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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춘추 - 리부트-145화 (145/217)

〈 145화 〉 대동력 9,994년 5월 42일 (4)

* * *

­ 오후 1시, 대월국 서래번 동쪽 일대

밤 사이 야습을 마치고 돌아온 영록과 용마로 소장의 기병들은 조를 나누어 번갈아 가매를 취했다.

따스한 5월인지라 침낭 등 이부자리는 필요치 않았다. 무사들은 대부분 평평한 땅에 갑주를 입은 채로 몸을 뉘이고 투구나 전통 등을 베게 삼아 꿀잠을 자는 중이었다.

야습에 임한 율도군들은 모두 강운예의 명으로 천제국 숙영지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100보 ~ 150보 가량 떨어진 거리에서 눈에 들어오는 적을 활로 쏘아 맞추고 퇴각했다가, 다시 돌아와 또 눈에 보이는 적군을 저격하고 달아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숙영지 주변을 순찰하던 천제국 기병들이 부리나케 달려오곤 했지만 너무 멀리까지 추격해 오지는 않았다. 본진에서 멀리 나왔다가 어두운 밤 어딘가에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율도군들에게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가득했던 것이다.

이번 야습 때에도 편전을 다루는 강지헌의 놀라운 솜씨가 빛을 발했다.

그는 어두운 밤 중에도 방패 위로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경계를 서고 있던 천제국군들의 이마 한 가운데에 연신 애깃살을 박아버렸다.

영록이 본 것만 6명 정도를 그렇게 단 한 방의 화살로 해치운 듯 싶었다.

‘무슨 부엉이도 아니고, 밤에 그렇게나 멀리 떨어진 사람 얼굴을 어떻게 보고 쏘아 맞추는 거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활솜씨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강운예의 증손자라는 강지헌이란 사람에 대한 궁금함 때문인지 야습으로 밤을 지셌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성시우 대위에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무사들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곧장 강지헌이 쉬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얼굴을 보면 예린이나 예은이처럼 이목구비 뚜렷한 아이돌 연예인처럼 생기지는 않았어. 할머니나 어머니가 한자손이었을지도 모르겠는걸?’

영록이 생각하는 것처럼 강지헌은 현실 세계 동양인, 그 중에서도 연예인과는 거리가 먼 일반인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눈매 만큼은 강운예와 비슷하게 날카로운 느낌을 주고 있긴 했지만, 조각같은 얼굴의 예린, 예은, 주나라의 정국 등과 비교하면 다소 평범하고 둥글둥글한 인상이었다.

마침 강지헌도 깨어 있었다.

동료들이 쉬고 있는 곳에서 한참을 더 올라가야 나오는 능선 위에 몸을 숨기고 주변을 경계하며 쉬는 중이었다.

그는 각궁의 시위를 고자에서 빼어 활대를 거꾸로 풀어 놓고 있었다. 물소의 뿔이 주 재료인 각궁은 활의 탄성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이처럼 시위를 풀어 놓고 있어야 했다.

언듯 봐도 일반 기병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장력도 더 셀 것처럼 보이는 활이었다.

활 옆에는 화살이 든 전통이 바위에 기대어져 있었는데, 전통의 모양도 다른 무사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일단 화살을 꽂는 곳이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뒤에는 일반적인 길이의 기다란 화살와 여러 가지 종류의 보조 화살들이 꽂혀 있었고, 앞에는 성인 남자 팔뚝 정도 길이의 짧은 애깃살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대나무통, 통아도 함께 들어 있었다.

‘조선에서 사용한 편전을 율도군도 사용하다니 신기한걸? 하긴, 대동에 처음 넘어온 사람들이 조선시대 사람들이었으니 조선시대 무기를 쓸 수도 있겠지.’

화살을 하나씩 빼어 숫돌로 화살촉날을 날카롭게 벼리고 있던 강지헌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아, 마루한! 어찌 이 곳까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괜찮아요, 그렇게 인사 안하셔도 되요. 강지헌 중사님 맞으시죠?”

“네, 그렇습니다. 마루한께서 어떻게 제 이름을...?”

“용마로 소장님께 들었어요. 궁금한 게 있어서 왔는데 물어봐도 되요?”

영록은 궁술에 대해, 특히 어떻게 야간에 그렇게 정확하게 적을 명중시킬 수 있었는지 물었다.

자신있는 분야를 물어봐서였을까, 강지헌도 신이 난 표정으로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결국에 어둠속에 얼마나 빨리 눈을 적응시키느냐가 관건입니다. 어둠에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낮에 활을 내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게 됩니다.”

“그럼 야간에 활을 쏘는 연습을 엄청 많이 하셨겠군요?”

“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늘 자발적으로 야간에 활 100대를 내고 모두 명중시킨 후에야 병영으로 돌아와 잠을 자곤 했으니까요.”

“네? 100대, 100발씩이나요?”

매일 밤 활을 100 발 쏘았다는 말에 영록은 입이 떡 벌어졌다.

