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대동력 9,994년 5월 42일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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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시, 대월국 서래번 중부 천제국군 임시 숙영지
“이 밥버러지만도 못한 놈들! 연대 하나가 날아가는 동안 단 한 명의 율도군도 못 죽여? 그러고도 네 놈들이 군인이야?!”
천제의 수레 아래 죄인처럼 불려나와 서 있던 천제국군 지휘관들은 모두 고개를 수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제국군이 부랴부랴 지원군을 편성해 한바탕 율도군들이 휩쓸고 간 전투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 그들 앞에는 천제벽력포탄이 떨어진 큼지막한 탄흔지들과 까맣게 불타버린 들녘, 그리고 그 주변에 흩뿌려진 수 천여 구의 시체들이 남아 있었다.
모두 포격에 찢겨지고 창칼에 베이고 총탄과 화살에 꿰인 도깨비와 두두리들, 즉 천제국군의 시체들이었고,
검은 갑주 차림의 율도군 시체는 단 한 구도 찾을 수 없었다.
단 한 명의 적도 쓰러뜨리지 못한 치욕적인 완패인데다가,
지금까지 율도와의 전투에서정선교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천제벽력포로 적군보다 아군을 더 많이 희생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천제는 볼품없는 체구에 볼록 튀어나온 똥배가 뚱실뚱실 위아래로 흔들릴 정도로 수레 위에서 방방 뛰었다.
“오늘도 어젯밤처럼 율도군이 들이칠 것이다! 또 경계에 실패하기만 해봐! 율도군에게 뚫린 부대 지휘관은 내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참해버릴 것이니!”
그는 분이 안 풀렸는지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욕설을 지껄이고는 수레 위 가옥 안으로 휑, 하고 들어가 버렸다.
수레 아래 모였던 군지휘관들은 힘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파하고,
대사마 주진경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천막으로 발걸음을 돌리려 하고 있었다.
“대사마, 잠시 이야기 좀 나누시지요.”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불러 세웠다.
육군 대신 창정구였다.
“아무래도 어제처럼 방비하다가는 내일 아침 천제 성하의 손에 누구 하나는 목이 떨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병력들의 취침시간을 뒤로 미루더라도 숙영지 주변에 진지를 구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밤 중에 행군에 지친 병사들이 진지를 팔 수나 있겠소?”
“살려면은 파야겠지요. 병사들도 살고 우리들도 살려면은 말입니다.”
두억시니 치고는 사려 깊고 인덕도 갖춘 인물로 평가받는 창정구 육군 대신이었다.
그의 말이라면 이 밤 중에 진지 작업을 해야 할 병사들의 원성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듯 싶었다.
“율도군이 사용하는 윤형 철조망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쉬운대로 숙영지 일대에 목책을 세우고 유자철선을 감는 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철조망 뒤로 앉아서 경계를 취할 수 있는 급조진지를 구축하고 병력들을 3개조로 나누어 숙영지 경계에 투입시킬 수 있도록 지시하겠습니다.”
“병사들이 잘 따라주었으면 좋으련만... 내가 도울 일은 없겠소?”
주진경의 말에, 창정구는 부리부리한 두 눈을 꿈뻑이며 한층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으로 저를 도와주시고 싶으시다면, 도대체 이번 전쟁에 임하는 천제 성하의 전략이 무엇인지 귀뜸이나 해주시겠습니까?”
정선교가 아직까지 육군대신에게마저도 전략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진경은 주변을 살핀 뒤 두억시니답게 도깨비보다 몇 배는 더 커다란 창정구의 귀에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이를 들은 창정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아니 그럼, 천제 성하는 오직 천제벽력포의 화력만 믿고 계신 겁니까?”
“그대도 환강산성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그 위력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소? 현재로서는 우리가 율도군을 압도할 수 있는 전력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으니...”
주진경의 말에 창정구는 분한 듯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대사마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럼 대동 최강의 힘을 가진 우리 두억시니 전사들은 뭐가 됩니까?”
“그대들 두억시니들이 대동의 모든 종족들 중 가장 힘이 세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소만... 두억시니도 총에 맞고 창에 찔리면 죽는건 다 똑같지 않소? 게다가 천제벽력포 같은 화포 앞에서라면, 아무리 강맹한 힘을 가진 전사나 무예를 배워본 적도 없는 농민 출신 병사나 다 똑같아질 수 밖에 없지.”
“그래서, 우리 최정예 두억시니 전사들을 그 무식하게 커다란 대포나 지키라고 후방에 처박아 둔 겁니까?”
“성하의 뜻이니 좋게 생각하시오. 천제벽력포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전력이니만큼, 가장 강한 전사들이 지키는 게 마땅한 일이니.”
