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대동력 9,994년 5월 41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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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대월국 흥원번 흥원성 일대 율도군 주둔지
강운예의 친위군단 군사들이 다시 군장을 싸고 이동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윤수 중장이 이끄는 2군단 병력들 중에서 기병들만이 작전지역으로 이동한 것에 반해, 친위군단은 보급 수송을 담당하는 일부 치중대를 제외한 기병과 보병, 포병을 총 망라한 10여만에 이르는 대군이 모두 움직이려는 중이었다.
2군단 기병들이 흥원으로 진군해오는 정선교의 친정군을 요소요소에서 기습하며 적의 전력을 야금 야금 갉아 먹으면, 본대라 할 수 있는 강운예의 친위군단이 서래번 종원 평야에서 결정적 전투를 치룬다는 것이 강운예의 전략이었다.
드디어 대동의 패권을 두고 두 나라라의 지도자이자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두 남자의 결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강운예 역시 출정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검은색 바탕에 은장식이 세공된 유성금 갑주를 모두 착용했을 때 쯤,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는지 곁에 있던 전속부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여기 대월국에 와서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이 있었군.”
“누구 말씀이십니까, 기하?”
“지난 번 내 큰 딸과 영록이를 구하다가 성산번군에게 붙들렸다는 그 흑영단원 말이야. 죽은 줄 알았는데 얼마전까지 그 놈들에게 잡혀있다가 탈출해서 여기까지 왔다면서? 거기에 반란군 내부 결속도 흐트러지게 만들고 일부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공까지 세웠다던데?”
“그 여성 흑영단원 말씀이십니까? 6사단장의 보고에 의하면 이 곳으로 오던 도중 우리 2군단에 패해 도주하던 천제국 기병 대장도 회유해서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응, 그 이야기도 들었지. 덕분에 정선교가 준비해온 것들에 대해서도 대강 알 수 있게 되었고 말이야.”
“지금 그녀를 보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아무리 바쁘더라도 아비로써 딸을 구해준 감사의 말은 전해야 하는게 사람으로써의 도리가 아니겠나?”
전속부관은 군례를 올리고 곧장 막사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검은색 전포를 입은 유경패가 대원수의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율도의 태상국이자 대원수, 그토록 앙망해 마지 않던 마루한의 실물을 직접 대하게 된 것 때문일까, 갖은 역경 속에서도 절대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던 그녀조차 긴강한 표정이 역력했다.
“흐, 흑영단 소속 유경패! 태상국, 아, 아니 대원수 기하께 인사드립니다!”
바짝 얼어붙은 듯한 차려 자세로 절도 있게 군기 가득 넘치는 군례를 올리는 그녀를 보고, 강운예는 빙그레 웃음 지으며 거수 경례로 답례를 했다.
“무사 귀한을 축하한다. 성산번에서의 이야기는 모두 들었다. 또 탈출해서 복귀할 때까지의 이야기 역시 모두 다. 그대가 없었다면 내 딸과 영록이 안전하게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이 전쟁의 향방 역시 지금과는 많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겠지. 아비로서, 그리고 군통수권자로서 제군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강운예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해도 되겠나?”
“네? 네! 기하!”
유경패는 두 손으로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호리를 조아렸다.
“그동안 많은 고초를 겪었겠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주어 고맙다.”
“기하... 전... 전...”
그녀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핑돌았다.
“대원수부 인사지원본부장에게 말해 그대의 노고에 보답할만한 충분한 보상과 포상을 준비하라 이르겠다. 그래도 몰라서 묻는데, 혹시 바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말하라. 이 나라의 태상국이자 대원수로서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도록 하겠다.”
잠시 망설이던 유경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런 부탁도 가능할런지...”
“말하라, 어떤 부탁인가?”
“사실 전... 지금 흑영단에 몸 담고 있기는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율도군에 들어가 정식으로 무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혹시 어릴 적 경무관이나 국무관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인가? 흑영단원이 될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와 같은 곳은 어렵지 않게 입학할 수 있었을 텐데?”
“국무관까지 입학해 수학하기는 했지만 중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 그만... 결국 수료하지 못하고 무사로서 임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주변에서 지벼봐주신 분들 덕에 흑영단에 들어가 지금까지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강운예는 표정에 아무런 변화 없이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 가능하다면, 말단 사관이라도 좋으니 정식 무사로 임관하고 싶습니다... 제 소원은 오직 그것 뿐입니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강운예가 무언가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마침 백영단에 충원이 필요하다 들었으니 내 인사지원본부에 명을 내려 놓도록 하겠다.”
