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39화 (139/217)

〈 139화 〉 대동력 9,994년 5월 41일 (2)

* * *

­ 오후 5시, 대월국 호문번 서쪽 일대

폐허가 된 환강산성을 출발한 천제의 친정군들은 대월국으로 올 때와 달리 상당히 더딘 속도로 행군 하고 있었다.

1열종대로 줄을 지어 빠르게 걷는 게 아니라 방원진을 치고 사방을 경계하며 이동하는데다가,

후방에 모든 천제벽력포들을 방열시켜 놓고 친정군의 행렬이 포의 최대 사거리에 도달하면 전군을 정지시키고 포를 이동시켜 포진을 새로 세운 뒤 행군을 다시 출발시키기를 반복하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기습할지 모르는 율도군 기병들을 대비하기 위한 정선교의 명이었다.

천제벽력포가 행군중인 친정군의 전방 삼면을 향해 언제든지 포격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전체 병력의 1/10에 해당하는 1만이 넘는 병력들이 행군하는 본대의 사방으로 산개해 산병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율도군의 접근을 발견하는 즉시 그 방향으로 모든 천제벽력포의 화력을 쏟아 부어 초전부터 적을 압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천제벽력포가 위치한 포진지 주변에는 각 포 당 약 1,000여명, 총 2만이 넘는 보병들이 천제가 애지중지하는 이 신무기를 겹겹이 둘러싼 채 보호하고 있었고,

대월국과의 국경에서부터 환강산성에 이르는 길에도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1만 여명에 달하는 병력들이 요소요소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정작 천제와 함께 행군하는 본대 병력은 6만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제국의 병력들을 최대한 끌어 모은 게 이 정도뿐이라니... 거록의 두억시니들이라도 달래서 데리고 왔어야 했나...?”

모처럼 수레 밖으로 나온 정선교가 행군 중인 자신의 병력들을 둘러보며 끌끌 혀를 찼다.

200여 년 전 만해도 천제국이 한 번에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은 약 200만 명에 달했다.

그것도 두억시니들로만 말이다.

하지만 주신과의 이구 전투에서 순수 전투 병력으로만 10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강운예에 의해 완전히 녹아 없어져 버리고,

패전에 대한 책임을 모질게 묻는 천제에게 실망한 두억시니들이 무수히 거록으로 떠나버린 뒤,

천제국의 군사력을 몰라보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나라로부터 도깨비, 두두리, 아리랑, 미호랑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이들 중 능력 있는 이들을 기용하는 정책을 적극 펼치고 있긴 했지만 대동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율도를 따라잡기엔 아직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부족함이 많았다.

율도의 경우 주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서부와 파림 등 무수막의 국가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남부를 지키는 병력들은 물론 내륙 중앙의 예비군들을 고스란히 놔둔 채로, 대월국과의 국경을 지키던 동부의 2군단과 대원수의 친위군단, 북부 초원길을 치키는 북부의 일부 부대들만을 이번 전쟁에 동원한 반면,

천제국은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주신과의 국경을 지키는 병력들까지 대거 빼서 이번 친정군에 포함시켜야 할 정도로 병력 사정이 좋지 않았다.

정선교가 다른 화포보다 화약이 몇 배나 더 들어가고 유지 / 운영비도 엄청나가 들어가는 천제벽력포를 만드는 등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화력에 집착하게 된 것도 이런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나마 주나라, 파림과 미리 동맹을 맺어놓아 다행이지, 강운예 그놈이 서부와 남부, 중부에 있는 군대까지 모조리 동원했다면... 이 전쟁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대사마 주진경이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율도 태상국이 병력을 더 동원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흥원을 차지하고 초원길로 가는 길목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대동의 패권은 다시 우리 천제국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아무렴. 흥원만 차지하고 천제벽력포를 놈들의 국경을 향해 박아놓기만 한다면, 아무리 강운예라도 초원길이 막히는 걸 두고만 볼 수밖에 없겠지.”

정선교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입술을 씰룩이며 키득거렸다.

“각 지휘관들에게 척후 나간 산병들을 철저하게 단속하라 전하라. 율도 놈들도 우리가 흥원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분명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가 기습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놈들을 먼저 발견하기만 한다면.”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행군로를 감제할 수 있는 언덕 위에 배치된 천제벽력포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오기도 전에 모두 뼛조각 하나, 살점 하나 찾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줄 테니.”

주진경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명하신 대로 얼마 전 대동에 새로 나타난 마루한을 찾기 위한 전사들을 앞서 보냈습니다.”

마루한이란 이야기에 정선교도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 몇이나? 지휘관은 누굴 보냈나?”

“동북방면대 이곽이 지휘관이고, 그의 휘하에 있는 전사 1,000여명을 데리고 가도록 했습니다.”

이곽이란 이름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정선교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곽이면 동금 아래 있는? 그 자도 두억시니 아니냐?”

“네, 맞습니다. 원래는 11군단장의 명을 받아 환강산성에서 성하를 영접하고 친정군을 전초기지가 있는 데까지 안내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지만, 대월국 국왕파들이 우릴 배신하면서 모든 것이 다 틀어져 버렸지요.”

