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대동력 9,994년 6월 2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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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율도 서부 육군 2군 206 경비 여단 1대대 담당 국경지대
해가 뜬 이후부터 최기 중령은 최전방 철책에서 망원경으로 주나라 국경지대를 살피는 중이었다.
보이는 바로 판단되는 주나라의 군세는 대략 3만 정도.
다른 국경에도 그와 비슷한 수의 병력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연락도 시시각각 들어오고 있었다.
주나라 군사들은 국경선을 완전히 넘지는 않고 다만 율도의 토성이 바라보이는 곳까지 진출해 있었다. 군막을 설치하거나 야영하려는 준비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언제든 이동하려는 듯 했다.
‘일단 무력시위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주나라도 황자가 국경을 넘는 데 실패하고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파림과 달리 주나라는 우리 율도와 섣불리 전쟁을 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랬다가는 우리가 초원길이며 바닷길 모두 봉쇄해 버릴 텐데, 아무리 내수시장이 충분한 주나라라도 무역이 단절되고 제후국들의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견디기 어려워질 걸 잘 알 테니까.’
해외 대사관 주재 무관으로 오래 근무한 최기 중령은 국제 사정에 대해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게다가 저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주나라가 최대한의 전력으로 우리를 공격해봤자 아무런 승산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 서부 육군 2군 병력만으로도 적의 공격은 충분히 막아내는 건 물론, 동주, 위, 연, 남주(율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주나라의 제후국들) 정도는 순식간에 장악할 수 있다는 것도.’
이미 2군 사령관 을불군 대장이 2군 예하 8, 9, 10. 11 군단에 전투 준비 태세 명령을 하달하고 전 병력을 국경 지대로 이동시키는 중이었다.
4개 군단 병력이라면 12만명이 넘는 군세. 주나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전력이었다.
최기 중령은 토성 위 진지에 배치를 끝마친 1대대 병력들의 전투 상태를 점검하는 한편, 지나치게 긴장하지 말라며 군사들을 다독여 주었다.
오전 9시, 율도 중부 지역 모처, 흑영단 비밀 안전 가옥
햇볕이 들지 않는 지하실에 촛불 몇 개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제법 넓은 지하실에는 의자 몇 개와 책상 하나, 이렇게 단촐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의자 하나에 누군가 두 손이 포박된 채로 앉아 있었다.
공물론자 김사미였다.
강용영 무사들에게 모든 동료를 잃은 후 정신없이 도망치던 김사미와 그 일당들은 그 주변을 순찰하던 관리들에게 곧바로 체포되었다.
옷에 묻은 피를 수상히 여긴 관리들이 이를 추긍했으나 그와 그의 일당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 그가 체포된 곳 인근에서 대원수부 친위여단 소속 율도군 무사들이 주나라 무사 등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과 부상자들을 인근 부대로 인계했다는 소식과 가출했다는 큰 영애가 누군가에게 쫓기다가 초원길 인근 5군단 부대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관리들은 자신들이 체포한 이들이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을 거라 판단하고 곧장 대원수부에 기별했고,
흑영단원들이 와서 이들을 인계받아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김사미와 일당들은 흑영단에 의해 고문과 함께 취조를 당했다.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 모두 흑영단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이유로 율도로 들어왔는지 소상히 털어 놓았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김사미 혼자 묶여 있는 방으로 얼굴을 검은 복면으로 가린 흑영단원이 들어왔다.
“어때, 잠은 좀 자셨소?”
흑영단원이 책상 위에 쟁반 하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쟁반은 보자기로 덮여 있었는데, 따뜻한 밥과 국 냄새가 솔솔 풍겨 오고 있었다.
“오랫만에... 아주 잘 잤습니다.”
“그러실 테지, 취조받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테니.”
김사미는 상당히 고분고분해진 상태였다.
흑영단원 그의 묶은 손을 풀어주고는 쟁반을 덮은 보자기를 벗겼다.
“아침 가지고 왔소. 드시오.”
“아, 감사합니다...!”
김사미는 수저를 들고 그가 가져온 밥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드시오. 체하겠소. 국물도 좀 떠 먹어가며 드시오.”
