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대동력 9,994년 6월 3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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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북쪽 일대
금양장 너머 율도군 진지를 향해 회군하던 용마로 소장의 철기병들은
전방으로 정찰을 보냈던 무사들의 신호로 모두 말을 멈추고 그 자리에 대기 중인 상태였다.
앞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정찰을 나간 무사들이 급히 말을 달려 돌아왔다.
“전방에 붉은 갑주를 입은 천제국 기병들이 있습니다. 수는 대략 200 정도입니다.”
용마로 소장은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놈들이 유송천을 너머 도하 해서 진지를 구축했다더니, 기병들이 이 근처까지 진출해있던 모양이구나.”
“어찌할까요? 그냥 강행 돌파할까요?”
용마로 소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루한께서 함께 계신다. 위험을 무릅쓸 필요 없다.”
용마로 소장은 무사들을 몇 명을 다시 서쪽으로 보내 천제국 기병들의 동향을 살피는 한편,
영록과 나머지 병력들을 데리고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천제국군들이 있는 곳을 피해 최대한 우회해서 돌아가려는 계획이었다.
오후 4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동쪽 천제국군 진영
펑! 펑! 펑! 펑!
천제벽력포의 포탄들이 금양장의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 10리 밖에 있는 율도군 진지를 강타하고 있었다.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검은 구름이 율도군 진지 전체을 휘감았고, 폭발의 소용돌이에 하늘 높이 튀어 오른 철조망 등 장애물들이 다시 땅 위로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천제를 위해 준비된 호화로운 관망대에서 그 모습을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던 정선교는 깔깔 거리며 웃었다.
“하하하, 강운예 이놈! 어떠냐, 이걸 맞고도 버틸 수 있겠느냐? 어서 빨리 꽁지 빠지게 도망쳐 보거라! 하하하!”
정선교의 곁에 있던 주진경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곳은 적의 진지 최일선일 뿐이며, 그 너머로는 포를 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도 저 정도 위력이라면 율도군도 철수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주진경은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서 포병 지휘관을 불렀다.
“그래도 우려와는 달리 적진지에 많이 떨어진 모양인데, 적의 피해는 어느 정도일 것으로 예상하는가?”
“아무리 참호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더라도 천제벽력포의 위력이라면 포탄이 떨어진 곳의 병력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온데...”
포병 지휘관이 주진경의 귀에 대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가져온 화약과 포탄의 절반을 모두 사용하였습니다.”
“벌써?”
그렇지 않아도 아침부터 각 포당 10여 발씩, 거의 200여 발이 넘는 포탄을 율도군 진지에 쏟아붓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전쟁이 장기화 되었을 때 사용할 화약들이 부족하게 될 판이었다.
주진경은 급히 천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성하, 오늘 포격은 여기서 멈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율도군 진지를 뒤덮은 검은 구름을 보며 즐거워하던 정선교가 불쾌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왜? 놈들이 도망갈 때까지 쏴버리라고 하지.”
“화약과 포탄을 너무 많이 소진했다고 합니다. 적의 피해 현황을 확인한 후 다시 포격을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정선교가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정찰병들을 앞으로 추진해서 적의 피해 현황 확인해보고 오라고 해! 그럼 난 수레 안에서 쉬고 있을 테니 언제 다시 포격을 시작할지 준비하면 보고하도록 하고!”
정선교는 가마 위에 편히 앉아 허벅지를 긁으며 자신의 수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오후 5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서쪽 율도군 진지 후방
“대원수 기하, 천제국군의 포격이 모두 끝났습니다.”
전속부관의 보고에 강운예가 귀에 끼고 있던 솜뭉치를 빼며 말했다.
“정말 엄청난 폭발음이군. 귀를 틀어막고 있어도 이렇게 크게 들릴 정도니.”
“그러게 말입니다, 기하.”
강운예는 진지를 구축해놓은 야산의 뒤편에 설치한 군막에 앉아 결제서류들을 살피며 포격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강운예 뿐 아니라 이곳에 같이 온 4보병 사단 병력 대부분도 포격을 피해 야산 뒤편으로 대피해 있었다.
진지에 남아 있는 이들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관측소의 병력과 일부 경계 병력들 뿐이었다.
“이제 놈들이 우리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확인하러 오겠군. 교통호를 통해 병력들을 신속하게 투입시켜서 우리가 계속 진지에 남아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라고 해. 참, 1선 진지에서 부상자 옮기는 시늉도 하라고 하고.”
“네, 기하!”
전속부관이 군막 밖으로 나가고, 이어서 군사들이 교통호를 통해 빠르게 뛰어가느라 갑주와 무기들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통호를 미리 야산 뒤에까지 파 놓았기에 천제국군은 율도군이 포격 이전 야산 뒤로 모두 피해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리도 워낙 멀리 떨어져 있으니 교통호를 통해 오가는 병력들의 모습이 보일 리 만무했으니 말이다.