대동, 그 중에서도 율도군에서 사용하는 활은 보통 현실 세계 단위로 약 50 ~ 60 파운드 (23 ~ 27kg)의 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정도 장력이면 단 한 번도 활을 잡아본 적 없는 일반 성인이 맨손으로 간단히 당기기 힘든 정도의 세기이다.

게다가 몽골리안 사법과 똑같이 엄지손가락만을 이용해 활 시위를 당기는데, 깍지를 낀다 해도 손가락 하나에 가해지는 힘은 어마무시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보통 무사들은 훈련할 때 적게는 15발에서 많게는 50발까지 활을 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이상 활을 당기면 손가락은 물론 팔꿈치와 어깨에도 엄청난 무리가 가해지기 때문이다.

영록도 평연당에 있을 때 적영단, 백영단 무사들에게 활 쏘는 걸 배운 적이 있었다.

제일 가벼운 장력의 활로 10여 대 정도만 쏴도 손이 아리고 어깨가 뻐근해지곤 했는데,

매일 매일 100대의 활을 쏘았다니...

갑자기,

‘이 사람도 옛날 활을 다룬 영화 속 주인공처럼 화살을 휘어지게 곡사로 쏠 수 있는 거 아냐?’

이런 생각도 들 정도였다.

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영록이 화제를 바꾸었다.

“강운예 관장님도 중사님의 활솜씨를 보시면 분명 크게 칭찬해 주실 거예요.”

강운예라는 이름을 듣자 강지헌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 그것도 부군단장님께 들으셨습니까?”

“네, 맞아요. 관장님의 증손자 되신다고 얘기 들었어요. 증손자 맞으시죠?”

“맞긴 합니다만...”

“중사님도 관장님을 뵌 적이 있으시죠?”

“예, 어릴 적 몇 번 찾아뵙고 인사드린 적 있습니다.”

“군에 들어오셔서는 만나 뵙지 못하신 건가요?”

“네...”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강지헌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의 부친과 조부는 반역자입니다. 저는 반역자의 후손이고 태상국 기하께 부끄러운 자손일 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중사님은 여전히 관장님의 가족이고 증손자시잖아요? 관장님이 진짜 중사님을 부끄러워 하시는지 물어본 것도 아니구요.”

“태상국 기하께서 저를 어찌 생각해 주실런지는 모르오나, 가족들로부터 누누이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와 제 가족들이 두 번 다시 그분 앞에 나타나지 않고 죽은 듯이 사는 것이 태상국 기하를 돕는 일이라구요.”

영록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계몽 전쟁 때 중사님의 조부와 부친이 어떤 일을 했는지 저도 들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반역에 대한 책임은 중사님의 조부와 부친께 있는거지 중사님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두 분 다 율도의 법에 따라 유배와 감옥 생활을 하며 정해진 형기를 모두 마쳤다고 하구요. 그런데 관장님이 중사님을 왜 부끄러워 하시겠어요? 그건 역시 중사님이 관장님을 직접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 서로 오해도 풀고 앙금도 풀고 그럴...”

영록이 말을 마치기도 전,

갑자기 강지헌이 급히 몸을 일으키며 허릿춤에 있는 군도를 뽑으려 했다.

능선 밑에서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강 중사님! 거기서 마루한과 함께 계신 겁니까?”

다행히 115 기병여단 소속 무사였다.

강지헌이 군도를 도로 칼집에 넣으며 말했다.

“마루한께서는 여기 계시네. 무슨 일인가?”

“즉시 이동 준비 해야 한답니다. 그래서 부군단장님께서 마루한부터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아직 자느라 점심 못 먹은 이들도 많을텐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

“정확한 건 잘 모르겠지만 북쪽에서 우리군이 대규모로 천제국군을 공격하려 하고 있다고 합니다.”

“뭐? 북쪽에서? 어째서 북쪽에 대규모 우리군이 있다는 거지? 이번 작전은 모두 소부대 단위로 흩어져서 하고 있던 거 아니었나?”

“그게 우리 2군단이나 6군단 기병들이 아니라, 대원수 친위군단이 벌써 북쪽까지 진군했다고 합니다.”

“대원수 친위군단이라고? 그럼 지금 대원수 기하께서?”

대원수,

태상국 강운예의 또 다른 호칭,

대원수라는 말을 들은 영록도 놀란 표정으로 강지헌의 얼굴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 오후 1시, 대월국 서래번 일대

새벽까지 계속 된 율도군의 기습 탓에 천제국군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죽거나 다친 인원은 100여명 정도 뿐이었으나, 밤새 숙영지를 경계하느라 모두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이다.

걸음을 걷다 꾸벅 꾸벅 조는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 손에 든 창과 무기를 땅에 떨구는 이들까지 있었다.

잠을 설친 건 정선교도 마찬가지였다.

잠들만 하면 어딘선가 들려오는 총소리에 눈을 뜨기도 하고, 옆에서 함께 자던 벌거벗은 궁녀들 중 하나가 지르는 찢어지는 비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기를 십여 차례.

기병들로 하여금 숙영지 주변에 순찰을 돌게끔 지시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강운예, 이 상놈의 자식 같으니! 100여년 전 주신에서도 이러더니 지금도 똑같이 하고 있어? 그러면 내가 네놈 꾀에 또 넘어갈 줄 알았더냐?”

