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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춘추 - 리부트-148화 (148/217)

〈 148화 〉 대동력 9,994년 5월 42일 (7)

* * *

­ 오후 8시, 대월국 흥원번 흥원성 일대 율도군 주둔지

한유리가 유경패를 보내어 알아보니 진효명은 당분간 흥원성에 기거할 예정이고 짐도 그곳에 풀었다고 했다.

그래도 예나와 함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니 선뜻 시간에 맞춰 율도군 주둔지로 방문하겠노라 답변을 보내왔다.

한유리는 6사단 참모장에게 부탁해 대월국 7왕자, 아니 곧 대월국왕의 왕관을 계승할 이를 대접하기 위한 만찬을 준비했다.

그녀의 부탁을 받은 참모장은 식자재 보급을 맡은 군수 분야 참모들은 물론 주둔지 내 최고 실력을 가진 취사병들을 총동원했다.

대월국 등 도깨비들의 음식은, 좋게 말하자면 다른 나라에 비해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워낙 소박한 편인지라 취사병들이 무슨 음식을 준비하든 대월국의 어떤 음식들보다 훨씬 나아보일 것은 자명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율도 백화의 안가에서 매일 같이 대접 받은 호화로운 음식들에 비하면 군대에서 만든 음식들은 초라해 보일지도 모르니 신경이 안 갈수가 없었다.

한유리가 사용하는 주둔지 내 막사에 만찬 준비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진효명이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대에 자신을 호위하는 율도군 무사들과 함께 성에서 내려왔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그러고보니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요.”

그는 한유리를 부인, 이라 칭하며 대월국 방식으로 우아하고 예의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율도에서는 그녀를 보통 작은 부인, 이라고 부르곤 했다. 첩이나 후처, 측실 같은 말은 멸칭으로 여겨질 수 있기에, 영부인인 이소영과 구분해 작은 부인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진효명은 ‘작은’ 이라는 단어를 빼고 그냥 부인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나중 자신의 왕비가 될지도 모르는 이의 모친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바쁜 와중에 이리도 누추한 곳까지 왕림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왕자 전하. 일찍이 율도 백화에 계실 적에 미리 이런 자리를 마련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별 말씀을요. 지금이나마 부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예나님이 누구를 닮아서 이리도 아름다우실까 늘 생각해왔는데 역시 미모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군요. 부인께서도 실로 아름답기 그지 없으십니다.”

진효명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어머니의 곁에 서서 수줍게 웃고 있는 예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예나님.”

“저두요, 왕자 전하...!”

예나의 두 뺨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진효명이 흥원성에 도착했을 때, 성에 남아 있던 흥원번의 무사들이 왕자의 호위를 자청하고 나섰다고 한다.

하지만 진효명은 그들의 뜻을 완곡하게 사양했다.

자신의 호위라면 이미 율도군이 담당하고 있는데, 대월국에 오자마자 율도군을 물리게 된다면 자칫 강운예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성산번에서 심운보에게 죽기 일보 직전 4군단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지고 율도까지 왔을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기간 동안 이곳에서 인질 생활을 하게 되겠구나, 체념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율도 생활 동안 그는 많은 심경의 변화를 겪었다.

특히, 왕위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 말이다.

대월국에서 그의 위치는 왕위 계승 서열 일곱번째 왕자.

즉,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다음 왕위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조금 심하게 말하면 정실 왕비 소생이라는 점 빼고는 후궁이 낳은 왕의 다른 자녀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는 수준의 위치일 뿐이었다.

위험이 따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월국왕이 심운보를 은허로 소환하기 위해 진효명을 성산으로 보낸 이유도, 정실 왕비 소생의 왕자들 중 그나마 ‘버려도 아깝지 않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재주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의 위로 다른 왕자들이 많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반란이 일어나고 대월국왕은 물론 자신보다 왕위 계승 서열이 높은 형제들이 모두 사망하게 되면서 상황이 급반전 되었다.

이제 진효명이 대월국의 제 1순위 왕위 계승자가 된 것이다.

부친인 국왕과 형제인 왕자들의 죽음은 그에게 있어서도 크나큰 비극이었지만,

동시에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 뒤바뀌게 되는 기회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 역시 왕가의 남자,

왕관에 대한 욕심이 없을 수 없었다.

