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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춘추 - 리부트-143화 (143/217)

〈 143화 〉 대동력 9,994년 5월 42일 (2)

* * *

­ 오전 4시, 율도 초원길 남쪽 중부 지역 일대

예린을 뒤쫓아 온 강용영 무사들은 언젠가부터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 주변에 숨어 있을 것이다. 흩어져서 찾아라!”

무사들은 칼을 빼어 들고 주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길옆 숲속을 뒤지던 무사 하나가 벌목한 나무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나무들이 울창히 자라있는데다가 하필 그믐달이어서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

하지만 무사들 대부분은 무녀 연하 만큼은 아니더라도 마루한이나 마루한의 자손들은 물론,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기운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인기척은 없지만 무사는 저 나무들이 쌓여있는 곳 어딘가에 무언가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탕! 탕! 탕...!

별안간 밤하늘 너머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아까 자신들이 지나던 골짜기 소로가 있는 방향이었다.

“황자님이 계신 곳에 변고가 생긴 모양이다! 일단 돌아가자!”

“잠깐! 그럼 율도 영애는?”

“영애보다 황자님을 모시는게 더 중요한 일이잖나! 율도군과 조우한 것일 수도 있으니 서둘러!”

무사들은 오던 방향으로 뒤돌아 쏜살같이 뛰어갔다.

자신을 쫓던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예린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갔나...? 다 갔겠지...?”

그녀는 소리 나지 않게 조심히 나무 사이에서 빠져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하마터면 아무 것도 못하고 주나라로 끌려갈 뻔 했네. 뭐, 그래도 결국엔 아빠가 구하러 오셨을 거 같지만... 그랬다가는 주나라 사람들은 물론 우리 나라 군사들도 많이 죽고 다치게 되겠지?’

지난 번 성산번을 탈출할 때 자신과 영록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군사들이 움직였는지, 또, 얼마나 많은 4군단 무사들이 쓰러져 갔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나라의 영애로서 또 다시 그와 같은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뭐... 그건 그렇고...’

예린은 정국이 있던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 총소리는 뭐지? 우리 나라 군사들이 쫓아온걸까? 설마 우리 나라 군사들이 정국이한테 총을 쐈을리는 없고, 그 무사들과 싸움이라도 붙은 걸까?’

정국에 대한 걱정에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결심했으니 그렇게 할 순 없었다.

‘정국아, 주나라든 어디든 살아만 있어. 나중에 내가 꼭 다시 만나러 갈 테니까!’

예린은 군부대나 마을이 있을 법한 북쪽의 초원길이 있는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두 개의 달 모두 그믐달이기에 달빛 대신 은은하게 내려오는 별빛 아래,

숲속 소로 여기저기 흩뿌려진 붉은 핏물과 죽어 넘어진 시체들이 어둠 사이로 드러났다.

시체들 가운데 잘려나간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고통에 찬 절규를 내뱉고 있는 사람들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죽거나 다친 자들 대부분 김사미가 이끌고 온 공물론자들이었다.

십수 구의 시체들과 그와 비슷한 수의 부상자들 앞에,

강용영 무사의 시체 둘과 그들이 타고 있던 말들이 쓰러져 있었다.

온 몸이 총상으로 벌집이 된 것으로 보아 공물론자들이 총을 쏘려 하자 그들 앞으로 말을 타고 달려들어 총탄을 막아낸 듯 했다.

무녀와 다른 무사들이 황자 정국을 호위해 자리를 피하는 사이,

단 한 명의 무사가 홀로 길 위에 남아 김사미의 공물론자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베어 넘어진 자들 모두 그가 혼자서 쓰러뜨린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 피가 줄줄 흐르는 환도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율도군 보병들이 양쪽에 날이 있는 검을 제식 무기로 사용하는 반면 (율도군 기병들의 경우 달리는 말 위에서 적을 베기 쉽게 날이 휘어진 군도를 기본 제식 무기로 하고 있다. 또한 사관 이상 무사들은 전시 상황이 아닐 때에도 군 업무 중 제식 무기 외에 개인 소유의 무기를 휴대할 수 있다.),

주나라 무사들의 제식 무기는 현실 세계 옛 조선에서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길이가 짧은 환도였다.

값비싼 고래수염을 사선으로 엇갈려 감아 놓은 칼자루하며 화려한 장식이 새겨진 둥그런 코등이(방패),

유성금으로 만든 칼도 아니면서 수십 명을 상대하는 난전 속에서도 흠집 하나 안 나는 걸 보면 분명 황실의 무기를 만드는 장인의 작품이 틀림 없어보였다.

무사는 일행들의 말발굽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환도를 크게 휘둘러 날에 묻은 피와 살점들을 털어내고는,

입고 있는 검은색 장옷도 손으로 툭툭 털었다.

옷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는 것이다.

“이제 더는 입을 수 없겠군. 좋아하는 옷이었는데.”

