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47화 (147/217)

〈 147화 〉 대동력 9,994년 5월 42일 (6)

* * *

­ 오후 4시, 율도 5군단 예하 직할대 주둔지

정국을 데리고 가는 주나라 무사들을 뒤쫓던 진채연과 최용준, 사승범 등에게 오늘 새벽 초원길 인근에 있는 5군단의 어느 부대로 예린이 걸어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하는 영매가 도착한 건 불과 몇 시간 전의 일.

그들은 추격을 중단하고 곧장 예린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래도 일부는 주나라 황자를 쫓아가야 하지 않겠소? 태상국 기하께서 황자 그놈도 꼭 잡아오라고 엄청 열 내시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한데.”

사승범의 말에 최용준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번에 놈들에게 국경이 뚫린 것 때문에 2군 사령관 을불군 대장이 독기를 잔뜩 품고 기다리고 있을거야. 영애를 찾은 거에 만족하고 황자와 주나라 무사들 잡는 건 을불군 대장에게 맡기자구.”

곁에 있던 진채연도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5군단 직할대 위병소에 도착한 적영단과 백영단 무사들.

진채연이 대표로 위병 근무자에게 군표와 태상국이 준 공문을 보여주자, 창을 들고 위병 근무를 서던 군사가 곧장 문을 열고 주둔지 안쪽에 있는 지휘부 건물을 안내해 주었다

지휘부 건물에 도착하자 해당 부대 무관이 나와 진채연과 무사들을 맞이했다.

그가 무사들을 2층에 있는 당직근무자들의 근무취침실로 안내하며 말했다.

“영애께서 좀 전까지 주무시고 계셨는데, 깨어나셨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무관의 말에 진채연이 물었다.

“새벽에 이리로 들어왔다고 했죠? 뭐라 하며 들어왔다고 하던가요?”

“그냥 자신이 태상국 기하의 큰 딸이고 보호가 필요하니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말하셨답니다. 당시 위병 근무자들이 상부에서 보낸 영애의 초상화를 기억하고 있어서 바로 문을 열어주었고, 당직근무자들이 달려가 영애를 보호해 안으로 모셨습니다.”

“보호가 필요하다니, 혹시 쫓아오는 사람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영애께서 부대안으로 들어오신 후 주변에 수상한 자들이 나타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애가 밥은 먹었나요?”

“네, 병사 식당 조식을 이리로 가져다 드렸는데 많이 시장하셨는지 한 그릇 다 드시고도 계속 더 달라 하시더군요. 야간 당직병 말로는 3인분 정도를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다 비우셨다고 합니다.”

그 말에 뒤에 있던 사승범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럼 황자가 영애를 굶기면서 데리고 다닌 건가?”

“설마, 둘 다 굶었겠지. 전에 옷도 훔쳐가고 그런거 보면 돈도 없었던 모양이고.”

진채연은 두 사람의 말은 신경쓰지 않고 계속 무관에게 질문했다.

“아침은 먹였고, 점심은요?”

“많이 피곤하셨는지 아침 식사 하시고부터는 계속 안에서 주무시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점심은 못드셨구요.”

진채연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이 녀석, 도대체 집 나와서 뭐하고 다녔길래...?!”

일행이 근무취침실 앞에 도착하고,

5군단 무관이 조용히 방문을 두드려 보았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가 들어가 볼게요. 모두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

진채연이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밤새 당직 근무를 한 무사들이 근무 교대 이후부터 점심 어간까지 취침을 하는 방이라 안에는 2층 침대 2개 외에 특별한 가구는 놓여 있지 않았다.

창문에 두꺼운 검은색 가림천이 드리워져 있어 안은 밤처럼 어두웠다.

진채연이 천천히 둘러보니 벽쪽에 있는 2층 침대 아랫칸에 예린이 누워있는게 보였다.

이 곳 부대에서 주었는지 몸에는 대충 맞는 전포를 걸치고 있었고, 이불을 둘둘 말아 배에다 꼭 끌어안고는 옆으로 몸을 웅크린 자세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잠들기 전까지, 아니, 잠자는 도중에도 울었는지 눈가는 물론 뺨 여기저기로 흘러내린 눈물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진채연은 그동안 고생한 생각에 예린을 만나자마자 머리를 한 대 콩, 쥐어박아 줘야겠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는 곤히 잠든 그녀의 머리맡에 앉아 조용히 이마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 오후 6시, 대월국 흥원번 흥원성 일대 율도군 주둔지

흥원에 남아 있는 율도군들은 율도 본토로부터 태진의 국경으로 이어지는 도로 건설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대월국과 같은 도깨비들의 나라면서도 율도의 주요 교역국이기도 한 태진은 그동안 양국 중간에 낀 대월국 때문에 육로보다 해상을 통해 율도와의 교역을 이어오는 중이었다.

