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대동력 9,994년 5월 43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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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시, 대월국 서래번 천제국 숙영지 북쪽 계곡
이곽은 주진경의 명을 받아 자신의 수하들 중 가장 날랜 전사 100여명과 함께 마루한을 찾아 나섰다.
휘하의 병력들을 모두 데리고 다니게 되면 (가뜩이나 다른 종족들에 비해 덩치가 커다란 두억시니인지라) 눈에 잘 띌 수밖에 없으니 대부분의 병력들은 본대에 남겨 놓고 고르고 고른 정예 전사들만을 데리고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율도군들이 모두 소규모로 흩어져 있는 데다가 여기 저기서 정신없이 출몰하는 탓에 한동안 마루한이 어디 있는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인근 촌락을 약탈하러 갔을 때 그곳 주민으로부터 마루한을 쫓을 단서가 될 만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 촌부가 얼마 전 이 부근을 지나는 율도군들을 보았다 합니다. 그런데... 야, 그 다음부터는 네 입으로 설명드려!”
두억시니들이 도깨비들의 가옥으로 들어가 마구 약탈을 벌이던 중, 전사 하나가 웬 늙은 남자 도깨비를 이곽 앞으로 끌고 왔다.
늙은 도깨비는 커다란 두억시니 전사에게 목을 움켜잡힌 채로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 아는 데로 모조리 다 털어놓겠습니다요. 그러니 제발 목숨 만은...”
어느 집에서 빼앗아온 술을 항아리 째 들고 벌컥 벌컥 들이키던 이곽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했다.
“무엇을 털어놓겠단 말이냐?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산채로 술안주감이 될 줄 알아라.”
늙은 도깨비도 천제국과 거록에 사는 두억시니들이 사람을 산채로 잡아 먹는걸 즐긴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 얼마 전 말을 탄 율도군들이 이 마을을 지나갔사온데...”
“얼마나? 몇 명이나 지나갔느냐?”
“수십, 아, 아니, 거의 백명에 가까운 숫자였습니다요!”
“백명? 율도군 기병들이 백명 씩이나 함께 뭉쳐다녔다고?”
이곽도 지금 율도군이 1, 2개 중대 규모, 적게는 15명에서 많게는 30명 내외의 병력으로 돌아다니며 천제국군들을 기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백여명씩이나 모여서 다니고 있다면,
‘이는 분명 지휘부에 해당하는 부대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안에 마루한이 있을지도...’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소상히 말해보라!”
“네, 네, 그, 그것이... 머리부터 발끝까지는 물론 말한테까지 검은색 철갑을 두른 무사들이 수십명으로 제일 많았구 말입쇼, 그들보다 가벼운 갑주를 입고 말에 철갑을 두르지 않은 무사들도 그 다음으로 많았고... 아! 그리고 우리 대월국의 은색 갑주를 입은 도깨비 무사들도 함께 있었습니다요!”
“뭐? 너네 나라 도깨비 무사들도 함께 있었다고?”
이곽이 늙은 도깨비에게 다가가 그의 면전에 얼굴을 들이밀며 두 눈을 부라렸다.
“네! 네, 네, 맞습니다요! 분명 우리 대월국 무사들이었습죠! 어느 번의 무사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들 번쩍번쩍거리는 갑주를 입은 걸 보면 지체 높은 귀족 가문의 무사들임에 틀림없어 보였습니다요! 아! 맞다! 그리고 그들 중에 진짜 화려한 갑주와 비단으로 만든 복장을 하고 있었던 귀족 여인도 있었습니다요!”
“귀족 여인? 그런 거 말고 또 다른 것은 보지 못했느냐?”
“다른 것이라 하오시면...”
늙은 도깨비는 이곽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다른 것이라 하오시면... 아! 그리고 율도군 중에 어린 소년도 하나 끼어 있었습니다요!”
“어린 소년? 소년병을 말하는 것이냐?”
율도의 경우 경문관, 경학관, 경무관 등의 교육기관에 진학하지 않은 남자들의 경우 16세부터 군에 들어가 의무복무를 할 수 있도록 법제화 되어 있다면,
천제국은 귀족과 노예를 제외한 일반 평민 남자들에게 15세부터 군역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었다.
십대 어린 소년병은 대동 어디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현상인 것이다.
