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대동력 9,994년 5월 43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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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시, 율도 서부 육군 2군 206 경비 여단 / 10군단 예하 8 보병 사단 관할 지역 일대
지난번 주나라 무사들에 의해 국경지역을 돌파당한 이후, 율도군 서부 육군 2군의 전부대는 모두 초긴장 상태였다.
2군 사령관 을불군 대장의 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주나라 무사들이 토성과 철조망 지대를 뛰어넘어가는 동안 제대로 저지하지 못한 206 경비 여단의 여단장은 보직해임 당했고, 책임 구역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은 물론 해당 부대 병사들까지 모두 ‘속죄 부대’ 라 불리는 44교도 사단으로 강제 전출당한 상태였다.
반대로 무수막 고원의 혹독한 환경에서 성실히 근무한 44교도 사단 병력 일부가 지위를 복권 받고 206 경비 여단으로 전입해 왔다.
그들 중 대부분은 지난 파림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들이었고,
마루한 경호 임무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출당했던 최기 역시 중령으로 진급해 206경비 여단 1대대 (주나라 무사들에게 돌파당한 부대) 대대장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는 명을 받자마자 곧바로 짐을 싸서 새로 부임하게 될 부대를 향해 밤새 말을 달렸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마침내 무수막 고원에서 나왔고 새 부대의 대대장으로 가게 되었으니, 이제 다시 전처럼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다.’ 라는 편지조차 쓸 겨를도 없이 말이다.
44교도 사단은 징계를 받은 군인들이 모여 있는 부대이니만큼 무관, 사관이라 할지라도 다른 부대처럼 관사에서 가족과 함께 함께 살 수 없었다. 심지어 잠자고 생활하는 공간마저 병사들과 같은 곳을 사용해야만 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컸지만, 남자로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기쁠 수 밖에 없었다.
소속 부대에 도착한 최기는 곧장 대대 참모들과 함께 새로 구성된 대대원들과 무기, 장비 등을 살펴보는 한편,
주나라 무사들이 돌파해 들어온 국경 방어지대로 달려가 현장을 점검해 보았다.
“보시는 바와 같이 그들이 넘어온 곳은 토성에서 철책까지 말을 타고 도약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철책을 지금보다 앞으로 추진해 재설치해야 할 것 같습니다.”
토성에 올라 철조망 지대를 일일이 점검하던 최기 중령은 대대 참모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네. 이 토성의 경사나 철책의 높이로는 일반적인 군마와 승마술을 지닌 무사가 절대 뛰어넘을 수 없어. 주나라 황실이나 제후국 상층부만이 가지고 있을 명마를 타고 다니는 놈들이었을테니 철책이 앞에 있든 뒤에 있든 막기 힘들었을 것이야. 게다가 승마술이나 무예 솜씨 역시 절륜했을 테고.”
최기가 돌아서서 율도 땅이 내려다보이는 동쪽을 가리켰다.
“우리에게 시급한 당면과제는 율도 안으로 함부로 들어온 놈들이 다시 그들 나라로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놈들이 다시 이곳으로 올지 모르니 철저히 대비해 두어야 한다.”
최기가 참모들을 데리고 토성 아래로 걸어내려오며 말을 이었다.
“당분간 주나라가 있는 서쪽 외에도 초원길 방향에서 오는 길들을 향해서도 경계를 취할 수 있도록 진지를 새로 만들고 병력들을 배치해야 한다. 마름쇠(뾰족한 네 개의 쇠붙이가 달린 대기병용 장애물)를 최대한 확보해 요소요소에 뿌려 놓을 수 있도록 하고, 야간에는 말의 발목 높이로 철선을 걸어 놓는다. 울타리 정도는 가볍게 뛰어 넘을 것이니 최대한 놈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장애물들을 많이 깔아 놓을 수 있어야 해.”
대대장의 말을 받아 적던 참모 무관 하나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대대장님께서는 그 주나라 무사들이 다시 이리로 올 것이라 예상하십니까?”
“나라면, 나라면 그럴 것이다. 율도의 국경지대 지리에 대해 잘 모르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촉박하다면 당연히 자신이 아는 길을 이용하려는게 사람 본능일테니까.”
참모들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군 사령부에서 내려온 공문에 의하면 사령관님 (2군 사령관 을불군)께서도 10군단 예하 129기병 여단을 직접 인솔해 이곳 동쪽 8보병 사단 관할 지역에서 수색 적전을 벌이고 계시다고 합니다. 아마 사령관님께서도 주나라 무사들이 이 쪽으로 올 것이라 예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령관님도 같은 생각이시라면 나 역시 영광이지. 예측이 맞았으면 좋겠군.”
