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60화 (160/217)

〈 160화 〉 대동력 9,994년 6월 4일 (1)

* * *

­ 오전 3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서쪽 율도군 진지 부근 마을

새벽 미명이 찾아오지 않은 어둠 속으로, 조그마한 체구의 사람들이 율도군 진지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자그니들로 이루어진 천제국군 척후병들이었다.

아주 가벼워 보이는 가죽 갑주에 작은 활로 무장한 자그니들은 발걸음 소리를 죽여가며 서쪽으로 이동했다.

야간 어둠을 이용해 율도군 진지 가까이 이동했다가 아침해가 뜨는 즉시 천제벽력포에 의한 피해 현황 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이제 여름이 되어 새벽 4, 5시만 되도 아침해가 떠오르게 될 것이다.

자그니들은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율도군 진지 인근 마을까지 조심스레 진출했다.

금양장과 마찬가지로 이곳 마을 역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제국군이 도착하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자 주민들 모두 짐을 싸서 피난을 갔기 때문이다.

“마을에 율도군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른다. 다들 주변 똑바로 살피면서 이동해.”

자그니들은 비어있는 집들을 의심가득한 눈으로 두리번 거리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우물가에 당도했을 무렵이었다.

슉!

갑자기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나더니,

밤하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주황빛 불빛 하나가 우물가 주변 자그니들을 비추며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율도군의 명화시였다.

삐익~!

“천제국 놈들이다! 쏘아라!”

슉슉! 슈슈슉!!!

호각 부는 소리와 군사들의 함성 소리,

어둠 속 밤공기를 찢고 날아오는 화살소리들이 연이어 들리고,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화살에 맞은 자그니들이 하나 둘씩 땅바닥에 나뒹굴기 시작했다.

“퇴, 퇴각! 퇴각하라!”

살아남은 자그니들은 작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부리나케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죽을 힘을 다해 달려 마을 초입 즈음에 당도하였을 때,

다그닥, 다그닥!

십여명 가량의 율도군 기병들이 활을 겨눈 채 무서운 기세로 추격해 오고 있었다.

마치 토끼나 사슴같은 작은 동물을 사냥하는 것처럼.

­ 오전 10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동쪽 천체국군 진영

대사마 주진경의 감독 하에 대규모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진영 주변은 물론 천제벽력포가 위치한 언덕 주변으로도 거마창 등 대기병 장애물은 물론 구덩이와 함정 등이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천제국군 역시 지금까지 계속 산발적인 기습을 감행한 병력들 외에도 2개 군단 규모의 율도군 기병들이 남과 북으로 흩어져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강운예가 금양장 서쪽 언덕에 진지를 구축한 채 천제벽력포를 맞아가며 버티고 있는 이유도 자신들을 기병들로 하여금 남과 북으로 포위하려는 계략이라는 것 역시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적의 포위에 대비하면서, 화력으로 적의 정면을 돌파하는 수밖에.’

주진경은 진영 뒤편 언덕 위에 배치한 천제벽력포를 바라보았다.

어제까지 천제벽력포의 포탄과 화약을 절반 넘게 사용한 상태.

후방에서 이송 중인 물자들을 서둘러 본진으로 옮기게 하고 본국에도 추가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영매를 날려 보냈으니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지만,

전쟁이 장기화된다면 역시 포탄과 화약 보급이 가장 큰 문제가 될 것이 뻔했다.

화약이 만들어지기까지 보통 1, 2년의 시간이 걸린다.

천제국 내 유황 광산을 보유한 덕에 화약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긴 했지만, 제작 공정을 단축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대월국 원정으로 나라 안의 모든 화약들을 긁어 모아 왔는데 이렇게 또 추가적인 소요까지 생겨버린다면, 천제국 내 화약 보유량은 완전 바닥을 드러내게 될 판이었다.

그만큼 천제벽력포에 들어가는 화약량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주진경이 추가 보급이 도착하기 전까지 천제벽력포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 논의하기 위해 포병지휘관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고 있을 때,

도깨비 전령 하나가 급히 그에게로 달려와 보고했다.

“대사마께 보고드립니다! 오늘 새벽 율도군 진지를 정찰하러간 척후병들 모두 아직까지 복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령의 말에 주진경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일부러 체구가 작은 자그니들을 골라 보낸 것이었건만... 그 마을에 율도군이 미리 매복하고 있었던건가...?”

율도군 진지의 피해 규모를 명확히 알 수 없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주진경은 잠시후 천제벽력포를 쏠 때 우선 그 마을부터 초토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령의 보고가 계속되었다.

