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대동력 9,994년 5월 42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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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0시, 대월국 호문번 서쪽 일대
용마로 소장은 편전을 다루는 무사를 따로 불러 한동안 말 위에서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표정은 무척 심각해 보였다.
그는 이어서 뒤편에 있는 흥원공녀 진미령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진미령은 그가 율도군의 고위 장성이라는 것을 듣자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흥원으로 돌아가지 않겠소. 나도 당신 부대와 함께 싸울 수 있게 해주시오.”
용마로 소장이 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녀께서는 흥원으로 돌아가 가족과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내 부친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천제국 놈들에게 비참하게 돌아가신 게 분명하오. 놈들에게 복수하고 싶소. 자식 된 도리를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용마로 소장은 결국 동행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흥원공녀를 호위했던 115 기병 여단 무사들 역시 흥원으로 복귀하지 않고 용마로 소장 휘하에서 다시 전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오전 2시, 대월국 호문번 서쪽 일대
탕... 탕... 타당...
저 멀리 새벽 어둠 속에서 간간이 산발적인 총성이 들려왔다.
숙영 중인 천제국군들에 대한 율도군2군단과 6군단 예하 기병들의 기습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강운예의 지시대로, 율도군 기병들은 원거리에서 활과 총으로 눈에 보이는 적들을 저격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그렇게 먼저 기습을 가한 부대가 뒤로 빠지면, 어느샌가 또 다른 부대가 다가와 다른 곳에 기습을 가했다.
이렇게 율도군 기병들이 숙영지까지 깊숙히 들어오지 않고 멀리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탓에 천제국군은 아까처럼 천제벽력포를 쏠 겨를조차 없었다.
이 기습은 밤새도록 이어지게 될 예정이었다.
천제국군의 사상자는 시시각각 늘어나고 있었고,
행군에 지친 몸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기습에 대비해 경계 태세를 유지해야 되니 군사들의 전체적인 피로도 역시 크게 올라가고 있었다.
영록과 용마로 소장이 이끄는 기병들 또한 천제국군 숙영지 가까이로 접근해 있었다.
마침 먼저 기습을 마치고 철수하는 부대가 지금 천제국 기병들이 100여명 단위로 숙영지 주변을 돌며 수색을 펼치고 있다고 알려왔다.
용마로 소장은 세 명의 철기병을 척후로 보내 전방 상황을 확인케 하는 한편, 나머지 무사들은 소산시켜 주변을 경계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무사들은 말을 나무에 메어두고 조를 나누어 가면을 취하기도 하고, 경계를 하는 이들은 각성효과가 있는 찻잎을 씹으며 잠을 쫓았다.
영록도 용마로 소장과 함께 얕은 구릉지대에 몸을 숨기고 땅바닥에 편히 앉아 쉬었다.
하루 종일 딱딱한 말 안장에 앉아있으려니 엉덩이도 뻐근하고 허벅지 안쪽도 쓰라려왔다.
오래된 나뭇잎들이 쌓여 있는 흙바닥이 폭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것 좀 드셔보시겠습니까, 마루한?”
용마로 소장이 전투식량 안에 든 흑당을 건넸다.
이를 보자 지난날 성산을 탈출하며 4군단 무사들과 흑당을 나눠먹던 그 때와,
평연당에서 유리상자에 담긴 흑당을 수시로 꺼내 먹던 강운예의 모습이 연이어 떠올랐다.
“잘 먹겠습니다.”
영록은 흑당을 받아 입안에 쏙 집어 넣었다.
단걸 먹으니 지친 몸이 조금은 회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전에 아빠가 그러셨었지. 젊었을 때는 모르는데 나이를 먹으니 몸에 좋은 음식 먹으면 효과가 생기는 게 바로 느껴지신다고. 진짜 고생을 해 봐야 음식 하나 하나에서도 기운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구나...’
그렇게 갑자기 떠오르는 부모님 생각,
영록은 흑당을 씹다 그만 눈물이 차올랐다.
그는 공연히 손으로 얼굴을 마구 부비고는, 슬픈 마음을 전환하기 위해 용마로 소장에게 말을 걸었다.
“부군단장님. 아까 그 무사분, 아시는 분이신가요?”
흥원공녀를 호위해 오던 기병들 중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던,
편전을 다루는 무사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었다.
용마로 소장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무사들이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있다는 걸 확인하자 그는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대원수 기하의 증손자분입니다.”
“네?! 증손자라구요?!”
강운예의 자식이라고는 예린과 예은, 예나, 그리고 국무관에서 수학하고 있다는 예성 밖에 모르는데,
난데없이 증손자라니.
‘아... 관장님은 지금 영부인 말고도 전에 다른 부인들과 결혼한 적이 있으시다고 했었지? 예나 어머니처럼 후처도 많았다고 하셨고... 여기 대동에 사신 게 몇 백년 됐다 했으니 뭐 손자 뿐 아니라 증손자, 그보다 더 오래된 후손들도 있을 수 있겠지...?’