“두억시니들을 보냈다가 일을 그르치는 거 아냐? 마루한을 사로 잡아와야 하는데 두억시니들이 그럴 수 있겠느냔 말이야. 그냥 찢어죽이고 때려죽이는 것만 할 줄 아는 것들인데.”

수레 위 천제의 가옥 정문을 지키고 있는 친위대 두억시니들이 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정선교는 두억시니들을 마구 조소했다.

“이곽이라면 전사로서의 용력은 물론 지략까지 갖춘 인물입니다. 믿고 맡기셔도 무탈할 것입니다.”

“차라리 도깨비나 아리랑들로 된 부대를 보내는 게 나았을 것을... 아, 도깨비나 아리랑들은 율도놈들한테 무력에서 밀리려나...?”

주진경의 말에도 정선교의 썩은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 때 가옥 안쪽에서 까르르,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정선교는 보기 흉하게 불룩 튀어나온 배 아래쪽을 손으로 긁으며 음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곽에게 마루한을 찾는 데로 반드시 살아있는 채로 내 앞으로 데리고 오라 다시 한 번 전해라. 그럼 난 안에서 쉬고 있을 테니 네가 행군을 지휘할 수 있도록. 특별한 일 없으면 아무도 안으로 들이지 말고.”

“네, 성하.”

정선교는 대사마가 예를 표하는 것을 본채 만채 받아주지도 않고 가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주진경은 서운한 표정으로 천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르고 가느다란 팔다리에 볼록 튀어나온 둥그런 배,

등판과 엉덩이에 근육이 하나도 없어 너무 비루해보는 뒷태에

구부정하게 앞으로 튀어나온 거북목과 비쩍 마른 닭처럼 튀어나온 목젖,

작고 가는 눈에 옆으로 뻗은 당나귀 귀까지.

현실 세계 사람들이 정선교를 봤다면 옛날 영화 속에 나오는 ET를 닮았다고 수군거렸을 것이다.

물론 ET는 눈이라도 크고 예쁜데,

정선교는 아무리 두 눈을 씻고 찾아 봐도 매력적인 부분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현실 세계에서나 대동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했다.

‘마루한이 저렇게 못났을 수가... 하긴, 죽지 않고 영원히 편히 살 수 있으니 제 몸 관리할 필요를 못 느끼는 거겠지. 저렇게 살아도 늙지도 않고 아픈데 하나 없이 평생 잘 먹고 잘 살 테니. 그래도...’

주진경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가옥을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왕으로서 제국의 명운이 달린 전장에서까지 여색을 찾는 건 너무하지 않나? 수백년을 살았다면서 저러는 건... 세상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지 아직도 모르는 건가, 아니면 어찌 생각할지 신경 안 쓴다는 건가...?’

대사마는 거친 신음과 교성이 들려오는 가옥을 뒤로하고 씁쓸하게 수레를 내려왔다.

­ 오후 7시, 대월국 호문번 서쪽 일대

영록은 말 위에서 아까 낮에 지나오며 본 광경을 곱씹어 보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용마로 소장의 철기병들처럼 적전지역으로 출정한 2군단 예하 기병들은 적게는 1개 중대 17명에서 많게는 100여명 정도 규모의 작은 부대를 이루어 이동하고 있었다.

다른 부대들도 용마로 소장 휘하 무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동 중에 사슴이나 멧돼지 같은 짐승들을 보면 활을 쏘아 잡아 식량으로 가져갔는데,

어느 부대의 지원병들이 지나는 길에 있는 민가에 들어가 약탈을 하는 일이 있었다.

잘 훈련된 무사들이야 말을 타고 가는 도중에도 사냥감을 발견하면 곧장 활과 화살을 들어 단 한방에 목표를 꿰뚫어버리곤 했지만,

그 정도 수준의 무예 실력이 없는 일반 군사들을 무사들이 자신의 사냥감을 나눠주지 않는 이상 보급 받은 전투식량만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작전이 언제까지 계속 될지 모르는 일이기에 모두들 기회가 되는 데로 스스로 식량을 자급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몇몇 군사들이 서래번의 민가로 들어가 행패를 부리고 음식을 빼앗아 왔던 것이다.

해당 부대 지휘관은 출발 전 병력들의 장비를 검사하다가 군사들의 짐 중에 원래 있던 것이 아닌 쌀 등 곡식과 대월국 사람들의 음식을 발견하고는 이들이 약탈을 저질렀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되었고,

그들을 추궁해 자백을 받아내고는 굵은 나무 회초리로 등을 치는 태형 30대의 형벌을 내렸다.

물론 약탈한 식량들도 다시 돌려주고 말이다.

길을 지나며 태형이 집행되는 것을 본 용마로 소장이 지휘관을 불러 이유를 묻고, 그의 대답을 듣고는,

“작전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서둘러 형을 마치고 다시 이동할 수 있도록.”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 휘하 철기병들과 함게 다시 말을 몰아 이동했다.