“11군단 소속 무장 이곽이 보내온 소식입니다. 어젯밤 우리 진영 인근에서 마루한과 함께 있던 대월국 무사들을 모조리 잡았다고 합니다!”

“그럼 마루한은? 마루한은 어찌 되었다고 하느냐?”

“유감스럽게도 마루한은 전날 그들과 헤어져 서쪽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주진경의 얼굴에 불만스러움이 역력했다.

“서쪽이라면 율도 태상국이 있는 곳으로 가는 모양이군. 이곽에게 마루한이 율도 태상국에게 합류하기 전 반드시 생포하라 전하라. 안 그럼 천제 성하께서 크게 진노하실거라 이르고.”

“네, 대사마. 하옵고...”

전령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우리 정보원들에게 포섭된 대월국 주민이 전해온 소식이 있사온데... 흥원 인근에서 전초기지를 점령하고 대기하고 있던 11군단장 동금이... 잔여 병력들을 이끌고 율도군의 포위를 뚫고 나가려다가 모두 전멸당했다고 합니다!”

“뭐? 전멸? 아니, 동금이 천제 성하의 명을 어기고 전초기지에서 나왔다고?”

주진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전령을 무섭게 쏘아보며 물었다.

“그곳 주민들이 듣기로 11군단은 율도군에 완전 포위 당한 상태였던 데다가 보급품마저 모두 떨어져 병력 대부분이 아사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죽은 이의 시체까지 먹었다는...”

두억시니들은 다른 종족의 인육은 먹어도 같은 두억시니의 인육은 먹지 않는다.

싸움에서 패한 적의 목이나 시체를 걸어놓고 자랑은 해도 같은 종족끼리는 절대 먹지 않는데,

이런 보고가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11군단 전체가 그동안 얼마나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군단장은...? 동금은 전사했다고 하는가?”

“군단장에 대한 소식은 아직 전해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 확인되는대로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전령은 군례를 올리고 자리를 떴다.

주진경은 멀리 떨어져 있는 천제의 수레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두억시니들을 경시한다지만 1개 군단 병력을 이렇게 낭비하다니...”

점점 줄어가는 전투 병력,

그보다 더 빨리 소진되고 있는 포탄과 화약,

좀처럼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율도군의 2개 기병 군단,

천제벽력포의 어마어마한 화력 앞에서도 절대 물러나지 않고 태산처럼 버티고 있는 진지 안의 율도군들...

갑자기 주진경의 마음 속에, 만약 이번 전쟁에서 패전한다면 철수로만이라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을까? 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오고 있었다.

­ 오후 1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북쪽 일대

이곽이 이끄는 두억시니 전사들은 구천락과 함께 마루한 추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보시오! 혹시 이 부근에 말을 탄 율도군들이 지나가지 않았소?”

“그들 중 화려한 갑주를 입은 어린 소년이 같이 있는 걸 보지 못했소?”

“우리를 도와준다면 답례로 금화를 드리리다. 하지만 거짓을 고한다면... 저 두억시니들의 저녁식사 꺼리가 될 수도 있으니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요.”

구천락과 성산번의 도깨비들은 이 부근에 사는 도깨비 주민들을 설득해 정보를 모았다.

마침 누군가가 어린 소년 무사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하는 수십여명의 율도군을 보았다는 말을 하게 되고,

이곽과 두억시니들은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마루한 추격에 나섰다.

“말로 사람 설득하는 재주가 좋군! 이리도 빨리 알아내다니!”

이곽도 이제 구천락과 그의 도깨비들을 신뢰하게 되었는지,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제법 살가운 투로 말을 걸어왔다.

“원래 정보를 모으고 분석해서 보고하는 게 내 주된 일이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외다.”

“이제 자네들은 확실히 우리의 친구다! 난 자네들을 확실히 믿는다! 하하하!”

“말이라도 고맙소. 어쨌든 힘을 합쳐 꼭 마루한을 우리 손으로 잡아 봅시다.”

“아무렴. 꼭 우리 손으로 잡아야지! 그럼 수고한 답례로!”

이곽은 구천락의 어깨를 다정하게 잡고는 몸을 뒤로 돌렸다.

“자네와 자네의 도깨비들, 이따 쉬는 시간에 저 년을 마음껏 가지고 놀도록 해! 어젯밤은 우리 전사들이 저 년 가지고 원없이 놀았으니 오늘은 이제 친구들 차례다!”

그는 뒤에 있는 진미령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킬킬 웃었다.

그녀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로 목에 개줄처럼 밧줄에 걸려 두억시니에게 끌려오고 있었다.