육상 운송이 더 쉽고 안전하기는 했지만 대월국을 통해 물자를 이동시키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관세 등 세금을 내야 해서 비용이 두배로 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율도가 흥원을 차지하고 양국을 직접 연결하는 도로를 만든다 하니 태진 입장에서도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율도군이 자신들의 영토까지 도로를 연결할 수 있도록 국경까지 활짝 열어 주었다.

율도의 도로 건설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건 비단 태진 만이 아니었다.

이제 대동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천제국과 주나라 두 나라가 율도 몰래 손을 잡고 거록의 땅에 새로운 교역로를 만들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천제국에 반기를 거록의 두억시니 씨족들이 자신들의 신성한 땅을 침범하고 마음대로 도로를 놓고 있는 위나라 군사들을 도륙하고 작업 중이던 땅을 모조리 뒤집어 버린 일 역시 대동 천지에 파다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물론 두억시니 씨족들을 뒤에서 조종한 배후가 율도라는 사실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렇듯 거록의 땅을 만들어지던 대동 동부와 서부를 잇는 새로운 교역로의 개통이 요원해지는 반면잘 닦여진 율도의 초원길 도로가 흥원을 통해 태진으로 연결된다면,

대동의 나라들이 어느 길을 주요 교역로로 선택할지,

율도와 천제국 중 어느 편을 따를 지는 불보듯 뻔해지게 된다.

그래도 이 과정에서 율도가 감수해야 할 위험 요소는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애초에 흥원 땅은 율도가 아니라 대월국의 영토였기에, 아무런 명분없이 무력으로 차지했다가는 분명 대내외적인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목적으로흥원공녀 진미령의 동의 하에 군대를 진입시켰으니 표면적으로나마 잘못된 일이라 말하기 힘들게 되었고,

대월국왕과 모든 왕위 계승자들의 사망으로 자연스럽게 대월국의 다음 왕위를 물러받을 수 밖에 없게 된 (강운예의 사위가 될 지도 모르는) 7왕자 진효명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 역시 율도군이 대월국 내에서 마음껏 군사 활동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되어 주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대월국왕을 누가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는 상태였다.

흥미로운 점은 실제로 환강산성에서 대월국왕을 암살한 율도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있는 반면,

엉뚱하게도 천제국 측에서 먼저 대월국왕이 자신들을 배신하고 성 안에 있던 자국 군사를 공격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성을 포격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왕과 왕자, 국왕파 전력 대부분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는 것이다.

율도의 대처와 비교하면 대월국을 무력으로 장악하겠다는 야욕을 거침없이 보여준, 정치 외교적인 측면으로 보면 뒤에 있을 일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지한 대응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이에 대한 의외의 반응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반란군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대월국왕이 살아 생전 율도 다음으로 대동에서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천제국을 끌어들이자 성산백 심운보 대신 반란군 수장의 지위에 오른 명천백 피호석을 중심으로 한 이들이 전황의 불리함을 깨닫고 율도에 복속해 보호를 약속받고자 했는데,

천제국이 대월국왕을 제거해버리자 반란군이 천제국군과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할 명분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율도에 복속하게 된다 하더라도 계몽전쟁 이후부터 전쟁 보상금 명목으로 계속 지불해 오던 비용들을 감면해 줄지 어떨지도 모르는 상황.

이렇게 된다면 차라리 율도보다는 천제국에 복속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기류가 반란군 내부에서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정선교가 반란군 내부에 미리 보내놓은 이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영향도 있지만,

애시당초 이익에 따라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이었으니만큼,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그 얄팍한 속내가 어디 안가는 탓도 있었다.

유경패를 통해 율도에 보호를 요청하는 피호석의 서신이 당도한 후, 강운예는 사람을 보내어 모든 반란군은 군대를 해산하고 각자의 번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피호석은 왕성 은허에 대한 포위를 풀고 50리(약 20km) 밖으로 병력들을 이동시켰을 뿐, 아직 반란군을 해체하지 않은 상태였다.

분명 율도와 천제국 둘 중 어디에 붙을지 확실히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습이었다.

만일 반란군이 계속 은허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반란군을 주둔시킨다면 7왕자 진효명을 은허로 입성시켜 새로운 대월국의 왕으로 즉위시키려는 강운예의 계획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부득이하게 반란군과 전투를 치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반란군이 천제국과 손을 잡음으로써 또다른 전선을 형성하게 되어 전력이 분산될 수도 있었다.