최기가 국경으로 향하는 길에 병사들을 배치할 진지 자리를 하나 하나 지정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주요 목에는 총병보다 활이나 쇠뇌를 사용하는 사수들을 배치할 수 있도록. 어차피 갑주를 입고 있지 않을 테니 화력보다는 빠르게 연사할 수 있는 무기를 든 병력들이 필요하다. 장창병, 검병 등 근접전 병력들은 토성 위 최종방어진지에 배치해 놈들의 월경을 끝까지 저지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쌍수검병들을 예비대로 조직해 항시 출동 대기시킬 수 있도록.”
최기의 경계 태세 점검은 밤새 이어질 기세였다.
초원길 남쪽 길로 쉬지 않고 달려 율도의 서쪽 국경 지대 가까이까지 접근해 온 정국과 강용영 무사들은,
국경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막고 검문 검색을 펼치는 율도군들로 인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을불군 대장과 최기 중령의 예상대로 그들은 이번에도 자신들이 들어왔덜 길을 통해 주나라로 돌아가려는 중이었다.
자신들이 잘 아는 길인데다가 다른 곳의 경계 상태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율도군들이 객잔이나 여관에 투숙한 사람들까지 하나 하나 확인하고 다니는 통에 어디서 하룻밤 편히 쉬어가기도 힘든 상황,
강용영 무사들과 무녀 연하는 정국을 데리고 한적한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전하, 불편하시겠지만 조금만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탐망을 나간 무사들이 돌아오는 데로 저희들이 본국으로 안전하게 모시겠나이다.”
지금 국경지대 경계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나간 이들은 세 명,
일전에 길 위에서 비명에 간 이들도 세 명이고,
또 다른 세 명은 예린을 쫓아갔다가 아직 합류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정국을 데리고 있는 이들은 연하를 포함해 세 명 뿐.
‘나도 예린이처럼 도망칠까...?’
정국은 앞에 놓인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강용영 무사들이 아무리 무예 솜씨가 뛰어나더라도 뛰고 달리는 것만큼은 나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 있잖아? 무사 한 명만 더 화장실을 가거나 해서 자리를 비우면 바로 식탁을 뒤엎고 계단으로 달려가서...’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리며 탈출 계획을 세우던 중,
갑자기 옆에 앉아 있던 무녀 연하가 그의 어깨를 손으로 지긋이 잡았다.
“황자 전하...”
“음, 으응?”
“저희들이 황자 전하를 본국으로 안전하게 모실 거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오니 엄한 생각은 하지 마시지요.”
정국이 흠칫 놀라 물었다.
“아니, 무슨...! 내 생각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겐가?!”
“저희는 생각을 읽는 게 아니라 기운을 읽지요. 기운을 읽으면 감정을 알 수 있고, 감정을 알 수 있다면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답니다.”
“내 마음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왜 그리 마음이 심란하신지도 짐작할 수 있구요.”
“왜... 그런 거 같은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무녀 연하가 빙그레 웃으며 손으로 공손히 그의 가슴을 가리켰다.
“전하의 여기 한 가운데에 그 분이 깊이 자리잡고 계시기 때문이죠.”
“그 분... 이라구?”
“네, 율도의 영애 말입니다.”
정국은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저같이 하찮은 소인이 감히 드릴 말씀은 아니오나, 그 분 때문에 나라를 버리고 황제 폐하를 등지지 마옵소서. 그처럼세상에 어리석은 일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게 어째서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짐짓 호통을 치는 황자 앞에서도 무녀 연하는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사랑이란 참 부질 없는 짓이지요. 많은 연인들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지만 그 약조를 끝까지 지키는 이가 대동 천지에 얼마나 있겠습니까? 영애부터 전하를 버리고 달아나지 않았습니까?”
“그건 율도 영애로서 주나라로 갈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나와 예린이도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이 변할테니 그거 다 부질없는 짓이다? 사랑이란 부질없는 짓이니 모두 잊고 주나라로 돌아가자, 이 말인가?”
“예, 모든 것은 다 변하기 마련이지요.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도 상대의 외모가 변하고 꽃 같던 아름다움이 시들기 시작하면 점점 질리기 마련인 것처럼요. 전하께서도 영애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사랑을 느끼셨을 테지요. 이제 겨우 십대에 갓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은 영애가 어찌 아니 아름다울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전하께서도 그렇고 율도 영애도 모두 마루한의 자녀일 뿐 똑같은 마루한이 아니지요. 점점 나이를 먹고 늙어가기 시작하게 되면 그 때에도 전하의 눈에 영애가 아름답게 보일까요? 여전히 사랑스럽다고 느껴질까요?”