“예, 예.”
흑영단원은 그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김사미가 밥을 국에 말아 싹싹 다 긁어먹자, 흑영단원은 그제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김사미씨가 말한 내용에 모두 거짓이 없더군. 좋은 정보 감사하오.”
“아, 아닙니다. 사실로 밝혀졌으니 다행이군요.”
“그래서 우리 율도도 그대에게 선처를 할까 생각 중이오.”
“선처라면... 형량을 낮춰주신단 말씀입니까?”
“형량?”
“네, 아무래도 영애를 납치한 일로 재판을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복면 속에서 피식, 나지막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율도는 법이 정한 일에 절대 관대한 나라가 아니지. 특히 태상국 기하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라면 더욱 그러하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허나 늘 예외란 것이 있는 법 아니겠소?”
“예외... 라구요?”
“그렇소, 예외. 만일 김사미씨가 계속 지금과 같이 우리에게 잘 협조해주신다면 그대가 살던 진나라로 돌려보내 줄 수도 있는데, 김사미씨는 어떻게 생각하오?”
율도의 감옥에서 벌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냥 돌려 보내주겠다고?
김사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간단하오. 그대는 진나라로 돌아가서 원래 하던 그 공물론 혁명을 계속 이어가시오. 그리고.”
흑영단원이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우리가 잡은 주나라 황자도 내어 주겠소. 같이 데려가서 그대들의 혁명에 보태 쓰시오.”
“네? 황자를요?”
김사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흑영단원의 복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황자를 잡아 인질로 삼고 주나라 황실을 위협해 혁명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하는 게 그대들의 원래 계획이라고 하지 않았소?”
“네, 그렇긴 합니다만, 왜...?”
“율도가 왜 그대들을 도와주냐, 이 말이요?”
“네, 그렇습니다.”
“그냥 필요하기 때문에, 라고만 알아두시오. 나도 여기까지 밖에 모르니.”
“아, 예...”
“이따가 다른 사람들이 와서 숙소를 옮겨 줄 것이오, 그때까지 불편하겠지만 여기서 기다리시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소.”
흑영단원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간 후, 김사미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비어있는 밥그릇, 국그릇 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4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동쪽 40리 부근 유송천 일대
10여 개의 가교가 설치되고, 천제국군의 도하가 시작되었다.
유송천 건너에서 포를 쏘며 견제하던 율도군들은 가교가 놓이기 시작하자 곧장 후방으로 철수하고 없었다.
먼저 기병들이 먼저 가교를 건너 앞에 보이는 야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천제벽력포의 포진을 잡을 곳을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기병들에 이어 주변을 경계할 병력들이 도하를 마치자,
마침내 천제벽력포가 하천을 건너기 시작했다.
천제벽력포는 그 크기와 무게로 인해 가교로 옮길 수가 없어서 임시로 만든 뗏목에 싣고 이를 반대쪽에서 밧줄로 끌어서 옮기게 되었다.
천제벽력포와 함께 이들을 보호하는 두억시니 병력들도 동시에 가교를 건넜다.
천제국군들이 도하하는 와중에도 사방에서 소규모 율도군들이 수시로 출몰하며 멀리서 활과 총을 쏘고 달아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율도군의 대규모 기습은 없었다.
“통상 이처럼 하천을 건널 때를 노려 기습하는 게 병법의 기본이거늘... 율도 태상국이 이를 모를 리 없는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도하과정을 지켜보던 창정구가 대사마 주진경에게 말했다.
덩치가 큰 두억시니 창정구는 그냥 서 있는 상태였고, 도깨비 주진경은 말에 올라 있는 중이었다.
말을 타고 있음에도 창정구는 주진경을 살짝 내려다보고 말해야 할 정도로 두 사람의 덩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나도 적이 다리를 끊고 소수의 병력만을 배치한 걸 보고 이상하다 여기긴 했소만... 원래는 우리가 도하할 때를 노려 기습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미리 방비도 든든히 했건만 놈들은 고작 밤에 하는 것처럼 살짝 살짝 건드리고 가는 것만 계속하고 있고, 뭔가 더 불안해지고 있소.”
