리가 오고가더니,
쾅!
별안간 누군가 문을 발로 걷어차며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 더러운 반란자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문 앞에는 대월국 왕가의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는 훤칠하게 생긴 검은 머리의 도깨비 청년이 칼자루에 붉은색 보석이 박힌 장자검을 빼어들고 살기어린 표정으로 번주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월국의 7왕자,
아니, 이제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된 진효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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