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대동력 9,994년 5월 41일 (4)
* * *
오후 8시, 대월국 호문번 서쪽 일대
쿠우우우우우우웅...!
대동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부르르르, 지축이 흔들렸다.
히히이이잉~!
말들이 울부짖으며 길길이 날뛰고,
“워, 워~! 괜찮아, 관찮아!”
기병들은 놀란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진정시키기 바빴다.
영록도 놀라 앞발을 들고 펄쩍 뛰는 퍼시벌을 다독이느라 애를 먹었다.
영록과 용마로 소장의 기병들이 잠시 이동을 멈추었을 때,
서서히 저녁 어둠에 물들어가는 낮은 산자락 너머로부터 거대한 검은색 연기가 하늘 위로 솟구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앗, 저건?”
순간 영록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유튜브 영상에서 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거대한 버섯 모양 구름이 자신의 눈 앞에서 펼쳐져 있는 것이다.
‘뭐, 뭐야...? 천제국의 정선교란 사람, 설마 핵이라도 만든 거야? 무연화약도 못 만드는 대동에서 핵폭탄이라니???’
용마로 소장과 기병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천제국의 신무기 같은데, 보통 위력이 아니로군요.”
용마로 소장은 혀를 끌끌 찼다.
영록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천제국의 신무기라구요?”
“네, 우리 군에 투항해 온 천제국 기병대장이 알려주었는데, 엄청난 화력을 가진 거포라 하더군요.”
“아아, 신무기라니. 저건 거의 핵폭탄 수준인데요?”
“핵폭탄이요? 그건 무슨 폭탄이지요?”
“아, 그건 제가 살던 곳에 있던 무기인데요, 단 한 발만으로도 백화 정도 크기의 도시 하나를 날려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졌어요. 아마 관장님이 더 잘 아실 거에요.”
“단 한 발만으로 도시 하나를... 하지만 다행히도 천제국의 신무기는 그 정도 위력은 아닌 것 같군요. 게다가 아까 들린 소리로 봐서는 한 발이 아니라 수십발 정도를 쏜 모양이구요. 아마 포탄을 한 곳에 동시착탄 시켜서 저 정도 위력을 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런 무기가 있다면, 천재국군들과 진을 이루고 정면으로 싸우기는 곤란하겠군요.”
용마로 소장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저녁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검은 폭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9시, 대월국 흥원번 동쪽 일대 율도군 임시 숙영지
금일 정해진 이동을 마친 강운예의 친위군단 군사들은 천막을 치고 숙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천 여개의 군막들이 자리잡은 곳은 흥원번 동쪽의 작은 미을.
율도군은 금화를 주고 마을 촌장의 집을 하룻밤 빌려 강운예의 거처로 준비해 두었다.
강운예가 당번병들의 도움을 받아 갑주를 벗고 있을 때 쯤, 전속부관이천제국의 산병들을 기습하던 2군단 예하 기병들이 적의 신무기에 전멸당했다는 보고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보고서를 받아들고 읽어내리는 강운예의 눈에 분기가 서렸다.
“청선교, 이 미친 놈이...? 자기 군사들 상하는 건 조금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건가...!”
그가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명을 내렸다.
“지금 즉시 군단장들과 군단 참모들, 주요 여단 지휘관들과 참모들 모두 이 곳으로 소집시켜!“
“네, 알겠습니다. 기하.”
전속부관이 밖으로 나간지 얼마 안되어 고위 지휘관들과 참모들이 그의 거처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병력들을 돌아 보느라 아직 쉬지 않고 있었던지 갑주와 무장을 벗지 않은 상태였다.
그 사이 당번병들이 수송 물자 수레에 있던 탁자와 의자들을 꺼내 가지고 와 급히 회의 준비를 했다.
강운예는 지휘관들과 참모들이 모두 도착하자 자리에 앉히고 회의를 시작했다.
“정선교가 이리로 가지고 왔다는 무기의 위력이나 사거리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놈이 자기편 군사 죽는 거 아까워하지 않고 이렇게 마음껏 쏴댈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역시 이번에도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는 짓을 했더군. 예전에 주신의 지하 감옥에 너무 오래 처박아 둬서 그런가 돌아도 단단히 돈 모양이야.”
1군단장 임강현 중장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평야에서 천제국과 회전을 통해 결정적 전투를 벌이기로 한 기존의 작전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정선교 그 놈이 저런식으로 나온다면 근접전을 벌이게 될 우리 군사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될지도 모르니.”
탁자에는 군단 행정병들이 가지고 온 작전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율도와 천제국 양국 군대를 상징하는 조각들이 현재 병력들이 위치에 올려져 있었다.