“우리가 저 야산을 점령하고 천제벽력포를 쏘아대면 절대 버틸 수 없다는 걸 저들도 알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는 걸 보면, 놈들이 우리를 일부러 끌어들이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끌어들인다고요?”
“네, 이미 서래번 남과 북에서 적의 기병들이 대기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기병 전력만 믿고 그랬다고 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더 많은 것 같소.”
주진경이 야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성하의 말씀대로 천제벽력포 배치에만 집중하도록 합시다. 포진이 완성되면 율도군들을 흥원까지 몰아내는 건 시간 문제일테니.”
“네, 알겠습니다.”
창정구는 씁쓸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하지만 역시 오랜 전장 경험을 통해 다져진 그의 촉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아직 천제국군들이 발견하지 못했지만, 북부 산악지대를 우회한 강운예의 친위여단 기병들이 이미 천제국군의 후방 가까이까지 접근해 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도하를 마치는 즉시, 이제 그들은 4면으로 완전히 포위 될 운명이었다.
오후 5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동쪽 40리 부근 유송천 북쪽 일대
마루한을 뒤쫓는 이곽과 전사들은 계속해서 율도군과 술래잡기하듯 추격을 이어가고 있었다.
마루한을 보호하고 있는 율도군들도 이제 확실히 천제국 두억시니들이 자신들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들은 이곽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급히 말을 달려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곽이 다시 마루한을 찾아 나서려 할 때,
본대에서 이번 일을 도와줄 자들을 합류시키겠다는 연락이 왔다.
“마루한 찾는 걸 도와준다니, 혹시 마루한의 얼굴이라도 아는 놈을 보낸다는 건가?”
“그게 아니면 냄새라도 맡아 따라가게 개라고 몇 마리 보내주는 걸지도 모르지요. 크크크.”
얼마 안 있어 이곽과 전사들이 야영하고 있는 것으로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말을 탄 도깨비들이었는데, 천제국의 군포나 갑주를 입은 자들은 아니었다.
“너희가 본대에서 보낸 자들인가? 보아하니 대월국 도깨비들인 것 같은데?”
이곽이 말에서 내리는 도깨비들에게 다가가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도깨비들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장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그렇소. 우리는 대월국 성산백 각하 휘하의 사람들이오. 내 이름은 구천락이라고 하오.”
구천락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곽은 코웃음을 치며 그 손을 잡지 않고 돌아서 버렸다.
“성산백이라면 반란군놈들 아닌가? 지난번 개골령에서 우리 군에 박살 난?”
“그렇소. 하지만 대월국왕이 그대들의 손에 살해 되었는데 이제 양측이 더 싸울 이유가 어디 있겠소?”
“그래서 우리와 손을 잡으시겠다? 크크. 너희 도깨비 놈들은 전사로서의 명예도 모르는 모양이군. 수치스러운 줄 알아야지.”
구천락은 얼굴이 붉어지려는 걸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성산백 각하와 천제국이 이번 기회로 연을 맺었으니 우린 동맹이 아니겠소? 그러니 앞으로 잘해 봅시다, 우리.”
“동맹? 풋, 그래 동맹 친구. 자네와 자네 부하들이 우리를 어떻게 도울 수 있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 정말 개처럼 냄새라도 맡아 마루한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거란 말인가?”
“난 마루한을 알아볼 수 있소. 이미 본 적이 있으니까.”
마루한을 본 적이 있다는 말에, 이곽이 다시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너희가 작년에 마루한과 율도 영애를 성산으로 납치한 적이 있었다고 했지?”
“그렇소. 그 때 마루한을 직접 성산으로 모시고 온 것이 바로 나요. 대월국에 있는 이들 중 나보다 더 마루한의 얼굴을 정확히 아는 자는 드물 것이오.”
“그럼 마루한을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나?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알아볼 수 있냔 말이다.”
“얼굴 뿐 아니라 체구와 걸음걸이, 목소리와 말투까지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내 눈에 들어오게 된다면 반드시 알아보게 될 것이오.”
그의 말에 이곽은 송곳니를 드러내거 씨익 웃으며, 구천락의 어깨를 큼지막한 손으로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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