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대동력 9,994년 5월 42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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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시, 율도 초원길 남쪽 중부 지역 일대
강용영 무사의 얼굴은 방금 전까지만해도 찾아볼 수 없던 초조함으로 가득했다.
비록 수는 많았으나 제대로 된 무장도 갖추지 못했고 무예 실력도 보잘것 없는, 일반 병사 수준도 안되는 공물론자 폭도 수십 여명을 상대하는 것보다,
단단한 갑주와 제대로 된 무기로 무장한 율도군 무사 하나를 상대하는 게 더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는 율도군들 중에서도 강운예의 최측근이자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적영단.
그 명성은 이미 들은 바 있었다.
강용영 무사는 환도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상대가 최대한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적의 실력을 먼저 가늠한 후 반격을 노리겠다는 계산,
그리고,
이겨서 살아남든 져서 목숨을 잃던 간에 동료 강용영 무사들이 황자를 데리고 좀 더 멀리 달아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최용준은 두 손으로 움켜 쥔 장검을 어때 위에 비스듬히 걸쳤다.
사선으로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려치려는 자세,
그는 왼발을 앞에 두고 자세를 유지한 채로, 길바닥 위에 쓰러진 시체들을 넘어 성큼성큼 강용영 무사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의 탐색전도 하지 않고 단칼에 결판을 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강용영 무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사들의 단기 접전이라면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조금씩 거리를 좁히는 게 일반적인 일인데,
마치 잡병을 베려는 듯 거침없이 다가오는 최용준의 태도에 모멸감을 느낀 것이다.
그는 환도를 오른쪽 옆구리 아래로 내렸다.
상대가 강하게 내치치면 환도로 상대의 칼을 오른쪽으로 흘려막은 후 반격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최용준은 강용영 무사가 자세를 바꾼 것을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계속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난 널 이길 수 있다,
하고 몸으로 말하는 듯 했다.
‘이, 이놈이?!’
강용영 무사는 이를 악물었다.
두 사람의 간격은 5보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보통 검이나 도로 상대를 벨 때에는 날 끝의 1/3 지점을 이용하게 된다. 휘두르는 힘을 최대한으로 실어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도에 비해 훨씬 긴 장검을 가진 최용준이라면 이제 2 걸음만 앞으로 가면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짧은 환도를 쥐고 있는 강용영 무사는 상대의 첫번째 공격을 막아더라도 그보다 한, 두 걸음은 더 들어가야 공격을 넣을 수 있었다.
강용영 무사가 상대의 공격에 대해 어떻게 반격을 가할지 머리속으로 무수한 경우의 수를 그리고 있던 순간,
슉!
공격 가능 거리를 잡은 최용준이 거침없이 장검을 내리쳤다.
“흣!”
기합소리와 함께, 강용영 무사가 환도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왼발을 왼쪽 대각선으로 빠르게 옮겨디뎠다.
상대의 첫번째 공격을 흘려 막고 측면으로 빠지면서 비어 있는 옆구리나 목을 노리려는 것이다.
스릉!
소름끼치는 쇳소리와 함께 두 무사의 칼이 부딪혔다.
‘이제 네놈 칼이 미끄러지기만 하면 너는...’
강용영 무사는 최용준의 장검이 자신의 환도에 비끼며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는 손목을 급격히 돌려 반격하려했다.
하지만,
끼릭!
환도가 움직이지 않았다.
방어에 막혀 흘러내린 줄 알았던 최용준의 장검이 마치 접착제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환도에 딱, 달라 붙어 있던 것이다.
게다가,
그리 큰 체구도 아닌데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최용준은 칼끝으로 강용영 무사의 환도를 강하게 찍어 눌러 놓고는 꼼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었다.
장검 끝으로 환도의 칼날 중앙부를 누르고 있던 최용준이 팔꿈치와 손목을 오른쪽으로 돌리며 왼발을 1보 크게 앞으로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왼발을 축으로 오른발이 반원을 그리며 뒤로 회전했다.
끼리릭!
환도를 누르고 있던 장검이 강용영 무사의 목덜미를 향해 쑥 들어왔다.
그가 재빨리 몸을 옆으로 구르며 피하지 않았다면 목을 베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치잇!”
무사가 다급히 몸을 일으키며 환도를 치켜들었다.
무슨 말을 하든가 무언가 반응이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최용준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강용영 무사가 있는 것을 향해 다시 저벅 저벅 걸어 왔다.
‘내가 막을 걸 미리 알고 있었나? 아니면 내가 막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움직인 건가?’
일찍이 경험해 본 적 없을 정도로 빠른 대응이었다.
그는 땀에 젖은 손바닥을 바짓춤에 스윽 닦고는 다시 환도 손잡이를 강하게 고쳐 잡았다.
