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55화 (155/217)

〈 155화 〉 대동력 9,994년 6월 1일 (2)

* * *

­ 오전 14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동쪽 40리 부근 유송천 일대

박윤수 중장에게 유송천 서쪽에 나가 있던 다른 부대로부터 적의 신무기(천제벽력포)가 모두 포진에서 내려와 전방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영매가 도착했다.

“공병들도 도착한 것 보니 곧 가교를 만들 모양이군. 그래도 너무 일찍 빠지면 놈들이 의심할 수 있으니...”

박윤수 중장은 각 포에 유송천 반대편을 향해 포를 두어 발포하라고 지시했다.

펑! 펑!

율도군이 쏜 포탄이 하천으로 떨어지면서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사거리 때문에 천제국군을 직접 위협하지는 못했다.

박윤수 중장은 망원경으로 천제국군들이 가교 설치 준비하는 걸 계속 관측하면서, 나머지 무사들에게 언제든 철수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지시했다.

­ 오후 2시, 대월국 서래번 금양장 서쪽 율도군 진지

금양장 서쪽 야산에 구축된 율도군의 진지는 현실 세계 과거에 있었던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때의 참호 진지와 매우 유사했다.

각 참호는 교통호로 연결되어 있었고 주요 진지는 위를 가릴 수 있는 유개호로 되어 있기도 했다.

그리고 진지로 향하는 주요 길목은 철조망과 장애물이 촘촘히 깔려 있어 현실 세계의 전차나 장갑차 같은 걸 가져오지 않는 이상 쉽게 뚫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만약 여기에 기관총 같은 것만 설치되었다면 정말 근현대 전쟁터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였다.

마침 강운예는 전장까지 따라온 군기소의 이교연 박사와 진지로 이루어진 야산의 맨 꼭대기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기하와 함께 이세계에서 가지고 온 그쪽 세계의 화약 말입니다, 대동에도 그것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이 있는지 열심히 찾고 있지만 아직 특별한 발견은 하지 못했습니다.”

강운예가 아쉬운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상박하차를 홀짝거렸다.

이제 점점 날이 더워지면서 뜨거운 커피보다는 시원한 음료를 찾게 되는 것이다.

“기관총을 보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겠군. 하긴, 그쪽 세상에서도 그 화약 만든 사람을 엄청난 위인으로 보거든. 인류사적으로 대단한 발명을 한 사람으로 말이야. 그 사람의 이름을 딴 세계적인 상도 있을 정도고.”

“대단한 발명품일테니 그만큼 만들기 어려울 테지만, 아무쪼록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기하를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도 자네를 믿고 있네. 이박사.”

“그러고보니 벌써 반년 가까이 지났군요. 기하와 함께 기하가 사셨던 이세계에 다녀왔을 때가 말입니다.”

이교연이 싱긋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대동 너머에 이런 세계가 존재하는구나, 정말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약 가능했다면 좀 더 그곳에 오래 머무르며 더 많은 것을 배워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나 역시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갈 수 있어 매우 기뻤네. 하지만 우리가 그곳에 있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대동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시간은 그보다 더 빨리 가고 있었지. 그곳에서의 1년이란 시간은 대동에서 23년의 시간과 같으니까.”

“세상이 다르면 시간의 흐름과 속도도 다를 수 있다는 거, 그때서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나도 그랬어. 미한이 1592년 임진왜란 쯤에 이곳 대동으로 넘어와 9,000년 넘는 시간을 보냈다고 내게 말했을 때 나 역시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지. 하지만 주나라 황제 황치우의 말이나 박성환이 남긴 기록을 보고 추론했을 때 실제 두 세계가 시간의 흐름에서 23년씩 차이가 난다는 걸 깨달았어. 만약 그런 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현실 세계로 가서 마음껏 시간을 보내고 왔다가는, 내 사랑하는 부인이 꼬부랑 할머니가 되고 우리 아이들도 중년의 나이가 되어 있었을지도 몰라.”

강운예는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듣자하니 큰 영애를 찾으셨다면서요?”

“응, 지금 백화로 데리고 가는 중이라 하네.”

예린에 대한 이야기에 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리고 주나라 황자 그 색... 아니, 주나라 황자도 오늘 새벽 국경에서 붙잡았다고 하더군.”

“다행입니다. 황자도 백화로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절대 안 되지! 백화는 물론, 두 번 다시 예린이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야지!”