“아, 감사합니다, 기하!”
“그동안 흑영단에서 활동한 경력과 전공 등을 감안해서 중위나 대위로 특별 임관을 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 그리고 백영단 내 정식 보직은 백화 대원수부로 복귀하면 받는 것으로 하고, 우선은 이 곳에서 내가 주는 임무를 수행해 주겠나?”
“네, 무슨 임무든 명하시는대로 따르겠습니다!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녀의 군인다운 말투에 강운예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곳 주둔지에 내 수발을 들기 위해 가족이 따라와 있네. 백영단 무사로서 자네가 그 사람의 의전을 맡아주었으면 하네만.”
“네, 성심을 다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헌데, 가족분이라면 영부인을 말씀하시는 것이온지...?”
강운예는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내 작은 처일세.”
오후 3시, 율도 황남도 상동시 서쪽 일대
밤을 꼬박 세우며 이대로 주신으로 달아날지, 아니면 다시 백화도 돌아갈지 고민하던 예린과 정국은
해가 중천에 뜬 이후가 되어서야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상동시 관아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관아로 가서 신분을 밝히고 관리들의 보호를 받으며 백화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관아로 가기 전 할머니가 주신 돈으로 식당에서 점심을 사먹은 두 사람,
돌아가면 강운예에게 얼마나 혼나게 될까 걱정이 되었는지 밥이 좀처럼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터벅터벅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말을 탄 사람들이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정국아, 뒤에 말 온다. 옆으로 좀 가봐...”
예린은 정국의 어깨를 살며시 밀며 길 옆으로 바싹 붙어서 걸었다.
그렇게 그냥 이 길을 급히 지나가는 이들인줄 알았는데,
어두운 빛의 장옷에 죽립을 쓰고 십여 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두 사람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아니, 뭐야? 또 그 때 그...?”
예린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 탄 사람들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삿갓 아래로 검은빛의 너울을 길게 드리우고 있는 가녀린 체구의 사람이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정국 앞으로 다가와 겸손히 한쪽 무릎을 꿇고는,
“강용영의 무녀 연하,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조용한 미성으로 나직이 속삭였다.
정국도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강용영의 무녀라면... 설마...?”
“네, 황제 폐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이제부터 저희가 모실 테니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시지요. 폐하께서 많이 심려하고 계시옵니다.”
예린이 정국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누구야? 주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야?”
“...응”
“그럼 너희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찾아와?”
정국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강용영의 무녀들은 마루한이나 마루한의 직계 자손들의 기운을 읽고 느낄 수 있어.”
“그, 그런 걸 어떻게???”
“마루한은 원래 대동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서 다른 사람들과 기운이 완전히 다르데. 마루한에게서 태어난 직계 자손들도 그렇고.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마루한의 기운을 읽고 찾아낼 수 있는 무녀들을 육성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가봐.”
“마루한의 기운을 읽고 찾아낸다고? 그런 사람들이 왜 필요한데?”
“영록이 같은 대동에 새로 나타난 마루한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니까... 저번에는 실패했지만 또 다시 마루한이 나타나면 다른 나라보다 먼저 찾아내 데려가고 싶어 하니까.”
강용영의 무녀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고귀하신 마루한의 아들, 딸이신 두 분이 함께 계셔서 그 기운을 따라오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자, 여기서 이렇게 지체하다가는 율도 관병들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수월찮게 될 수도 있으니 서두르시지요.”
무사로 보이는 덩치 큰 사내가 말 두 필을 끌고 예린과 정국 앞으로 다가왔다.
무녀가 너울 사이로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예린을 바라보았다.
“영애도 함께 모실 테니 안심하시지요.”
예린이 놀란 표정으로 너울 속 무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금 나더러 주나라로 같이 가자구요?”
“네, 황자 전하와 함께 주나라로 모시겠습니다. 자, 그럼 말에 오르실까요?”
무사가 가져온 말에는 고삐 대신 한 가닥의 줄만이 묶여 있었다.
정국과 예린이 직접 말을 몰고 가는 게 아니라 다른 말을 탄 무사들이 줄을 잡고 이끌고 가겠다는 뜻이었다.
“정국아, 우리... 어제 얘기 다 했잖아...?”
예린이 주저하며 정국을 바라보았다.
에린의 얼굴을 바라보던 정국은 고개를 숙이고 푹,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주나라 무사들 중에서도 최정예라 할 수 있는 강용영 무사들에게 둘러싸인 이상 두 사람의 힘만으로는 도망칠 방도가 없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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