“정선교 그 놈도 우리가 지금 이동 중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을 거야.”
강운예가 1군단을 상징하는 조각을 들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1군단장은 1사단, 2사단을 이끌고 북쪽으로 기동해서 천제국 놈들의 시선을 끈다. 그리고 3군단장.”
“네! 3군단장!”
대원수의 지모에 3군단장 박정인 중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3군단장 역시 군단 예하 3사단과 111기병 여단을 통솔해 남쪽으로 기동해라. 두 군단 모두 최대한 천제국 척후들에게 움직임이 노출될 수 있도록 하되, 적의 신무기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강운예가 율도군 무사 조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두억시니 형상의 천제국군 조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정선교 그 놈은 그동안 나한테 당한 게 있어서 2개 군단이 움직이는 것만 보고 우리가 지들을 포위하려 하는 줄 알 것이다. 대신 병력을 나눠 대응하지는 않겠지. 그랬다가는 우리에게 각개 격파 될 거라는 걸 잘 알테니까.”
그는 이번엔 크기가 다소 작은 율도군 무사 조각들을 천제국군 조각 주변에 가져다 놓았다.
“우리 윤수... 아니, 2군단장에게2군단과 6군단 예하 기병들은 소부대 단위로 천제국군을 기습하는 것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라 전하라. 단, 절대 근접전을 벌이지 말고 원거리 타격 후 바로 작전지역을 이탈하라 이르고.”
“네! 알겠습니다!”
강운예가 지도 위 금양장이란 지명을 손으로 가리켰다.
“양군의 이동 속도로 미루어보아 놈들은 분명 우리가 저들을 포위하려는 줄 알고 이 지점에서 멈춰서게 될 것이다. 4개 군단 규모 기병들이 삼면으로 둘러싸려 하고 있으니 제깟 놈들이 감히 이를 뚫고 전진할 엄두를 못내겠지. 그렇게 놈들이 저 위치에서 방어 준비를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친위 여단 지휘관들을 바라보았다.
101 대원수 친위 기마 엽병 여단
102 대원수 친위 기병 정찰 여단
103 대원수 친위 돌격 철기병 여단
104 대원수 친위 총기병 여단
각 여단장들은 대원수가 자신들에게 임무를 맡기려 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101, 102, 103, 104 여단은 북쪽으로 크게 우회해 적의 후방으로 향한다. 101 엽병 여단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보급로 상 적의 잔존병력들을 모두 소탕하라. 그리고 천제국으로부터 병력과 물자가 더 이상 유입되지 않도록 국경을 완전 봉쇄하도록.”
“네! 명 받들겠습니다!”
투구 대신 엽병여단의 전통인 검은색 가죽털모자를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있던 친위 기마 엽병 여단장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머지 3개 여단은 적의 후방에서 4군단 병력들을 기다리며 대기하라. 4군단장이 흑영단으로부터 정보를 받아 적의 신무기 제거 작전을 수립 중에 있으니, 각 여단은 4군단 병력들이 도착하는 대로 작전을 지원하도록 한다.”
“네! 알겠습니다!”
대답소리는 컸지만 여단장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결정적 전투는 4군단이 치르고 자신들은 지원 임무만 맡게 되었다는 것에 무사로서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강운예가 이들의 마음을 모를리 없었다.
“적의 후방에 위치한 신무기들은 각 포진지마다 2천에서 3천에 달하는 두억시니들이 지키고 있다고 한다. 포진 하나 하나를 정면으로 공격하게 된다면 우리 측 사상자도 많아질 수 밖에 없겠지. 첫번째 전략 목표인 적의 신무기들을 얼마나 조용하고 신속하게 제거하는가가 이번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4군단이 신무기들을 제거하게 되면, 주변에 남은 적들을 쓸어버리는 일은 너희 여단 무사들의 몫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창도 제대로 못 찌르는 포병 놈들보다 덩치 큰 두억시니들을 상대하는 게 더 무사다운 일 아니겠나?”
그의 말에 여단장들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나는 4 보병사단과 나머지 병력들을 이끌고 천제국군의 행군로상 서쪽으로 향하는 길 정면을 막겠다. 각 제대는 내일 아침해가 뜨는 즉시 이동한다. 참모들은 오늘 밤 안에 작전 계획 수정해서 예하 부대에 전파하고. 모두 신속하게 변경된 작전대로 이행할 수 있도록. 이상.”
야전에까지 나와 밤을 세워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자 참모들은 모두 표정이 어두워졌다.
원래 결정적 전투를 치르는 곳까지 모든 부대가 함께 이동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계획이 바뀌게 된다면 병력 운용 계획부터 각종 보급 수송 계획까지 모두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할 판이었다.