살짝 성질을 낼 뻔했던 강운예는 시원한 상박하차를 쭉 들이키며 화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당분간 국경 일대에 구금해 놓을 거야. 황자가 잡히기 전 이상한 녀석들이 먼저 흑영단에 잡혀 들어왔거든.”

“이상한 놈들이요?”

“응, 공물론자들이라는 자들인데, 진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세력이라고 하지.”

“공물론이라... 과거 미한이 천하의 모든 만물은 공물이다, 라고 하셨던 대동사상에서 따온 사상 같은 것입니까?”

“비슷한데, 또 틀려. 그건 마치 내가 있던 세상에 있었던 공산주의라는 비틀린 사상과 닮아 있더라구.”

“공산주의요?”

“자네는 과학자라 사회 정치 분야에는 관심이 덜하겠지. 이건 이해하기 너무 어려울 테니 다음에 설명하도록 하고. 아무튼 흑영단이 이 공물론자들을 붙잡았는데, 취조해보니 주나라 황자가 귀국 도중 도망친 걸 알고 그 녀석을 진나라로 붙잡아가려 했다는 거야.”

“반란세력이 황자를요? 인질로 쓸 생각이었다 보군요?”

“아마 그랬겠지. 지금 주나라가 각 위성국에서 긁어모은 병력 중 5만을 진나라 보내 토벌 중이라 하니, 군사력으로 안 되면 인질이라도 잡아 주나라 황실을 위협하려는 계획이었겠지.”

강운예의 눈빛에서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공물론자 놈들과 이번에 잡은 황자를 잘 이용하면, 우리가 천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주나라를 꼼짝 목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우선 흑영단이 계속 놈들을 취조 중이니, 보고 내용 보면서 더 판단해 봐야겠지.”

“아무튼 황자도 찾았으니 큰 영애도 기뻐하겠군요.”

“예린이 기쁘게 하려고 황자 잡은 거 아니네! 4군단에 무단으로 침입한 죄, 내 딸을 데리고 내뺀 죄, 국경 지대에서 소란을 일으킨 죄 모두 그 죗값을 톡톡히 받아내려도 잡은 거지!”

강운예는 정국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손으로 이마 옆쪽을 지그시 눌렀다.

이교연은 괜한 말을 꺼냈다 싶어 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영록 마루한의 수련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요? 작년 쯤에 평연당에서 몇 번 뵈고 그 뒤로는 아직 한 번도 뵙지 못했군요. 이곳 전장에도 따라 나오셨다고 하는데, 기하께서 보시기에 언제쯤이면 영록 마루한께서 이세계로 돌아가도 될 만큼 성장하실 것 같습니까?”

강운예는 찻잔을 천천히 다 비우며 말했다.

“몇 년만 더 수련하면 돌아가서 건달 깡패 양아치들 상대하기에 충분한 실력을 갖출 것 같네.”

“그럼 꼭 10년을 수련하고 가지 않아도 되겠군요!”

“응, 10년이란 시간은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어. 그런데...”

그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내가 영록이 입장이었어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을거야.”

“여자친구를 찾기 위해서요?”

“응, 그리고 영록이가 자세하게 말은 안 했지만, 그 여자친구가 거기서 어떤 몹쓸 짓을 당했는지 모두 봤거든...”

당시 영록이를 따라 일월촌에 갔을 때,

강운예는 조폭들의 아지트에 남아있다가 그에게 피떡이 될 때까지 두들겨 맞았던 똘마니 녀석의 핸드폰을 보게 되었다.

원래는 200년만에 만져보는 핸드폰인지라 신기해서 이것저것 열어보고 만져보고 했는데,

그 안에 들어 있던 사진과 동영상들,

유민이 우성경찰서 지하에서 조폭들에게 고문당하고 윤간당하는 모습부터,

이곳 아지트에서 중년 여인(운용 엄마)과 함께 유린당하는 수많은 모습,

그리고 바로 어제 날짜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빨간색 두 줄이 그어진 임신테스트기,

마지막으로 알몸 상태로 꽁꽁 묶여 있는 영록 앞에서 범해지는 지는 그녀의 모습까지...

그 모든 것을 보았던 것이다.

“...여자친구를 구하기 위해 강해져서 돌아가는 건 좋은데, 만약 그렇게 되면 무조건 영록이는 복수심으로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네. 이미 그쪽 세상에서 몇 명을 총으로 쏴서 죽여 봤고 이곳 대동에서도 그랬다고는 하지만...”

강운예는 씁쓸한 눈빛으로 빈 잔을 조용히 내려다 보았다.