“이 놈! 소년병이 없는 나라도 있다더냐? 또 한 번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면 이짝 다리부터 먼저 뜯어 버리겠다!”
이곽이 옆에 두었던 커다란 전투도끼를 집어들고 늙은 도깨비의 다리를 툭툭 건드리며 호통을 쳤다.
“사,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제, 제가 본 건 흔하디 흔한 소년병이 아니었습니다요~!”
“그럼 뭐, 안 흔한 소년병이었더냐? 예쁘게 생긴 미소년 뭐, 이딴 소리하면...”
“유성금! 검은색으로 된 유성금 갑주를 입은 소년이었습니다요!”
자신의 다리를 지긋이 누르고 있는 전투도끼의 날카로운 서늘함에 오금을 바들바들 떨고 있던 늙은 도깨비가 겁에 잔뜩 질려 소리쳤다.
유성금, 이란 말에 이곽도 당황한 듯 전투도끼를 내팽개치며 물었다.
“유성금이라고? 네깟 놈이 어떻게 그 소년이 입은 갑주가 유성금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었단 말이냐?”
“저도 젊었을 때 저희 번주님, 영주님들을 따라 전쟁에 나간 적이 있습죠. 그 때 운이 좋아 번주님의 막사를 지키는 일을 했사온데, 거기서 번주님이 입으시는 유성금 갑주를 수시로 볼 수 있었습죠! 그래서 철로 만든 갑주와 유성금으로 만든 판금갑주가 뭐가 어떻게 다른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요!”
늙은 도깨비가 보았다는 유성금 갑주를 입은 율도의 소년,
그리고 이번에 새로이 대동에 나타난 마루한이 나이 어린 십대 소년이라는 첩보.
또 그 소년과 함께하고 있는 도깨비 무사들이 포함된 백명 가량의 율도군...
이곽은 마침내 마루한과의 거리가 무척 가까워졌음을 직감했다.
역시 오늘 밤에도 율도군의 야습은 계속 되었다.
늙은 도깨비가 본 율도군들은 천제국이 숙영지를 편성한 곳 북쪽 근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했다.
이곽은 급히 본대 치중대에서 체구가 작은 자그니들을 차출해 숙영지 밖 이곳 저곳에 배치했다.
“백명, 백명 단위로 움직이는 율도군 기병들을 보는 즉시 기별하라. 너희 임무는 이것뿐이다.”
다 큰 어른도 4~5척 밖에 안되는 키를 가진 자그니들은 다른 종족들에 비해 매우 작고 왜소했다.
그래서 밤에 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 있으면 찾기 힘들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그니들에게 임무를 주고 숙영지 안에서 기다리던 중,
마침내 이곽에게 전갈이 도착했다.
“숙영지 북서쪽에서 백명 가량의 율도군들이 총과 활을 쏘고 철수 중이라고 합니다!”
이곽은 그 즉시 전사들을 이끌고 북서쪽을 향해 달려나갔다.
커다란 두억시니들이 전력으로 달려왔지만 말을 탄 기병들을 쉽게 따라잡기는 힘든 노릇이었다.
달빛별빛에 땅바닥의 말발굽들을 살펴보던 이곽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이 부근에서부터 놈들이 말에 박차를 가하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군. 우리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눈치챈거야...!”
이곽이 말발굽들이 이어진 길을 가리키며 전사들에게 말했다.
“이길로 계속 추격한다! 말발굽을 따라가면 분명 마루한이 있는 곳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쉬익 쉬익,
두억시니 전사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길을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말발굽을 따라 반 시간쯤 내달렸을 무렵,
이곽과 두억시니 전사들은 계곡으로 들어가는 좁은 언덕길 가까이에 당도했다.
“...정지!”
선두에서 달려가던 이곽이 손을 들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무슨 일입니까, 대장? 율도군이 앞에 있는 겁니까?”
뒤에 있던 전사 하나가 앞으로 나오며 물었다.
“...아니, 놈들의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
“네?”
“놈들의 말 말발굽 소리가 아까부터 들리지 않고 있다고.”