“하지만! 포를 지키는 건 두두리나 도깨비나 다모랑이나 다른 이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우리 전사들이 있어야 할 곳은 후방이 아닙니다! 명예로운 싸움이 벌어지는 최전선이어야 한단 말입니다!”
창정구가 후방에 있는 천제벽력포 포진지를 가리키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대사마께서도 아시지 않았습니까? 율도 기병놈들이 천제벽력포가 날아오는 걸 보란듯이 피해다니며 우리 군을 유린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전쟁이란 결코 대포의 화력만으로 승패가 결정나는 것이 아닙니다. 천제벽력포 말고도 구경이 작은 포로 살상지대를 만들어 적을 저지하는 것도 중요하고, 적이 근접하면 총병과 사수들로 기선을 제압한 후 막강한 두억시니 전사들을 내세워 결정적 전투를 치르는 것과 같은 병법의 기본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길입니다! 그런데 천제 성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
주진경은 화가 단단히 난 창정구를 달래려는 듯 어깨를 두드리면서도, 사뭇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 천제 성하 앞에서도 똑같이 할 자신 있소?”
“...”
“못 하겠으면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따르시오. 이구 전투 이후 두억시니 지휘관들이 어찌 되었는지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창정구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성하의 수레로 가서 그대의 제언대로 병사들이 숙영지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게 될 것이라 보고 드릴 것이오. 그대도 돌아가 병력들을 잘 추스르고 바로 작업에 임할 수 있도록 하시오.”
“네, 대사마...”
창정구는 화를 억누르는 표정으로 뒤돌아 가버렸다.
천제의 수레 위 가옥,
늘 그 안에서 정선교와 더불어 헐벗은 차림으로 기거하던 궁녀와 미녀들 모두 밖으로 내보내졌다.
천제가 그곳에서 대사마와 전략 회의를 열기 때문이었다.
정선교는 신하건 누구건 주변에 있는 이들조차 절대 믿지 않았다.
전장의 한복판까지 데리고 온 궁녀와 미녀들 중에서도 강운예의 첩자가 심어져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언젠가부터는 강운예가 자신을 독살하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앞으로 황궁의 모든 음식들을 은식기에 담아 가져 오라 하고 숟가락과 젓가락 역시 은으로 된 것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무슨 음식이든 옆에 있는 궁녀가 먼저 한입 먹고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음식을 입에 대곤 했다.
이렇듯 자기 사람들조차 믿지 못하는 증상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고 있었다.
“포병 지휘관놈들, 그놈들 혹시 강운예한테 매수당한 거 아냐? 놈들은 기병 1개 사단 규모였다며? 그럼 족히 수천은 넘을텐데, 어떻게 천제벽력포를 쏴서 한 놈도 못 죽일수가 있냐고? 그 놈들, 분명 일부러 빗나가게 쏜 게 틀림없어! 내일 당장 거기 지휘관놈들 붙잡아와서 고문 좀 해 볼까?”
주진경이 천제를 달래며 말했다.
“일부러 빗나가게 쏜 것이 아니라 율도군 기병들이 포탄이 날아오기 전에 자리를 뜬 거라 합니다. 율도군 지휘관의 판단이 빨랐을 뿐, 우리 포병들은 죄가 없으니 노여움을 거두시지요.”
“그래도 어떻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피할수가 있냐고? 우리가 쏠거라고 알려주고 쏘는 것도 아닌데... 가만! 진짜 우리 군사들 중에 강운예의 첩자가 있는 거 아냐? 포진지에서 율도군한테 신호라도 보내는 놈이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 점에 있어서는 내일 당장 헌병단장을 보내 조사할 수 있도록 지침을 내려놓겠습니다. 하오나 전선의 우리 군사들 모두 천제 성하께 진심 어린 충정으로 전력을 다해 전쟁에 임하고 있으니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주진경은 서둘러 화제를 바꾸기 위해 준비해 온 커다란 작전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정선교는 가늘게 옆으로 쫙 찢어진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비 맞은 늙은이 마냥 무어라 투덜투덜 거리며 주진경이 보고를 준비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것과 같이 금양장 서쪽에 증강된 1개 사단 규모의 율도군 병력들이 참호 진지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 군의 이동을 저지한 후 남쪽과 북쪽으로 기동하고 있는 기병들로 하여금 우리의 측면을 노리려는 게 율도 태상국이 준비한 전략으로 보입니다.”
정선교가 빼빼마른 손으로 율도군 진지가 표시된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여기에 강운예가 있다는 건가?”