“그 아이는 돌아가서 그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살인귀로 만들어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았어. 이 전쟁에 보내면서 그런 점들을 꼭 배우고 느끼길 바라는 마음이었지.”

“그러셨군요... 그런데 전 사실 영록 마루한이 이세계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여자친구를 어떻게 찾을지 걱정되었습니다. 이세계도 대동만큼 넓은 세상일 텐데 말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지. 영록이가 돌아갈 때 여자친구를 찾기 위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알려 줄 거야.”

“그게 누구입니까, 기하?”

“그 세계에서 날 범죄자의 길에서 군인의 길로 이끌어 준 사람. 그 사람의 실력이라면 분명 아직 군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을 거야.”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강운예의 전속부관이 서류들을 한아름 가지고 올라왔다.

전장터에서도 그가 확인해야할 보고서나 처리해야 할 문건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거 이따가 볼 테니 여기 두고 가게. 바람불어 날아가지 않게 돌 같은 거 위에 다 올려놓고.”

전속부관은 그가 시키는 대로 대부분의 서류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편지 봉투 하나를 그에게 건냈다.

“대월국 7왕자와 작은 부인의 영애는 흥원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건 작은 부인의 영애께서 보낸 편지입니다.”

“예나가? 아빠한테 위문편지라도 보낸 건가?”

강운예가 웃는 얼굴로 딸의 편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예나 얘가... 쓸데 없는 소리를 하고 있군... 아무리 미래의 남편감을 도우려 한다지만 이건 아빠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일인데...”

강운예가 예나의 편지를 품에 넣으며 전속부관에게 말했다.

“7왕자는 흥원성에 있다고 했지? 경호도 우리 군이 맡고 있고.”

“네, 그렇습니다.”

“흥원에 있는 6사단장에 당분간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7왕자는 절대 흥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그가 서신이나 전령을 보내려 하면 반드시 사전에 몰래 내용 확인에서 내게 먼저 보고하라고 전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속부관은 경례를 한 뒤 곧장 야산 아래로 내려갔다.

­ 오후 9시, 율도 서부 육군 2군 206 경비 여단 1대대 담당 국경지대

오늘 새벽 체포란 주나라 황자 정국은 오전 군사령부 군경 여단 병력들과 도착한 2군 사령관 을불군 대장에게 인계 되었다.

“부임하자마자 큰 공을 세웠군! 앞으로도 기대하겠네, 하하하!”

을불군 대장은 최기 중령을 크게 칭찬한 뒤 황자와 무녀를 데리고 군사령부로 향했다.

그는 그제서야 한숨을 돌린 후 가족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고,

야간 경계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다시 토성 국경지대를 찾았다.

오늘 야간 경계를 담당하는 3중대장이 토성 아래까지 나와 대대장을 맞이했다.

“오늘 군사령관님도 오시고 많이 바쁘셨을 텐데, 들어가서 쉬시지요.”

“아닐세, 어제는 황자 잡는 준비 때문에 제대로 된 철책 순찰을 못 돌았으니, 오늘 마저 하고 들어가도록 하겠네.”

최기 중령은 3중대장과 함께 토성 위로 올라갔다.

“주나라 황자 체포 작전 때문에 저희 중대에서도 사상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 때문에 결원이 많아 경계 병력들의 쉬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당분간 야간 근무 인원들의 취침 시간을 2시간 더 보장해주도록 하게. 점심 식사도 따로 조리하게 할 테니 병력들이 잘 쉴 수 있도록 먼저 살펴줘.”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경계 근무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며 토성 위를 순찰하던 중,

서쪽 주나라 국경지대에서 갑자기 무수한 불빛들이 일렁이는게 눈에 들어왔다.

“대대장님, 저쪽에...!”

최기 중령도 3중대장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분명 주나라의 병력 이동이다! 봉화를 올리라하고 전 병력 기상시켜 진지에 투입시켜!”

“네, 대대장님!”

1대대 봉화대에서 두 개의 봉화대가 불을 밝혔다.

적 발견 신호였다.

“주나라가 우리와 전쟁을 벌이려는 걸까요?”

“아마 황자가 우리에게 잡힌 걸 알게 되어 저러는 걸지도. 지난번 무수막 고원에 있을 때에도 파림과의 전투 때문에 내가 제일 먼저 봉화를 올렸는데, 여기 서쪽 국경에서도 봉화를 올리게 될 줄은...”

최기 중령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에 차고 있던 군도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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