두 손은 굵은 쇠사슬로 칭칭 묶여 있었고, 창백하리만큼 새하얀 몸 여기저기에는 온통 시퍼런 멍자국이 나 있었다.

얼마 전까지 두억시니들에게 범해졌던 것일까, 그녀의 엉덩이와 등에는 아직도 흙과 모래가 잔뜩 묻어있었고,

고통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다리 사이로는 굳어버린 핏물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슬픔과 절망으로 완전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며 세상 무서울 것 하나 없다는 듯 호기를 부렸지만,

전장에서 맞딱뜨린 천제국 두억시니들의 강맹한 전투력은 그녀의 모든 의지를 꺽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손도 하나 못써 보고 어떻게 당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자신과 흥원번 무사들을 완벽하게 힘으로 눌러버린 두억시니들의 과격함과 잔혹성 앞에서,

진미령은 자신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절실히 깨닫고,

그대로 이성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녀 역시 두억시니에게서 나온 도깨비,

싸움에서 지면 이긴 자의 것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게 두억시니들에게 붙잡혀 밤새 윤간당하고,

함께 온 흥원번 무사들이 두억시니들에게 잡아 먹히는 걸 지켜보면서,

자신이 못나서 진 것이고 자신이 힘이 없어 이런 꼴을 당하는 거라며

점점 정신을 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엉덩이를 주무르는 천박한 두억시니의 손길에도 저항할 의지는 커녕,

힘없이 고개를 떨군 채 울먹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같은 도깨비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를 바라보는 구천락의 눈빛에 측은함이 묻어 있었다.

“뭐... 그럴 시간이 있겠소? 마루한을 따라잡으려면 쉬어갈 여유 같은 건 없을텐데?”

“이따 보면 알겠지. 아무튼 기대하라구. 너희 도깨비들 보다 네다섯 배는 더 두껍고 커다란 우리 전사들의 거시기 덕분에 저년 거기가 엄청 헐렁헐렁 해졌을 거 같지만 귀족이라 그런지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아주... 크크크~ 아, 그런데 어제, 저년이 대월국 왕가와 친척 관계라고 했었지?”

“그렇소. 흥원공 일가는 대월국왕의 친척들이오. 이번 전쟁에서도 국왕파에 가담했었고.”

“어쩐지 보통년은 아닌거 같더라니~ 나중 저년의 머리는 내 장식장에 기념으로 걸어놔야겠다. 크크크크.”

이곽은 진미령을 돌아보며 잔혹하게 웃었다.

­ 오후 2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북쪽 일대

천제국군 기병들을 피해 우회로를 택해 이동하던 영록과 용마로 소장의 율도군 무사들은,

북쪽에서 들려오는 급한 말발굽 소리에 잠시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나무 위에 올라가 소리나는 곳을 지켜보던 무사가 밑으로 내려오며 말했다.

“검은 갑주를 입은 것으로 보아 우리군입니다. 보이는 건 단 두 명입니다.”

용마로 소장은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이었다.

“전령도 셋 이상 같이 다니는데 두 명 뿐이라고? 적이 우리군의 갑주를 입은 것일수도 있으니 계속 지켜볼 수 있도록.”

잠시 후 검은 갑주를 입은 율도군들이 그들 있는 곳 가까이로 다가오고,

그제서야 모두들 그들이 흥원공녀를 따라갔던 강지헌과 115 기병 여단 무사라는 걸 알아보았다.

휘익~!

수풀 사이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리고, 강지헌과 무사가 그 소리를 듣고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돌아보니 숲속에서 검은 갑주의 율도군 무사들이 그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오, 미한이시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강지헌과 무사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수풀 속으로 말을 몰고 들어왔다.

용마로 소장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공녀는 어떻게 하고 여기까지 온건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건가?”

그의 물음에 강지헌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흥원공녀는 어젯밤...”

그는 차분하게 어젯밤 있었던 일에 대해 부군단장에게 소상히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용마로 소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애초부터 무모한 일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본인이 자초한 일이니... 이제 두 사람은 우리와 함께 대원수 기하의 본대가 있는 곳으로 가도록 한다. 소속부대가 있는 흥원으로 가는 건 그 후 귀관들의 재량에 맡기도록 하지. 자, 그럼 모두 다시 이동 준비를...”

“잠시만요!”

용마로 소장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 누군가 그의 말을 끊고 나섰다.

부군단장의 말을 자르는 외침에, 무사들 모두 놀라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영록이 알 수 없는 분노를 내뿜으며 말을 몰아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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