“그대가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무녀들은 평생을 홀로 독신으로 산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찌 내앞에서 사랑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한단 말인가?”
“무녀는 마루한은 물론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해박하답니다. 사랑 또한사람의 마음에 대한 일인데 저희가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연하가 웃는 얼굴로 정국의 손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감히 전하께 여쭙겠습니다. 영애의 성격이나 언행에 대해서는 저보다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만일 영애가 지금의 외모가 아닌 다른 평범한 외모에 지금과 똑같은 성격과 언행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래도 전하께서는 영애를 사랑하실 수 있으신지요?”
무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국의 머릿속에 예린에 대한 몇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경무관에서 사내 아이처럼 천방지축 말썽을 피우고 돌아다니던 모습하며,
배다른 자매인 예나는 물론 자신에게 눈길을 보냈던 여자애들을 뒤로 불러내 때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들,
그리고 정국 본인은 매력적으로 느끼긴 했지만, 객관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엄격한 주나라 황실의 법도와 예의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직설적이고 다소 과격한 언행들...
‘만일 예린이 지금처럼 아름답지 않았다면... 그래도 내가 예린이를 좋아했을까...?’
정국은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전하처럼 존귀하신 분께서 영원하지 않은 것에 애태우실 필요는 없답니다. 아름다운 꽃이 하나 진다 하여도 전하의 주변에는 언제나 더없이 아름다운 새로운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날테니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그저 고르고 싶을 때 고를 수 있는 꽃들을 마음껏 선택하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전하께서 나이가 들고 늙어간다 하더라도 새로운 꽃들, 전하께서 취할 수 있는 아름다운 꽃들은 언제고 다시 전하의 곁에서 피고 또 다시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전하께서 진정 원하셔야 하는 것은 언젠가는 변해버릴 사랑이란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오직 황제 폐하께서 추구하시는 주나라와 제후국들의 영세무긍한 번영이라는 영원한 기치여야 할 것입니다.”
정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랑이란 것이... 그렇게 가치없는 것이란 말인가?”
“전하께서 바라보셔야 할 더 큰 것들에 비해서는 분명 가치 없는 일일 뿐이지요.”
“내가 아는 마루한이 하나 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목숨을 걸고 대동으로 넘어왔고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꼭 자신이 살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거라 말했었지. 마루한들도 언젠가는 변해버릴 사람과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데, 심지어 영원히 살 수 있는 혜택마저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네가 보기엔 그것마저도 가치없다는 것이냐?”
연하는 잠시 동안 정국의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이가 혹 이번에 새로이 대동에 나타난, 율도 태상국과 함께 하고 있다는 어린 마루한이 아닌지요?”
“그대도 영록이에 대해 아는가?”
“아직 그 분을 직접 뵙지는 못했으나 멀리서나마 그 분의 기운을 계속 느끼고 있었지요. 그 분의 감정이 다른 마루한들에 비해 지나치게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그 마음을 짐작하기 매우 힘들었는데, 어떤 사연으로 대동으로 오셨는지 대략 알게 되니 이제야 그 분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대가 영록이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고?”
“네, 전하. 영록 마루한의 기운을 처음으로 느꼈을 때 알 수 없는 상실감과 슬픔, 패배감,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한 분노 같은 감정들이 그 분을 온통 감싸고 있다는 걸 알았지요. 분명 황자 전하와 같은 나이대인데 어째서 어린 나이임에도 그와 같은 참담한 감정들을 갖게 되었는지 참으로 궁금했는데, 이제야 수수께끼 미로 같던 그 분 마음 속에 대한 실타래가 모두 풀리는 기분입니다.”
무녀 연하가 자신의 젓가락 한쪽과
옆에 놓인 정국의 젓가락 한쪽을 나란히 집어 들었다.
서로 짝이 맞지 않는 젓가락들이었다.
“영록 마루한의 마음 속에도 지금 황자 전하처럼 누군가가 깊이 박혀 있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영록 마루한과 그 분은, 지금 이 젓가락과 같은 모습입니다.”
“무슨 뜻인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주게나.”
“애초부터 짝이 아니란 말입니다.”
“뭐? 하지만 영록이는 나에게 구하려는 사람이 자신의 여자친구라고 말했단 말이다!”