물론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지금 율도에서 인질 생활을 하고 있는 주제에 왕위를 계승하겠다고 제 마음대로 대월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고,

대월국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왕성인 은허가 반란군에 포위되어 있으니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도,

또,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르더라도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자신을 후원해 줄 세력 역시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게 된다.

바로 율도의 태상국, 강운예였다.

마침 강운예가 측실의 딸 예나를 자신에게 소개시켜주는 등의 호의를 보이는 걸 보고, 그 역시 지금 전체적인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눈치채고 있었다.

자신이 율도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율도 역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걸 말이다.

그렇다면 적당히 받을 건 받고 줄 건 주면서 강운예의 지지를 얻게 된다면,

왕위 계승 서열 일곱번째 왕자가 국왕의 자리에 오르는 기적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예나는 아리랑 출신인 어머니의 피를 이어 받아서인지 상당히 아름다운 소녀였다.

측실의 소생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도 엄연히 마루한의 딸,

그것도 대동의 패권을 한 손에 틀어 쥐고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강운예의 자식.

이 조건 하나만으로도 일국의 왕비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강운예가 직접적인 언질을 한 건 아니지만 그의 의중은 분명해 보였다.

이대로 예나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면, 진효명은 대월국의 왕위에 오르는 동시에 대동 최강의 국력에 막강한 군사력까지 가지고 있는 율도로부터 든든한 후원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율도의 위세를 등에 엎고 왕가에 반기를 든 성산백 심운보, 명천백 피호석 등 반란군을 진압하는 건 물론,

늘 대월국을 위성국가 취급하며 얕잡아보는 천제국과의 관계도 확실히 정리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예상컨데 그에 따른 댓가 역시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율도가 건국되기 전부터 이어진 강운예와 대월국과의 악연도 정리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고.

앞으로도 몇 십년은 더 율도에 바쳐야 할 전쟁 보상금 문제하며, 반란군을 어떻게 진압하고 정리할지에 대한 문제,

또 이를 도와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무엇을 더 추가로 내놓으라 할지도 국가적 골치꺼리가 될 게 뻔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진짜 강운예가 자신을 위해 군사를 움직일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차례 있었던 강운예와의 식사 자리에서, 그가 던진 이야기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왕자께서는 대동의 국제 정치가 돌아가는 원동력이 무엇이라 생각하시오?’

‘전... 역시 신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의요? 하하, 국가간의 신의 역시 국제 정치의 중요한 요소이지요. 하지만 이 대동 땅에서 나름 오래 살아오며 여러 나라의 정치를 봐오다 보니 국제 정치는 신의 보다 다른 것에 의해 돌아가는 게 눈에 보이더이다.’

‘그게 무엇입니까, 기하?’

‘국제 정치가 돌아가는 원동력은 신의에 따라서가 아니라, 국가가 얻을 실리에 따라서 돌아가는 것이더이다.’

‘실리요? 다소 세속적인 이야기로 들립니다만?’

‘그리 생각된다면 유감이오만 사실이니 어찌 하겠소?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 경우는 대동의 역사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을 것이오. 이는 국제 정치란 신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국가의 실리에 따라서만 움직인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지요.’

‘...’

‘훗날 왕자께서도 국가를 운영하시게 될 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 날이 오면 꼭 명심하시오. 다른 나라에 이득을 주지 않고 외교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 건 불가능 하다는 걸 말이오.’

부왕과 형제 왕자들의 사망 소식과 함께 강운예가 자신을 대월국으로 데리고 오라는 명을 내렸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그 때서야 진효명은 강운예가 왜 그 때 식사 자리에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또,

배를 타고 흥원으로 돌아오며 율도로부터 태진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건설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도,

강운예가 자신을 대월국의 왕으로 앉히면서 그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흥원 땅과 이 도로라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반란으로 쓰러질 뻔한 나라, 번 한 두개를 내어주는 댓가로 왕가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결코 손해는 아닐 것이다.’