율도 영토를 벗어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아무리 검은색 옷이라도 피냄새가 진동하는 걸 그대로 입고 다니는 건 무리였다.

무사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남아 있는 공물론자들을 노려보았다.

맞은편에 남아 있는 이들은 김사미를 비롯해 불과 6명 뿐.

동료 무사 둘이 희생해 총탄을 막아내는 그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

강용영 무사는 놀라운 속도로 수석식 소총을 든 자들부터 먼저 두 동강 내었다.

그리 길지도 않은 환도로 팔다리나 몸뚱이는 물론,

손에 든 총까지 모조리 반토막 내어버렸다.

그리고는 남은 자들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베어 나갔다.

공물론자들 중 총을 들지 않은 이들은 대부분 몽둥이와 같은 둔기를 가지고 있었다.

칼을 들고 있는 이들은 김사미를 비롯해 얼마 되지 않았다.

“아까 뭐라고 했지? 인민들의 나라? 너희들이 말로만 듣던 공물론자들인가?”

눈깜짝할 사이 홀로 수십여명을 베어버린 강용영 무사에게 기가 질린 듯, 김사미의 입술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네, 네놈... 아니, 다, 당신같이 절륜한 무예를 가진 자가 어째서 황제의 개로 살고 있는가? 사람은 원래 날 때부터 모두가 평등할진데, 감히 황제가 뭐라고 우리 인민들의 위에서 군림하며...”

“아가리 닥쳐라!!!”

무사의 우렁찬 일갈이 고요한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그 천한 주둥아리로 살아계신 신, 미한 다음으로 대동에 오신 마루한, 존엄하신 황제 폐하를 망령되이 일컫지 마라! 뭐? 인민들의 나라? 어차피 그 모든 것은 반역자들의 허울 좋은 말장난일 뿐이다!”

무사는 환도를 두손으로 잡고는 오른쪽 허리 아래로 비스듬히 내렸다.

“공물론자들이면 진나라에서 왔겠군. 네놈들이 이 곳 율도까지 왔다는 건 반역의 수괴들이 황자님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고...”

그가 천천히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를 친 이유나 배후 따위는 물을 필요도 없으니,”

갑자기 그의 눈에서 서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모두 여기서 죽여주고, 진나라에 있는 네놈들의 도당들도 모두 남김없이 죽여주마!”

파밧!

돌연 그가 앞으로 달려나오는가 싶더니,

슈칵!

소름끼치는 바람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붉은 핏물이 튀었다.

“으, 으아아아아아악!”

몽둥이를 들고 맨 앞에 서 있던 공물론자의 몸이 양쪽 팔과 함께 대각선으로 썰려 나갔다.

갑주로 보호되지 않는 몸이기에 이렇듯 단 한 번의 칼질에도 너무나 간단히 베어지는 것이다.

실제 철과 가죽으로 된 두터운 갑주로 몸을 보호하고 싸우는 전장이었다면 칼질 한 번에 이리도 허망하게 베어지는 일은 흔하지 않다.

갑주의 빈틈을 노려 베거나 찌를 수 있을 정도의 숙련된 무사가 세상에 널린 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일반 의복을 입고 있는 상대라면, 길이가 짧은 환도라도 무시무시한 살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더욱이 빼어난 무예를 가진 무사가 황실의 장인이 만튼 명검을 들고 있으니.

김사미와 공물론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주, 죽어라, 인민의 적!”

어디서 구했는지 태진의 도깨비들이 사용하는 얇은 외날의 기병도를 들고 있던 공물론자가 어깨 위로 칼을 치켜 들었다.

전력으로 사람 하나를 단칼에 반으로 갈라버린 탓에 강용영 무사의 오른쪽 측면이 비어 있었다.

그 순간,

무사는 몸을 돌리지도 않은 채, 오른손 하나로 환도를 잡고 손목을 기이하게 회전시켰다.

슉!

“크아아아악!”

팔을 깊게 베인 공물론자는 비명을 지르며 들고 있던 기병도를 떨어뜨렸다.

그와 함께 무사가 왼손으로 그의 오른팔을 잡아 팍, 하고 힘을 주어 당기는가 싶더니

오른손에 있던 환도가 어깨를 타고 수평으로 날아왔다.

콰아악!

다소 둔탁한 소리와 함께 턱과 아랫니가 붙어 있는 부위를 제외하고,

나머지 얼굴 윗부분이 그대로 피를 뿜으며 떨어져 나갔다.

이를 본 이들은 죽음의 공포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히에에에에엑~!”

무사는 턱과 아랫니 부위만 남아 있는 얼굴이 있던 자리에서 분수처럼 붉은 피를 뿜어내며 그 자리에 쓰러져 가는 시체의 팔을 여전히 붙잡고 있었다.

“흣!”