영록이 현실 세계에서 가져온 ‘비급’ 의 존재가 알려지기 전부터 강운예가 창안한 율도군의 무예는 대동의 모든 무사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최근 들어 주나라 등에서 지도층 자제들을율도의 경무관, 국무관 등으로유학 보내 율도군의 무예를 배워오게 하는 것도 모두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이를 통해 대동에 알려진 율도군 무예의 비밀이라고 하면,
첫 째, 모든 무예의 기술 구성이 공격과 방어는 물론 방어 이후의 반격, 반격에 대한 재반격까지 세분화 되어 있다는 점과,
둘째, 혼자서 춤을 추듯 무예의 형을 연마하는 기존의 수련 방법과는 달리 대련 위주의 실전적인 수련과 힘과 체력을 강화시키는 체력 훈련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셋째,
율도군의 무예는 영록이 가지고 온 비급처럼 검술, 창술, 격술 등 각 무예, 각각의 무기술마다 교범으로 정형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매년 새로운 기술 체계로 수정 보완 되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더 강한 무예로 거듭나고 있다는 점이다.
강용영 무사 역시 율도군의 무예 교범을 배껴온 책을 받아 보고 이를 수련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보고 수련한 것은 이미 십여 년 전에 나온 기술 체계들로, 지금 율도군의 무예와는 분명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공격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강용영 무사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 최용준의 빈틈을 찾았다.
두터운 갑주 위를 쳐봤자 칼이 들어갈리 만무했다.
상대를 벨 수 있는 노출된 곳이라고는 오직 목 위의 얼굴 부위 뿐.
‘그렇다면 저기를 노릴 수 밖에.’
무사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자세를 낮췄다.
최용준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장검을 오른쪽 어깨 위에 올리고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놈의 왼쪽을 잡으면 승산이 있다. 정면으로 치는 척 하다가 오른쪽으로 돌면...!’
속도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까 공물론자들을 도륙할 때에도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그의 보법을 따라오지 못했다.
‘게다가 저 정도의 중장갑주를 입고 있다면, 절대 내 발을 따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결심이 선 무사가 앞으로 도약했다.
그는 자세를 낮추고 상대의 허리를 베어버리려는 양, 환도를 왼쪽 허리에 두고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강용영 무사가 먼저 선공을 펼치자, 최용준도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고 재세를 유지했다.
슉!
무사의 환도가 공기를 찢으며 최용준의 허리로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최용준의 장검이 그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걸렸다!’
강용영 무사는 환도를 들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장검을 흘려 막는 동시에,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회전시켰다.
그가 상대의 등을 잡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자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최용준과 눈이 마주쳤다.
‘뭐, 뭐야?!’
놀랄 겨를도 없이,
왼쪽 팔뚝에서부터 오른쪽 가슴까지 차가운 칼날이 몸을 베고 지나갔다.
“크헉!”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고,
무사는 고통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자신이 장검을 내리치는 순간 강용영 무사가 방향을 바꾸자, 최용준도 오른발을 축으로 왼발을 뒤로 돌리며 바로 방향을 전환 했다.
그리고 손목 힘만으로 장검의 안쪽날(검을 들고 있는 이와 마주보는 방향의 날)을 이용해 사선으로 올려 베어버린 것이다.
어느새 머리 위에서 반원을 그린 최용준의 장검은 다시 오른쪽 어깨 위에 높게 세워져 있었다.
“이이익!”
강용영 무사가 반쯤 잘려 너덜거리는 왼팔 대신 오른손 만으로 환도를 쥐고 어떻게든 저항해보려는 순간,
최용준이 오른발을 빠르게 앞으로 내딛으며 장검을 강하게 내리 휘둘렀다.
쫘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검은색 장옷을 입은 강용영 무사의 몸이 대각선으로 두동강났다.
반으로 잘려 나간 무사의 몸, 그 중에서도 환도를 쥐고 있는 오른팔은 끝까지 싸우려는 듯 허공을 허우적거리고 있었지만,
절단되어 의지할 곳을 잃은 몸조각은 붉은 피를 뿌리며 땅바닥 위로 힘없이 미끌어져 떨어졌다.
“한 수 잘 배웠소. 지금은 영애를 구해야 되서 귀하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바로 떠날 수 밖에 없어 유감이지만, 돌아오는 길에 꼭 들러 무사의 예를 갖춰 장사지내 드리겠소. 귀하의 나라도 귀하의 충절을 기억할 것이오. 편히 가시오.”
최용준은 장검을 두 손으로 쥐고 싸늘히 식어가는 무사의 주검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그의 시신들을 길 옆으로 옮겨 놓은 후, 앞서 간 주나라 무사들을 추격하기 위해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행여나 달리는 말발굽에 시신이 훼손될까봐서였다.
“주나라 놈이라면 1합에 해치울 줄 알았는데, 좀 걸렸네?”
“수준 있는 상대였어. 명예롭게 싸우다 죽었으니 예를 갖춰 말하라구.”
최용준은 사승범을 조용히 다그친 후 투구를 쓰고 턱끈을 고쳐맸다.
그가 돌아오자 적영단과 백영단 무사들은 다시 서쪽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경여단 무사들은 이 곳에 남아 금줄을 치고 현장을 보존하는 한편,
팔 다리가 잘린 채로 살아남은 공물론자 생존자들에게 응급처치를 한 뒤 인접 부대에 전령을 보내 현장을 정리할 병력을 청하기로 했다.