이제 남과 북으로 흩어져있던 1군단과 3군단 기병 전력들도 금양장이 있는 곳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중이었다.
강운예가 구상한 결정적 전투가 이제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후 8시, 대월국 서래번 북쪽 일대
이제 여름이 되면서 해가 길어져 있었다. 8시가 되었지만 남아 있는 햇빛에 달빛별빛까지 더해져 사방을 식별하는 데 문제없을 정도였다.
흥원공녀 진미령이 이끄는 10여 명의 도깨비 무사들과 강지헌 등 세 명의 율도군 무사들은 천제국군의 진영이 있는 금양장 동쪽을 향해 조심스레 나아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멀리서 활만 쏘고 달아나지 않겠소. 우리는 적진으로 달려가 반드시 천제국 놈들의 목을 취해서 올 것이니, 그대들은 내키지 않으면 뒤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이건 우리의 싸움이니 말이오.”
진미령은 율도 무사들에게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강지헌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적진에 다가갈 때 조심하십시오. 아까 놈들이 포를 쏘는 소리를 들으셨지 않습니까? 분명 전투를 준비하는 중일 테니 경계 상태도 전과 다르게 삼엄해졌을 것입니다.”
“알고 있소.”
진미령은 오직 복수만 생각하는 듯, 자신이 하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일인지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흥원공녀를 죽이라는 명을 받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그녀는 강지헌이 지켜봐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래도 공녀가 바보같이 적진으로 돌격하다가 죽는 일은 없어야겠지. 침투하기 좋은 곳을 찾아서 알려주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강지헌이 그녀에게 제의했다.
“그럼 우리가 미리 앞서 가서 적진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니 저희 둘만 다녀오도록 하지요.”
그의 말에 진미령도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부탁하겠소.”
강지헌은 진미령을 감시할 목적으로 무사 한 명을 일행 중에 남겨둔 채, 다른 무사 한 명과 함께 천제국군 진영이 있는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오후 12시, 대월국 서래번 북쪽 일대
예상대로 금양장 동쪽에 있는 천제국군 진영은 그 어느 때보다 경계가 강화되어 있었다.
진영 주변으로 기병들이 수시로 순찰을 돌고 있어서 강지헌조차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 정도였다.
“이대로 멋모르고 들이쳤다가는 공녀와 흥원 도깨비 무사들 모두 개죽음을 면치 못하겠군!”
함께 간 무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까 포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천제국 놈들이 곧 진군할 모양인 것 같아.”
“강 중사, 부군단장님이 우리군이 놈들을 여기서 포위해 섬멸해버릴거라 하셨다면서?”
“정확한 작전 계획은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럼 차라리 전투 후에 도망치는 천제국놈들 패잔병 사냥이나 할 것이지 왜 지금부터 복수니 뭐니 하면서 목숨을 거는 건지 원... 아무리 부모 원수를 갚는다지만 천제국군 전체를 대상으로 복수를 하는 건 말도 안 되잖아? 그렇다고 공녀 그 년이 천제를 직접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야.”
“원래 복수에 눈이 멀면 이성적인 생각을 못한다고 하지. 도깨비들은 특히 더하다고 하고.”
“하긴, 도깨비들도 두억시니에게서 나온 놈들이니 그 피가 어디 안 가는 거겠지.”
두 사람은 더 이상 침투할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일행들과 합류하기 위해 다시 북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일행들과 합류하기로 한 곳에 도착했을 때,
강지헌은 문득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잠시 정지!”
강지헌은 활과 화살을 빼어 들고 말 아래로 뛰어내렸다.
“무슨 일인가?”
동료 무사도 군도를 빼어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얼마쯤 갔을 때,
땅바닥에 축축이 젖어있는 붉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것도 여러 곳에서, 상당한 양의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피?”
“이건 도깨비의 피야. 그렇다면...”
강지헌이 자세를 낮추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시체나 떨어진 물건 같은 건 보이지 않은데?”
“갑옷이나 무기 같은 거라면 전리품으로 챙겼을 것이고, 말이나 시체라면 식량으로 쓰기 위해 모두 쓸어갔을지도.”
“아니, 말은 몰라도 시체를 무슨 식량으로...”
무사가 하던 말을 멈추고 어두운 낯빛으로 물었다.
“설마 두억시니들?”
“두억시니라면 제가 잡은 포로의 인육을 먹기 좋아하는 놈들이니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지.”
“그럼 우리 동료와 공녀도 두억시니들에게 당했단 말인가?”
그 말에 강지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 있는 데로 달려가며 말했다.
“핏자국 옆에 남겨진 두억시니의 발자국들이 동쪽으로 향하고 있어. 일단 그 쪽으로 가보자!”
“그 친구 구하려고?”
“살아있다면 구해야지. 그리고 공녀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죽었다면 어떻게 죽었는지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잖아?”
두 사람은 말에 올라 두억시니의 커다란 발자국이 이어지는 동쪽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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