영록은 그와 함께 이 현장을 지나며, 회초리에 맞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천으로 대충 닦고는 아픔에 울먹거리며 전포와 갑주를 다급히 주워 입던 어린 군사들을 보게 되었고,

지금도 그들의 모습에 계속 눈 앞에서 아른 거리는 중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성시우 대위가 그의 곁으로 말을 몰아오며 말했다.

“아까 매 맞던 군사들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 약탈에 대한 형벌을 받았던 놈들이요?”

“네, 보아하니 그 중에 저하고 비슷한 나이의 사람도 있던 거 같던데, 어린 군사한테 그 정도 태형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심하다니요? 그만 하면 정말 많이 봐준 거지요.”

“그게 많이 봐준 거라구요?”

“네, 원래는 다리와 엉덩이에 태형을 가해야 하지만 그랬다가는 말을 타고 갈 수 없으니 회초리로 등을 때리는 것으로 대신했던 모양입니다.”

성시우 대위의 설명에 영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것도 배려한 건가요?”

“배려요? 이를테면 배려라고 할 수 있지요. 원래는 지휘관이 더 중한 벌을 내릴 수도 있었지만 전투가 코앞이라 그 정도로 참아 주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어린데... 어린 사람한테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성시우 대위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는 군경여단 무사들이기 때문에 군형법은 물론 일반 형법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태상국 기하께서 정하신 율도의 형법에 의하면 아무리 나이 어린 자라도 죄를 지으면 성인과 동일한 벌을 받아야 하고 심지어 그들의 보호자도 자신의 자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보호자에 대한 처벌은 벌금형이 내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요.”

“어린 사람이 죄를 지어도 성인과 똑같은 벌을 받게 된다구요?”

영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자신이 있던 세상에서는 청소년이 죄를 지으면 성인 보다 약한 벌을 받게 되거나,

촉법소년이라고 해서 만 14세 미만은 아예 무슨 죄를 짓든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자신과 거의 같은 시대를 살다온 강운예가 나이 어린 소년들에게도 이리도 엄격하게 법을 적용시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관장님이... 왜 그렇게 법을 만드셨을까요?”

“강하고 엄격한 법치만이 나라의 질서를 바르게 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셨겠죠. 또,”

성시우 대위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이건 예전에 저의 여단장님이 태상국께서 여신 친위부대 지휘관들과의 만찬에서 직접 들으신 이야기라고 하는데요, 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고 하십니다. ‘나이 어린 놈들이 잘못했는데도 개도하겠다며 용서해주고 반성의 기회를 준다고 해봤자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차라리 어린 나이 때부터 법의 무서움을 알게 해야 나이 들어서 더 나쁜 짓을 못하게 막을 수 있게 되지.’ 라고 말이죠.”

그 말에 영록의 눈앞에 떠오르는 이들이 있었다.

유성모와 마선욱, 그리고 애국청년십자군이란 그럴듯한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던 그들의 똘마니 양아치들 말이다.

‘운용이 말로는 그 놈들도 어려서부터 교회와 학교에서 나쁜 짓 많이 하고 다녔다고 했지. 촉법소년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자신들은 어차피 처벌 안 받을 거라고 낄낄 거리기도 했다고 했고... 그래서... 조사실에 묶여 있던 그 누나한테 그럴 때에도... 유민이한테 그럴 때에도... 전혀 죄책감 같은 건 없었던 걸까...? 정말 관장님이 만든 율도의 법처럼 나이 어린 이들도 성인과 같은 벌을 받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러면서 문득 허리춤에 차고 있는 철편에 자연스레 손이 갔다.

‘그래, 내가 있던 한국의 법은 너무 지나치게 물렀어. 만약 유성모나 마선욱이 경찰에 잡힌다 해도 유민이나 그 누나한테 한 짓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한 벌을 받게 될 거야. 심지어 외국인 노동자들 수십여 명을 쏘아 죽였는데도 몇 년 감옥살이 하다 나올지도 모르지. 그게... 과연 제대로 된 처벌일까...? 그게 과연 정의일까...?’

철편을 만지던 손에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힘이 불끈 들어갔다.

‘정의가 아니야.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유성모, 마선욱 그 두 놈은 반드시 큰 벌을 받아야 해! 전도한과 박광, 그 조폭놈들도 모두! 한국의 법이 그들을 제대로 처벌할 수 없으니, 내가 다시 돌아가면 반드시 그에 맞는 벌을 놈들에게 내려줄거야! 그리고 유민이도... 유민이도...’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폭들의 아지트에서 벌거벗고 학대를 당하던 그녀의 모습,

빨간색 두 줄이 그어진 임신테스트기를 들은 채 입을 틀어막고 울고 있던 모습...

영록은 목이 매어왔다.

그 순간,

탕...

탕...

타당...

저 멀리에서 아스라히 총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어느 부대가 천제국놈들과 맞딱드린 모양이군요. 마루한, 저희도 이제 빠르게 말을 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용마로 소장이 영록에게 말하고는, 말에 박차를 가하며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영록도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유민의 모습에 입술을 질끈 깨문 채, 퍼시벌에게 박차를 가하며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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