참모들이 각자의 막사로 부리나케 달려가 행정 문서들부터 수정하는 동안, 각 부대 지휘관들은 작전 지도 앞에 모여 새로운 작전에 따라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각자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기동할지 강운예와 추가로 의견을 주고 받았다.
남쪽으로 향하는 3군단의 경우 도시와 크고 작은 마을들을 여럿 지나게 되어 천제국군이 이들의 이동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테지만,
북쪽으로 가는 1군단과 친위 여단들의 앞에는 기병이 이동하기 힘든 산악지대가 있어서 기동로를 선정하기가 제법 까다로웠다.
만약 산악지대 아래 남쪽으로 진군하게 되면 적의 천제벽력포 사거리에 노출되었을 때 피할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게 되고,
산악지대 북쪽으로 진군하게 되면 천제국군들이 아예 율도군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거니와, 보급 물자 수송도 용이하지 않고,
더욱이 반란군의 영향력 아래 있는 지역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부담될 수 밖에 없었다.
얼마 전 명천백 피호석이 유경패를 통해 율도와 손을 잡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왔지만,
흑영단의 첩보에 따르면 반란군 전체가 명천백의 결정을 지지하며 율도 편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라고 했다.
천제국의 누군가가 반란군 주요 인물들과 이미 접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 12시, 대월국 호문번 서쪽 일대
수백의 율도군 기병들이 천제벽력포에 당한 후 2군단과 6군단 예하 기병들의 활동이 잠시 중단되었다.
하지만 밤하늘 사이로 수십여 마리의 영매들이 분주히 날아다니며 연락이 오가고,
적을 기습하되 원거리에서 타격하고 즉시 작전 지역을 이탈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은 기병들은 다시 천제국군들을 찾아 조용히 말을 몰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영록도 영매를 통해 새로운 작전 명령을 받은 용마로 소장과 함께 다시 말 위에 올랐다.
월말이라 대동의 밤하늘 위 붉은 달과 푸른 달, 두 개의 달 모두 얇은 그믐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붉고 푸른 달빛과 은빛으로 은은하게 내려오는 별빛 아래 수십여 명의 기병들이 천천히 동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을 때,
선두에서 척후를 보고 있던 철기병이 급히 정지 신호를 보냈다.
“전방, 한 무리의 군마가 다가옵니다.”
정찰 나온 천제국의 기병들일 수도 있었다.
활과 쇠뇌를 든 철기병 10여명이 말 위에서 활시위를 당기며 앞으로 나섰다.
영록도 옆구리에 찬 권총을 뽑아들고 전방을 주시했다.
달빛과 별빛 아래 사람과 말의 형상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둥.”
활을 든 철기병이 조용한 목소리로 오늘의 암구어 중 문어를 먼저 불렀다.
“...번개.”
저편에서 올바른 암구어의 답어가 들려왔다.
아군, 율도군이었다.
용마로 소장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2군단 부군단장 용마로 소장이다. 어디 소속 부대인데 지금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 기습 작전을 계속 수행하라는 대원수 기하의 명을 받지 못한 것인가?”
어둠속에서 나타난 기병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무관이 천천히 말을 몰아 다가오며 답했다.
“저희는 군단장님의 명을 받아 흥원공녀를 모시고 환강산성에 다녀온 115여단 소속 병력들입니다.”
“아, 천제국 신무기 위력에 대한 보고를 보내온게 자네들이었군?”
가까이 다가오자 율도군 기병들 사이로 흥원번 무사들로 보이는 도깨비들이 있었고, 몹시 지치고 실의에 빠진 듯 고개를 떨구고 있는 흥원공녀 진미령의 모습도 보였다.
“공녀를 모시고 다시 흥원으로 돌아가는 길인가?”
“네, 그렇습니다. 공녀를 안전히 모셔다 드린 후 저희도 다시 전장으로 합류하고자 합니다.”
“무사로서의 열의가 대단하구먼. 환강산성에서 적의 기병들에게 추격 당했었다 하는데, 부상자는 없는가?”
무관이 자신의 뒤에 있던 무사를 가리켰다.
신기의 활솜씨를 가진, 편전을 다루는 무사였다.
“이 친구의 맹활약 덕분에 모두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가면 군단장님께 포상이나 훈장이 수여될 수 있도록 건의드릴 생각입니다.”
“오호, 그래?”
용마로 소장은 무관의 뒤편에 있는 무사를 인자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니, 너는...? 아, 아니, 당신이 왜 이 부대에 있는 것이오?”
용마로 소장은 무사를 보고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항상 여유롭고 쾌활한 모습의 용마로 소장의 당황한 모습에, 영록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만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