이곽은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고는, 자세를 낮추고 언덕길 주변 계곡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어두운 밤이라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덕길 주변의 계곡 지형은 군사들이 매복해 있다가 양쪽에서 활이나 총을 쏘며 기습하기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되면서 언덕길 위에 찍힌 말발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매우 어지럽게 찍혀 있는 말발굽들 중 특색있는 것들만을 찾아 그 짝을 맞춰보니,
자신들이 있는 언덕길 아래까지만 해도 말발굽들의 폭이 매우 넓은 반면,
언덕길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말발굽의 폭은 이전보다 좁아져 있었다.
‘이제껏 달린던 놈들이 여기서부터 천천히 말을 몰았다... 도망치려 했다면 단숨에 언덕길을 넘기 위해 말을 더 빨리 몰았어야 하는데...!’
이곽은 두억시니 전사들을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소리내지 말고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찾아라! 최대한 엄폐한 상태에서 계곡 위를 지켜봐야 한다!”
두억시니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커다란 나무 뒤, 바위 등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억시니들이 올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용마로 소장 곁에 있던 철기병 무관이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가 여기 있는 걸 눈치 챈 모양이군.”
용마로 소장이 소총 돌기에 뇌홍을 꽂으며 언덕 아래를 주시했다.
은은하게 내려오는 달빛 별빛 아래 여전히 숨을 곳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두억시니 몇 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공격하고 싶었지만 대충 육안으로 봤을 때 그들과의 거리는 150보 이상, 일제 사격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주기에는 다소 먼 거리였다.
그 때,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강지헌이 낮은 포복으로 용마로 소장에게 다가왔다.
“제 편전이라면 놈들을 모두 맞출 수 있습니다. 저격을 허락해주십시오.”
지금까지 야습에서 보여준 강지헌의 활솜씨라면 이 거리에서도 충분히 두억시니의 한 쪽 눈을 꿰뚫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용마로 소장은 고개를 저었다.
“우선 좀 더 지켜보도록 한다. 놈들이 우리가 매복한 낌세를 알아차린 모양인데, 굳이 이 거리에서 먼저 공격할 필요는 없다. 계속 언덕 아래를 주시하면서 내 명령을 기다리도록.”
부군단장의 말에 강지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낮은 포복으로 자신이 있던 위치로 돌아갔다.
영록도 권총을 오른손에 쥔 채로 성시우 대위 등과 함께 용마로 소장 곁에서 언덕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가 권총을 두 손으로 잡고 언덕 아래를 겨눈 채 엎드려 있는 것을 본 성시우 대위가 조용히 그의 귀에 속삭였다.
“마루한, 그 권총 유효사거리가 짧아서 저 밑에까지 안 닿습니다. 지금부터 굳이 지향 사격 자세 취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록은 머쓱한 표정으로 사격 자세를 풀었다.
“전에 패잔병들도 잡고 전장 처리 중에 두억시니도 잡아봐서 이런 일이 또 생겨도 안 떨릴 줄 알았는데,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네요.”
성시우 대위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건 마루한께서 지극히 정상적이시라는 뜻입니다.”
“정말요? 하지만 경험 많은 무사분들은 절대 긴장하거나 떨지 않지 않나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긴장되고 떨리고, 무섭고 당황스러운 감정을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잘 통제하는 것일 뿐, 전장 경험 많은 무사라도 모두 다 그런 걸 느낄 것입니다.”
“전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그런 감정들이 무뎌지고 무뎌져서 결국 아무 것도 못느끼게 되는 줄 알았어요.”
“무뎌진다... 그럴 수도 있지요. 예전에 태상국 기하께서 전쟁에 참가했던 무사들을 모아 놓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너희들이 느끼는 공포, 좌절, 슬픔, 죄책감 같은 모든 감정들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런 것들이 너희들 모두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증거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런 감정들이 무뎌지고 무뎌져서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게 된다면...”
성시우 대위가 나지막이 한 숨을 내쉬었다.
“그게 바로 진짜 미친 거라고 하시더군요.”
예전이었다면 그의 말이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겠지만,
현실 세계에서 2차 한국전쟁을, 그리고 이곳 대동에서 또 다른 전쟁에 참여해본 영록으로서는
무뎌지고 무뎌져서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가 바로 진짜 미친 거라는 성시우 대위의 말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알 수 있었다.
“쉿! 저 아래까지 목소리가 들릴 수 있으니 모두 함구해야 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용마로 소장이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며 주의를 주었다.
영록은 미안함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다물고 언덕 아래를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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