강운예 역시 대동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는 마루한.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놀란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대원수 기하의 아드님 중 계몽 전쟁 당시 왕정복고를 노리고 다른 나라들의 힘을 빌려 반란을 주도했던 사람이 하나 있었지요.”
“그 얘기는 전에 들어본 적이 있어요. 이름이 강원이라고 했던가...? 관장님이 어디 멀리 유배 보내셨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
“네, 그 사람은 섬으로 유배되어졌고 그의 가족들 중 반란에 가담한 이들 역시 율도의 법에 따라 감옥에서 정해진 형기를 마쳤다고 합니다.”
용마로 소장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그 무사가 마루한께서 말씀하신 섬으로 유배된 대원수 기하의 아들, 강원의 손자되는 사람입니다. 즉, 대원수 기하의 증손자이지요.”
“아, 그렇군요... 부군단장님은 예전부터 그 분을 알고 계셨던 거예요?”
“군단장님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적영단에 몸 담았었고 백영단장 임무를 수행하며 평연당에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대원수 기하의 가족들 얼굴을 거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그 분 보시고 많이 놀라신 거 같던데... 혹시 원래 관장님의 후손들은 군에 안 들어와도 되는데 그 분이 지금 군에 있어서 놀라셨던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지금 기하의 첫째 영식은 국무관에서, 큰 영애는 경무관에서 수학하며 무관의 길을 걷고 있지 않습니까? 기하의 후손들 중 남자들은 무관이 되지 않더라도 모두 병역의 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드리워졌다.
“그 사람 본인도 무관이 되고 싶었지만 반란에 가담한 자나 그의 직계 자손은 무관이 될 수 없다는 율도의 법 때문에 국무관 입학이 좌절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경무관까지 수료하고 바로 사관(무관이 장교라면 사관은 부사관에 해당)으로 임관했다고 합니다.”
“직계자손이면, 반란에 가담한 가문의 후손들은 영원히 무관이 될 수 없는 건가요?"
“아닙니다. 반란에 가담한 사람의 다음 세대 자녀들까지만 해당됩니다. 물론 그 다음 세대들도 무관 선발시 다른 이들보다 철저한 검증을 받긴 합니다만.”
“그 분은 강원의 손자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무관이 되는데 큰 문제는 없는 거 아니었나요?”
“그 아비되는 이도 강원과 함께 반란에 가담했었거든요.”
“아...!”
영록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관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해 무관이 되고 싶었다면 관장님의 후손이니 관장님을 뵙고 직접 부탁해 볼 수도 있었잖아요? 그러지 않았던 건가요?”
“대원수 기하께서 반란에 가담한 가족 분들을 직접 내치고 연을 끊은 것은 아니지만, 반란에 가담한 이들에 대해 추호의 동정도 없이 나라의 법대로 집행해 버리는 모습에 그들 스스로가 기하께 등을 올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 본인 말로도 국무관 입학 관련해서 기하를 찾아뵐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록은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런... 그럼 그 분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강지헌. 계급은 중사입니다.”
몇 가지를 더 물어보려고 할 때, 나뭇잎 밟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려왔다.
영록이 구릉 위로 고개를 내밀어보니 진미령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쉬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마루한. 혹시 시간 괜찮으신지요...?”
이번에도 그녀는 영록에게 하소연을 하러 온 모양이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화를 당하고 부친마저 돌아가신 것까지 확인했으니... 어디가서 속 마음을 털어놓기도 힘들테니 나라도 들어주자...’
영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구릉 아래로 내려왔다.
오전 3시, 율도 초원길 남쪽 중부 지역 일대
예린과 정국을 확보한 강용영 무사들은 율도의 반듯한 도로가 아닌 산과 들에 난 소로를 이용해 이동하고 있었다.
초원길 등 도로를 이용하게 된다면 율도 관리들의 눈에 띌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저녁부터 자정까지 잠시 눈을 붙인 뒤 밤새 서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무사들이 말고삐를 대신 쥐고 달리는 탓에 예린과 정국은 말 안장 앞에 달린 작은 손잡이를 붙잡고 말을 타야 했다.
‘그래도 도깨비들처럼 묶어서 끌고가지는 않네.’
달리는 말 위에서, 예린은 옆에서 나란히 말을 달리고 있는 정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국이 말로는 주나라로 가면 황제 폐하가 날 황자비로 인정해주고 앞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거라 했지만...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정국은 그녀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듯, 힘 없는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녀지만 예린은 결코 머리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4군단에서 도망쳐나오기 전 율도와 주나라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유학생 등 율도에 있는 주나라 백성 일부가 본국으로 송환된 사실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지금 주나라와 언제 전쟁을 벌일지 모른다는데, 과연 내가 황자비가 될 수 있을까? 황자비라는 자리는 서로 좋아한다고 되는게 아니라고, 정치적인 부분도 크게 작용할 수 밖에 없는 거라고아빠가 누누히 말씀하셨는데...’