“이 곳 대동에서도 그냥 친구 사이인 여자를 가리켜 여자친구라 말하지 않습니까? 마루한이 살던 세상에서도 연인 사이가 아닌 그냥 친구인 여자를 가리켜 여자친구라 칭할 수도 있겠지요.”
실제로 영록은 그 때 여자친구, 라고 짧게 이야기 했을 뿐 얼마나 오래 사귀었는지 얼마나 깊은 사이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정국은 그저 말하기 힘든 사연이 있는 거 같아 더 묻지 않았었고 말이다.
“하지만... 영록이는 그 여자친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모습이었어. 그래서 하루 빨리 강해져 자신이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영록 마루한이 마음 속 그 분을 향해 깊은 정을 가지고 계신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세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열렬히 말이지요. 하지만 마루한 마음 속의 그 분은...”
연하는 아주 살짝 두 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영록 마루한에게 정을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아니, 다른 세상에 있는 알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찌 읽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닙니다. 영록 마루한의 마음 속에 그 분으로부터 정을 받은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기에 그렇게 짐작한 것입니다. 그 분은 아마 영록 마루한을 오래된 친근함이나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오는 동정심, 약하고 어려운 이를 돕고자 하는 선량한 감정 같은 것으로 대했을지 모르지만, 남녀간의 애정을 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네, 어쩌면 영록 마루한께서 짝사랑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식당 안에 딱히 사람들이 있지는 않았지만,
무녀 연하는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며 말을 이었다.
“영록 마루한이 가진 상처의 흔적으로 보건데, 마음 속 그 분은 아마도 강력한 힘을 가진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그 분 스스로 선택한 것인지 타의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리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영록 마루한의 여자가 아니게 된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돌아가서 그 사람을 구하겠다는 거지?”
“혹 영록 마루한께서 부모님이나 가족이 안 계시지 않나요?”
“맞아. 전쟁 중에 모두 죽었다고 들었어.”
“그렇다면 제 짐작이 맞을 듯 싶군요. 영록 마루한은 지금... 어쩌면 마음 속 그 분에게 무의미한 집착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집착? 집착이라고?”
“네, 마음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이 사랑이란 감정마저 제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병들게 되면 나타나는 모습이지요.”
“...”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영록 마루한이 마지막으로 본 마음 속 그 분의 모습은 분명 처참하게 망가지고 부서진 모습이었을 겁니다. 아마 자신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불행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일 수도 있겠죠. 평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잔인한 모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그 분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을 품으신 것 같은데...”
연하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들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 놓았다.
“영록 마루한이 다시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 그 분을 구한다 해도 그 분이 영록 마루한의 애정을 받아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 분은 이미 영록 마루한보다 더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록 마루한의 마음 속에 크나 큰 상실감과 패배감이 깊이 뿌리내리게 된 것일 테구요.”
그녀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정국이 혼란스러원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이미 임자가 있는 이를 다시 뺐으려고...?”
“정확한 건 알 수 없기에 저 역시 단언해서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하지만 영록 마루한의 기억 속에 남은 그 분의 모습들은... 영록 마루한이 아닌 다른 남자... 아니, 다른 여러 남자들의 곁에 있는 모습으로 더 많이 남아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추측컨데, 영록 마루한이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 마음 속 그 분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분이 영록 마루한의 마음을 받아 주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영록 마루한이 그 분의 현재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마루한의 사랑 마저도 집착에 의한 잘못된 결정이란 말인가?”
연하는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며 대답했다.
“신성모독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바른대로 고하자면, 소인이 대동에 있는 모든 마루한들의 기운 읽고 느끼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신으로 추앙하며 영원히 이 땅에서 살아가는 마루한들 역시 우리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과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란 것 말입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마루한들을 더이상 신으로 숭배하지 말라 하던 율도 태상국이 옳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지요. 마루한도 진정 신이 아니기에 완벽할 수 없습니다. 우리처럼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결정을 하곤 하지요. 지금 영록 마루한의 어리숙한 생각처럼 말이죠. 그러니 지금 황자 전하의 율도 영예를 향한 감정도 이해 못할 일이 아니랍니다. 이번 일은 그저 황자 전하께서 아직 어리고 세상을 모르셔서 일어난 아주 소소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허니 바라옵건데, 이제부터는 부디 불필요한 감정들은 모두 털어내시고 본국으로 돌아가셔서 황제 폐하께서 추구하시는 크나 큰 가치를 이어 받으실 생각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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