그는 시체를 잡고 그 자리에서 가볍게 한 바퀴 돌리더니, 겁을 집어 먹고 다리를 후들거리며 서 있던 키 작은 사내에게 훽, 던졌다.

“끄아아아악~!”

날아온 시체에 부딪힌 키 작은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시체와 함께 그 자리에 나뒹굴었다.

그가 점점 딱딱해지는 시체의 무게와 온몸을 적셔오는 피로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때,

푸슉!

어느틈에 그에게 달려온 무사가 시체의 몸 위로 환도를 내리찍었다.

환도는 시체를 뚫고 땅바닥에서 버둥거리던 키 작은 사내의 배까지 쑤시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셋이 죽고,

이제 남은 건 김사미를 포함해 세 사람뿐.

강용영 무사의 위용에 그들 모두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저, 저놈 괴물인가?!”

무사는 천천히 박혀 있던 환도를 빼어 들고, 끝장을 보기 위해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때,

갑자기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런... 내가 너무 정신이 없었나? 불청객이 또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강용영 무사는 두손으로 환도를 들고 김사미 일행의 뒤편을 응시했다.

무엇때문인지 수십 여명의 김사미 일당들 상대하는 동안 태연자약했던 그의 얼굴에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율도군이다!”

김사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는 100간 (약 200m) 정도 거리에서 점점 다가오고 있는 말 탄 율도군들과자신의 앞에 있는 강용영 무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들 골짜기 아래로! 죽기 싫으면 나 따라와!”

김사미와 살아 남은 공물론자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골짜기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강용영 무사는 그들이 도망치는데도 따라가지 않았다.

지금 그가 막아야 할 진짜 상대가 나타났다는 걸 느꼈던 것이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중무장한 율도군 기병들이 나타났다.

밤 중이라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핏 봐도 수십 여명은 넘는 숫자였다.

맨 앞에 있던 율도군 무사가 손을 들어 뒤에 있는 율도군들에게 정지 신호를 보냈다.

그들 앞에 널려 있는 무수한 시체 무리들과 부상 당해 신음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과,

환도를 빼어들고 길을 막고 서 있는 검은 장옷의 사내를 발견한 것이다.

“...혹시 귀하가 황자를 데리고 가기 위해 주나라에서 오신 분이오?”

의외로 맨 앞에 있던 율도군 무사의 목소리는 여인의 것이었다.

바로 진채연이었다.

예상치 못한 부드러운 물음에 당황한 듯, 강용영 무사는 전방을 향해 겨누어 들고 있던 환도를 밑으로 내렸다.

“...율도군이시오?”

“그렇소. 보아하니... 귀하의 솜씨요?”

진채연이 쓰러져 있는 시체들과 부상자들을 창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맞소.”

“다른 나라도 아니고 율도에 무기 들고 설치는 산적들이 있을리는 만무하고... 황자와 우리 나라 영애를 쫓던 이들이오?”

“...”

“황자와 영애는 지금 어디 있소? 아니, 황자는 당신들 나라로 데려가도 상관 없소. 지금... 우리 영애 어디 있소?”

진채연의 날카로운 물음에 강용영 무사는 말 없이 밑으로 내렸던 환도를 다시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말씀을 아니하셔도 귀하가 지키고 있는 이 길 뒤에 있다는 것 쯤은 짐작할 수 있소. 허튼 짓으로 덧없이 인생 하직하지 마시고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시오.”

강용영 무사가 환도를 머리 위로 높게 들어올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황제 폐하 만세!”

진채연 뒤에 있던 군경 여단 무사들이 소총을 들어 그를 겨누었다.

그 때, 최용준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상대는 무사요. 무사의 예를 지켜야 하오.”

그가 투구를 벗고 말 아래로 내려왔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할 필요 없잖아? 얼른 해치우고 황자랑 영애 데리고 간 놈들 따라가야지!”

뒤에 있던 사승범이 안타깝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최용준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상국 기하께 배운대로 행하겠다. 짧게 끝낼테니 걱정마.”

그는 말 안장에 묶어 둔 장검을 꺼내들었다.

율도군 쌍수검병들이 사용하는 장검보다는 조금 더 얇고 짧은, 강운예가 사용하는 유성금 장검을 본 따 만든 그의 무기였다.

최용준은 두 손으로 장검을 손에 쥐고는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상대를 노려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율도군 대원수 친위 정예 철기병단 최용준 대위요. 귀하의 가상한 기백은 인정하지만... 손에 인정을 두지 않겠소.”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의 몸에서 무서운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누구보다 사람의 기운을 정확히 느낄 수 있는 강용영 무사는 그가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율도군 대원수 친위 철기병단이라면...?”

“흔히들 적영단이라고도 불리지요. 자, 그럼 시작합시다.”

적영단, 이란 말을 들은 강용영 무사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하고,

최용준은 장검을 머리 위로 높게 들며 대적세를 취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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