그들은 바삐 움직이는 중에도 주변에 총을 든 무사들을 배치해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예린을 쫓아갔다가 총소리를 듣고 돌아온 세 명의 강용영 무사들은 이 곳으로 쉽게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골짜기 아래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소로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율도군들이 저렇게 달려가는 걸 보면 황자님과 무녀님은 먼저 이 곳에서 벗어나신 듯 하군.”
“우리 측 인원 중 살아서 생포된 이는 없는 것 같아. 율도군에 잡힌 건 모두 다른 놈들인게 분명하고.”
“그럼 굳이 율도군을 칠 필요는 없겠군. 우리도 조용히 여길 벗어나자.”
“우리 없을 때 말도 모두 데리고 달아난 거 같은데,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걸어서 국경까지 가야지.”
세 사람은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몸을 일으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전 13시, 대월국 호문번 북쪽 일대
작년까지 1군단장으로 임무를 수행하며 강운예와 함께 성산번으로 진군하기도 했던 을불군이 대장으로 진급하며 서부 육군 2군 사령관으로 영전해 간 뒤,
새로이 1군단장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103 대원수 친위 돌격 철기병 여단장, 16 기동 사단장을 맡은 바 있는 임강현 중장이었다.
그는 먼 옛날 강운예가 황금사자단을 창설했을 당시 맹장으로 이름 높았던 전설적인 장수 임충의 후손이었는데, 이 가문은대대로 유능한 무관들을 많이 배출해오기로 명망이 높았다.
임강현 중장 역시 박윤수 중장, 용마로 소장 등과 마찬가지로 젊은 시절 적영단에서 복무하며 강운예의 최측근에서 무관으로서 성장했는데,
철저한 작전 계획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투를 이끄는 박윤수 중장과는 달리,그는 계획을 준비하기보다는 뛰어난 전장 감각을 바탕으로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군을 지휘하고 적의 의표를 찔러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방식을 선호하는 무관이었다.
과거 대대장 시절 강운예와 함께 반란군과의 전투에 참전한 적이 있었는데, 전투 중적의 빈틈을 발견하자 마자 다른 부대들과 약속된 작전을 무시하고 과감하게 전진으로 뛰어들어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를 지켜본 강운예는,
“어떻게 지 조상 임충하고 하는 짓이 이리도 똑같을 수 있냐?”
라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렇듯 전장에서 임기응변식 전술을 자주 사용하는 임강현 중장을 보고, 많은 고위 무관들이 그가 중용되는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강운예는
“원래 전장에서 미리 계획한 작전이 그대로 먹히는 일이 몇 할이나 되는가?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작전을 세워 군을 신속하게 통솔할 수 있는 것 또한 훌륭한 재능이다. 게다가 그런 재능을 가진 자가 공격 위주의 부대, 그 중에서도 신속한 움직임이 생명인 기병들을 지휘하게 된다면 그 위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게 되지.”
라며 두둔하곤 했다.
이번 전쟁은 그가 처음으로 군단급 부대를 이끌고 참전한 전쟁이었다.
보통 1개의 기동 사단과 1개의 보병 사단, 그외 여러 여단들로 구성된 다른 군단들과는 달리, 1군단은 1기동 사단과 2기동 사단, 두 개의 기동 사단과 다수의 기병 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공병, 포병 등 다른 지원부대들도 있지만 이들도 모두 말과 수레를 이용해 신속히 이동할 수 있는 기동화된 부대들이었다.
강운예가 임강현 중장에게 내린 작전 명령은 흥원번으로 행군하고 있는 천제국군의 북쪽으로 기동하며 남쪽으로 기동하는 3군단과 함께 마치 포위 작전을 펼치려는 것처럼 행동해 적의 주의를 끄는 것.
그와 함께 적의 이목을 끌어서 산악지대 넘어 북쪽 반란군 지역을 통과해 천제국군의 배후로 돌아가는 대원수 친위 여단들의 기동을 적에게 노출시키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목을 끄는 데는 깜짝 놀라게 만들어 주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지.”
군단 예하 기병 정찰 연대 병력들과 함께 행군로의 측면을 보호하는 천제국군의 산병들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까지 접근한 임강현 중장은 망원경으로 주변의 지형을 훑어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2사단은 작전대로 계속 동쪽으로 기동, 1사단은 공격 준비 상태로 오후 1시까지 현 위치로 모두 집결하라 전하라.”
갑작스런 명령에 주변에 있던 참모들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 곳에서 전투를 벌이시려는 겁니까?”
“전투? 자네들이 생각하는 전투의 개념이 뭔데?”
임강현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참모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누가 전투를 하겠다고 했나? 천제국놈들을 놀라게 만들어서 확실히 이목을 끌려는 거지.”
“그럼 공격 준비 명령은 왜...?”
그는 씨익 웃는 얼굴로 천제국군들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내 기준에 지금 우리가 하려는 건 전투 축에도 낄 수 없다. 최소한 수천 명 정도를 죽일 수 있는거, 그런 게 바로 전투지 그 정도가 아니라면 단순한 군사 작전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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