“율도 태상국이 이곳에 있는지, 아니면 기병들과 함께 기동 중인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정보원들에게 포섭된 대월국 주민들 중 강운예의 얼굴을 아는 자가 없기에 아마 봤어도 몰라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놈의 초상화가 있잖아? 초상화를 보여주면 알아볼 수도 있었을텐데?”
“하오나 성하, 태상국은 갑주에 커다란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텐데, 무지렁이 농민들이 알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친정군에 따라온 화공 있지? 화공에게 놈이 투구를 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서 그려오라고 해. 당연히 율도군 무관들이 쓰는 투구를 쓰고 있는 모습으로 말이야. 그걸 들고다니며 보여주면 대월국 놈들 중에 알아보는 놈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아무튼.”
정선교는 금양장 주변에 만들어지고 있다는 율도군 참호 진지 표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놈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동금이 자리잡고 있다는 전초기지까지 가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동금에게 영매를 보내 당장 거기서 기어나오라고 그래. 군을 모두 이끌고 나와서 여기 있는 놈들 후방으로 가 다시 자리 잡고 기다리라 전하라고. 아무리 참호를 깊이 파놓은들 우리가 천제벽력포를 쏟아부으면 퇴각하지 않고서는 못베길테니, 그 때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철수하는 놈들을 섬멸하라고 그래.”
“성하, 안타깝게도.”
주진경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지금 동금의 동북방면대 병력들은 전초기지에서 율도군에 포위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율도군의 소행인지 영매든 전령이든 보내는 족족 돌아오질 않아 정확한 사정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아무래도 큰 전력 손실을 입은 채 간신히 버티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당나귀같이 얼굴 옆으로 퍼진 정선교의 귀가 금방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게다가 동금이 이끄는 부대와 따로 떨어져 반란군들을 뒤쫓던 동북방면대에 지원 배속되었던 성하의 친위 기병대 역시 소식이 끊긴지 오래라고 합니다. 아마 그들 역시 율도군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럼 백사는?! 백사는 뭘 했단 말인가? 아니, 그 년은 또 어떻게 되었다는 말이야?”
“백사 대장 또한 아무런 소식이...”
정선교는 보잘것없이 약해 빠진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밥버러지 같은 놈들...! 다 하나 같이 밥버러지들 뿐이야! 이것들 모두 산 채로 그냥 불구덩이 속에다가...!”
마루한,
대동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이의 입에서 속되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욕설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주진경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내면서 계속 전략에 대한 보고를 이어나갔다.
천제가 아무리 입으로는 오물을 토해내고 있는 중이라도 필요한 말은 귀로 다 듣는 성격이라는 걸 이미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천제벽력포들을 금양장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율도군을 포격할 수 있는 거리까지 이동시키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런 후 본대 병력을 남과 북 양쪽으로 나누어 적의 기병들을 견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기병들을 예비대로 중앙에 두고 금양장 일대의 율도군이 철수하는 즉시 추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하옵고,”
그는 현재 천제국군이 지금 숙영하고 있는 곳 북쪽 일대를 손으로 빙빙 돌리며 말했다.
“명을 받고 본대와 떨어져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곽의 부대로부터 전갈이 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 북쪽에서 마루한으로 추정되는 이를 보았다는 제보를 받고 이를 추격중이라 합니다.”
마루한이란 말에 정선교의 입에서 욕설이 뚝 끊겼다.
“어떻게? 강운예 그 놈도 못알아보는 대월국 놈들이 어떻게 새로 나타난 마루한을 알아 볼 수 있어?”
“인근 주민 중에 호화로운 갑주를 입은 작은 체구의 소년이 율도군과 동행하고 있는 것을 본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소년이 입은 갑주가, 분명 유성금으로 만들어진 갑주였다고 합니다.”
“유성금이라고? 고위 무관일리 없는 소년이 유성금으로 만든 갑주를 입었다면...?”
정선교가 입술을 씰룩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필시 그 소년이 마루한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강운예 그 놈, 걱정은 많아가지고 어린 마루한이 전장에서 다칠까봐 참으로 값비싼 선물을 내려주었군!”
정선교는 탁자에 놓인 맑은 술을 쭉 들이키며 한껏 기분 좋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곽에게, 다른 놈들은 죽이든 살리든 먹든 갖든 상관 안 할테니 마루한 그 놈만은 반드시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말고 내 앞으로 데리고 오라고 다시 한 번 전하라! 마루한이 조금이라도 상해서 오면 목숨 부지하기 힘들 것이라 단단히 이르고!”
“네, 성하!”
주진경은 천제가 기분이 좋아진 틈을 타 나머지 보고들도 일사천리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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