주나라와의 국경은 얼마전 정국을 데리러 온 강용영 무사들이 국경을 돌파해 들어온 일로 다소간의 긴장이 감돌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특별한 전운은 느껴지지 않는 중이고,

남쪽 파림의 경우 천제국으로부터 약속받은 화약 등 무기가 도착하지 않은 것 때문에 무수막 국경지대에 대한 모든 공격을 중단하고 다만 율도의 보복 공격에 대비해 오로지 방어전만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되면 남아있는 율도의 상비 전력은 물론 예비 전력까지 언제든지 대월국으로 투입할 수 있게 되겠지만,

그래도 지금 4개 군단 전력에 비전투 인원 포함 20만 정도의 병력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어마 어마한 전비와 물자가 소모되고 있는데, 국가의 존망이 걸린 총력전도 아닌 전쟁에 지금보다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하고 더 많은 비용을 쏟아붇는다는 건 자칫 국가 경제를 휘청이게 만들 수 있는 일이었다.

강운예는 정선교의 천제국군을 대월국 밖으로 축출하고 진효명을 대월국의 왕으로 내세워 내란을 종식시킨 뒤, 공식적으로 흥원을 할양 받고 대동을 동서로 잇는 완벽한 초원길 도로를 연결하는 것으로 이 모든 사태를 종식시키고자 하고 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대동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마루한이라도 세상 일이란게 모두 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엄마! 엄마!”

“예나야! 예나야! 사랑스러운 내 딸!”

율도군 기병들이 호위하는 마차에서 내린 예린은 어머니 한유리를 보자마자 그녀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예나야. 엄마가 갑자기 사라져서 많이 놀랐지?”

“평연당 집사 아저씨가 엄마 아빠 따라가신 거라고 알려주셨어요. 아빠랑 있으니까 걱정은 안들어지만... 그래도 다음에 어디 가실 때는 꼭 말이라도 해주고 가세요! 많이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래, 미안하다. 그때는 엄마 마음이 너무 급해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께. 나중에 어디 갈때 꼭 어디 간다고 너한테 말해주고 갈께. 나도 우리 딸 많이 보고 싶었어!”

아직 백영단의 전포와 갑주 대신 일반 무사의 무장을 하고 있는 유경패가 다른 무사들과 함께 마차에서 에나의 짐을 내리는 걸 도와주었다.

모녀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숙소로 사용중인 주둔지 내 막사로 걸어갔다.

“오는 동안 많이 힘들었지?”

“우리 나라 국경까지는 길이 잘 나있어서 오는데 별로 힘들지 않았는데요, 대월국 들어오면서부터 조금 힘들었어요. 여기는 우리 나라하고 달라서 중간 중간에 도로가 제대로 안 놓인 곳이 많더라구요.”

“아무래도 우리 나라보다 발전이 더딘 나라잖니. 네가 이해하렴.”

“그런데 오다보니까 여기 대월국에는 아직도 옛날 성들이 많이 남아 있더라구요! 저기에도 성이 있구요! 저런 성은 그림책에서 밖에 못 봤는데, 직접 보니 너무 신기해요!”

예나가 주둔지 너머로 보이는 흥원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유리는 인자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대월국은 아직도 모든 번의 번주들이나 영주, 성주들이 성을 짓고 살고 있다고 하더구나.”

“어머, 그럼 왕두요? 대월국의 왕도 성에서 사나요?”

“그럼! 대월국의 왕성인 은허에는 이 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이 있다고 하던걸?”

한유리는 딸의 허리를 꼬옥 안은 채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조만간 네가 그 멋진 은허 왕성의 여주인이 될 거란다. 이 나라 새 왕의 왕비로서 말이다.”

왕비, 하는 말에 예나의 입에도 미소가 머금어졌다.

“아빠가 절 이리로 오라고 하신걸 보면... 확실히 그렇게 되겠죠?”

“당연하지! 네 아빠가 일을 조금이라도 허투루 하실 분이니?”

“당연히 아니죠!”

모녀는 서로의 허리를 부둥켜 안고 까르르 웃었다.

“그런데 엄마, 왕자님도 여기 계세요? 저보다 먼저 배타고 들어오실거라고 듣긴 했는데?”

“아직 여기 주둔지로는 안들어 온 모양인데? 아마 저기 흥원성으로 먼저 간게 아닐까 싶구나.”

“흥원성으로요?”

“응, 원래 저 성에 사는 사람들이 왕실의 친척들이라고 하더구나. 오랜만에 자신의 나라로 돌아왔으니 먼저 친척들부터 만나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맞아요! 왕자님은 무척 다정하신 분이라, 분명 그러셨을 거 같아요!”

예나는 흥원성의 높다란 첨탑을 동경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