그녀는 주변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강용영 무사들을 유심히 돌아보았다.
‘그럼 이들이 왜 나까지 데리고 가는 걸까? 정국이 하나 데리고 국경을 넘는 것도 힘들텐데 왜 나까지...? 정말 나를 황자비에 앉히기 위해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면...?’
인질.
자신을 인질로 잡고 강운예를, 그리고 율도를 압박하기 위해서.
예린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아빠가 지금 전쟁터에서 싸우고 계신데, 그런데 내가 지금 짐이 될 순 없어!’
예린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깊은 산속 중턱의 좁은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길의 폭이 좁아져서 모두 1열 종대로 말을 달려야 했기 때문에예린과 정국 좌우에서 말을 달리던 무사들 모두 뒤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마침 왼쪽으로 경사진 골짜기가 보였다.
‘나무가 많고 비탈이 심해서 말을 타고 쫓아오기는 힘들겠어... 그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
생각이 다 끝나기도 전,
예린의 가녀린 몸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앗! 영애!”
강용영 무사들이 놀라 다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무사들이 멈춰 선 사이, 말에서 뛰어내린 예린이 쏜살같이 골짜기 밑으로 내달렸다.
“이런 제길! 쫓아!”
강용영 무사 셋이 골짜기 밑으로 말을 몰고 내려갔다.
하지만 말이 가기엔 경사가 너무 급하고 나무 수풀도 우거져 있었다.
“말에서 내려! 뛰어서 잡는다!”
무사들이 말에서 뛰어내려 예린을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린의 모습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갑작스런 예린의 돌발 행동에 강용영 무사들도 저으기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혹시 황자도 도망치치 않을까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어 애워싸고 있었다.
“예린아...”
정국도 많이 놀랐는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더 쫓아갈까요?”
무사가 무녀 연하에게 물었다.
“우선 무사님 셋이 따라갔으니 기다려 보시지요. 우리에겐 무엇보다도.”
그녀가 살며시 웃으며 정국을 바라보았다.
“황자님을 보위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이니 말입니다.”
‘여기가 어디쯤이지? 아까 북쪽에 초원길이 있었으니까... 전에 아빠가 초원길 북쪽에 21사단이 있고 남쪽에 5군단 사령부랑 직할대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럼 이 근처에도 군부대가 있을거 같은데?’
예린은 전력질주 하면서도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둠속으로 산과 들의 윤곽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 군부대는 커녕 그 흔한 민가조차 보이지 않았다.
‘일단 계속 달려보자. 군부대가 없으면 숨을 만한 곳이라도 찾아 들어가면 되니까!’
사박사박사박사박사박...!
그때, 뒤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람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짜증나~! 벌써 따라온거야?!’
아직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소리로 미루어보아 분명 150간 (약 300m) 정도 뒤에서 쫓아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마침 저 앞에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꾼들이 벌목을 하고 쌓아둔 목재들이 있는 곳이었다.
아마 나무를 베고 나중에 옮기려 한 듯, 딱히 가지도 치지 않은 커다란 나무들이 아무렇게나 얼기 설기 쌓여 있었다.
‘좋았어! 저기다!’
예린은 발소리를 죽이며 나무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리입니다...”
무사 중 하나가 동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밤길을 지나는 상단일 수도 있으니 너무 신경쓰지 마시지요.”
연하는 건조하게 대꾸하며 골짜기 아래를 바라볼 뿐이었다.
“상단이라면 율도의 초원길을 이용했을 것입니다. 말 발자국 소리로는 대략 수십... 수레 같은 건 없습니다.”
이에 다른 무사들 모두 허릿춤으로 손이 들어갔다.
잠시 후, 저 멀리서 사람의 형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율도의 군이나 관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투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무사 하나가 칼을 뽑아 등 뒤에 숨긴 채로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군 작전 중입니다. 불편하시겠지만 다른 길로 돌아서 가주시기 바랍니다.”
임기응변으로 내뱉은 말에, 다가오던 무리들의 말 발자국 소리가 일시에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편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군 작전은 무슨. 어디서 율도군 행세야? 주나라 말투가 너무 티나잖아?”
무사가 칼을 들어 겨누며 소리쳤다.
“왠 놈들이냐?!”
“너희와 같은 주나라 사람. 아니, 주나라 사람이었던 사람들. 이제는 인민들을 위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힘쓰는 사람들이지.”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왔다.
어두운 장옷에 긴 머리 카락을 어깨 아래까지 늘어뜨리고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사내.
김사미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