천제의 수레 곁을 호위하는 친위대 두억시니들마저 살짝 졸린 눈으로 행군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정선교는 이맛살을 구기며 늙은이처럼 궁시렁거렸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 우리 세가 그 때보다 줄어들고 네놈 세가 우리보다 많아졌을지는 몰라도! 내게는 네놈 군대를 한 번에 초토화시킬 수 있는 화력이 있어! 또 지난날처럼 언덕 위에 진을 치고 막아 볼테면 막아봐! 시체조차 잦을 수 없게 갈가리 찢어죽여줄 테니까!”

그는 저멀리 언덕 위에 배치한 천제벽력포를 돌아보며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그 때,

친위대장이 말을 타고 수레쪽을 다가왔다.

“271 연대로부터의 전갈입니다! 적의 대규모 기병 부대가 우리의 우익을 공격하려 하고 있다 합니다!”

그 말에 정선교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사라졌다.

“뭐? 대규모 기병 부대? 강운예가 온 것이라 하더냐?”

“아직 확인된 바는 없사오나 지금과 같은 소부대 단위가 아닌 최소 사단급 규모의 기병들이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율도군의 사단급 기병들이라면 순수 전투 병력으로만 4,000 ~ 5,000명에 달하는 규모다.

이렇게 보면 형편없이 적은 숫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현대전에 비유하면 4천여대가 넘는 전차와 장갑차들로만 구성된 기갑부대와 맞먹는 전력이었다.

“지, 지금 당장 천제벽력포들을 모두 놈들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돌리라 해라! 모든 포를 놈들에게 집중시키라고 해!”

“하오나 성하, 안타깝게도 사거리로 인해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천제벽력포가 대여섯 문 안팎으로 제한될 것으로 사려됩니다!”

율도군이 접근하고 있는 곳은 행군로 우익 중에서도 최우측 선두로 앞서 나가 있는 보병 부대가 있는 곳.

친위대장의 말대로 현재 포진지 위치 상 그 곳까지 포탄을 날릴 수 있는 천제벽력포는 단 몇 문 뿐이었다.

“이, 이익...! 그럼 쏠 수 있는 것들부터 빨리 포격 준비하라고 해! 얼른! 놈들이 우익 산병이 무너뜨리면 곧장 본대로 치고 들어올 수도 있어! 본대도 모두 행군을 멈추고 현 위치에서 방어진을 구축하라 명하고!”

“네 성하! 분부 받들겠나이다!”

친위대장이 급히 말을 달려가고,

천제국군 모두 행군을 멈추고 북쪽을 향해 방어진을 갖추기 시작했다.

기병들의 접근에 맞서기 위해 창병들과 덩치 큰 두억시니들이 선두로 나가고, 보병들 사이 사이 활과 쇠뇌를 든 궁병들과 총병들이 사격진을 이루고 섰다.

갑작스런 적의 대규모 기습에 각부대 지휘관들은 대형을 유지시키고자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병력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모두들 분주하게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오로지 천제만은 병사들의 동작이 굼떠 보인다며 수레 위에서 혼자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적의 신무기, 이 박사가 그거 포탄 하나 당 폭발 범위가 대략 얼마나 된다고 그랬지?”

임강현 중장이 옆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군단 작전참모에게 큰 목소리로 물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포탄 하나 당 대략 반경 50간 (약 90m) 정도라고 했습니다!”

“50간? 그리고 흑영단이 가지고 온 놈들의 포진지에 대한 첩보로는 지금 우리가 공격하는 위치까지 사거리가 닿는 포는 최대 7문 정도 밖에 없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임강현 중장은 달리는 말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최전방에는 가벼운 무장의 빠른 경기병들이,

자신의 주변으로는 육중한 갑주에 말에 마갑까지 입힌 철기병들이,

검은 갑주를 입은 4천여 율도군 기병들이 마치 검은 파도가 대지를 휩쓸 듯 들판을 가로지르며 무서운 속도로 남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행군하는 천제국군의 우측 전방에서 산병 역할을 하고 있던 보병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워낙 대규모 기병들이 지축을 흔들며 달려와서 그런지, 천제국군도 미리 방어진을 갖춘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본 임강현 중장이 곁에 있던 전령 무사에게 소리쳤다.

“수기 신호를 보내라! 각 제대 중기병부대는 나와 함께 앞으로! 경기병부대들은 양 익측으로 넓게 벌려 적을 포위한다!”

전령무사가 나팔을 크게 분 후 양 손에 든 푸른색과 붉은 색의 수기를 어지러이 흔들었다.

그러자 철기병과 총기병으로 구성된 중기병부대들이 선두로 앞다투어 나오기 시작했고,

활과 창을 든 경기병들은 중앙의 중기병부대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흩어져 넓게 벌려서기 시작했다.

무사들이 군단장의 지시에 따라 진형을 갖추었을 때,

어느 덧 검은 파도와 같이 밀려드는 율도군 기병들은 천제국군의 200보 안까지 들어와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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