진효명은 강운예가 어떤 요청을 하든, 지금으로써는 뭐든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흥원성에 들어가 왕가의 친척인 흥원공 가족들을 만나보는 순간,

그의 머릿속이 매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한유리가 참모장에게 부탁해 준비한 만찬은 마치 현실 세계의 프랑스식 코스 요리와 매우 흡사한 율도식 요리들이었다.

한입 크기의 전체요리들로부터 스프와 비슷한 국물요리, 주요리를 먹기 전에 입을 개운하게 해주는 빙과에 강운예가 뭉텅이 구이라고 부르는 서양식 스테이크 스타일의 고기 구이까지.

율도 일류 요리사들의 음식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취사병들이 최대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최선의 음식들이었다.

다행히 진효명도 음식을 대해선 대체로 만족하는 듯 했다.

하지만 모녀와 대화 도중 간간히 보이는 어두운 표정은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왕자 전하, 혹시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지요?”

한유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부인. 더없이 만족스러운 식사입니다.”

“허나 왕자 전하의 안색이 저를 몹시 걱정스럽게 만드는군요. 혹여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셔요.”

이에 진효명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흥원에 온 건 몇 년 전 왕가의 사람들과 함께 이 부근으로 사냥을 왔던 게 마지막 일이었지요. 오랜만에 돌아온 흥원성의 모습은 그 때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는 괴로운 듯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흥원공의 가족분들은 제 기억 속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더군요...”

예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유리는 그의 말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유경패로부터 흥원공 부인과 그 자녀들의 상태 ­ 눈과 혀가 뽑히고 사지가 절단된 채 숨만 쉬고 살아 있는 흥원공 부인, 반란군들에게 강간 당해 강제로 임신당하고 정신까지 이상해진 두 딸, 남색의 유희 대상으로 전락했다가 대인기피증에 걸린 어린 아들 ­ 에 대해서 이미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왕자가 자신의 친척들이 끔찍한 몰골로 변한 것을 목격하고 얼마나 충격 받았을까, 하는 생각에 한유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이해가 갑니다... 역시 그것 때문에 표정이 좋지 않으셨군요?”

“네, 흥원공은 저희 왕가 일원들 중 가장 가까운 사이였고, 또 절대적인 충성을 보여주신 분이셨습니다. 지금 그 분께서 제 부왕 전하와 함께 천제국 놈들에 의해 유명을 달리하신 상황에서 그 가족분들마저도 그리 되신 것을 제 두 눈으로 보게 되니...”

식탁 위에 올려놓은 왕자의 두 손이 분노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천제국 놈들을, 그리고 반란군 놈들을 어떻게 벌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다보니, 부인과 예나님 앞에서 그만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아무쪼록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나는 왕자가 어떤 것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지 완벽하게 알 지는 못했지만, 천제국, 그리고 반란군이란 말을 듣고는 그를 위로한답시고 깊은 생각 없이 말을 꺼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아빠가 대월국으로 들어온 천제국군들을 무찌르러 나가신 걸요? 천제국군이 아빠에게 대패하고 자신들의 나라로 도망치는 건 시간 문제일 뿐이에요! 그리고 반란군들도, 아빠가 1개 군단 정도만 보내면 이 땅에서 깨끗이 없애 버릴 수 있을 거예요!”

“나도 태상국 기하께서 천제국군을 이 땅에서 완전히 축출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예나님. 그리고.”

진효명은 예나의 두 눈을 바라보며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반란군들 또한 그렇게 되도록 바라고 있습니다. 듣기로 내 친척들에게 위해를 가한 자들은 흥원공녀가 직접 복수했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반란이 없었다면 부왕 전하도, 내 형제들도, 흥원공과 그 가족분들도 지금과 같은 참화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반란군들은 반드시 징벌되어야 합니다. 반란을 일으킨 번주들은 물론 그 무리에 가담한 자들 모두 다 말입니다! 내 태상국 기하를 다시 뵙는 날, 이 문제에 대해 꼭 말씀드리려 합니다.”

“저도 아빠한테 부탁할게요. 왕자 전하를 도와 반란군들을 모두 소탕해 달라구요!”

식탁 뒤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유경패는 그들의 말을 듣고 표정이 어두워질 수 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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