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대동력 9,994년 5월 40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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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율도 황남도 상동시 일대
할머니 집을 나와 홍진항이 있는 동쪽을 향해 걷는 예린과 정국.
주간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검문을 하거나 순찰을 하는 관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두 사람은 되도록 인적이 드믄 민가들이 모여 있는 좁은 길을 골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린이 걸음을 멈추고 멈춰섰다.
“잠깐... 우리 잠깐만... 잠깐만 다시 생각해 봐야할 거 같아...”
정국도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할머니가 하신 말씀 때문에?”
“응... 지금 아빠가 전쟁에 나가셨다고 하는데... 그런데 지금 이러는건... 이러는건 정말 아닌 거 같아...”
정국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게 되면, 우리 이대로 영영 못 만날 수도 있는데?”
“그건 안 되지만 전쟁 중에 이러는 건... 이건 정말 아닌 거 같아. 돌아가서 아빠한테 용서해달라고 싹싹 빌고 너도 주나라로 돌려보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해보자.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게다가 우리.”
예린이 아까 할머니한테 받은 은화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가진 돈이라곤 고작 이거 밖에 없잖아? 이거에 어떻게 해서 조금 더 보태면 주신까지 가는 뱃삯은 될 수 있어도, 가는 내내 배안에서 먹을 양식값이나 일용품 사는 건 불가능할 거야. 그러니 우리... 진짜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보자.”
그녀의 말에 정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오후 5시, 율도 황남도 상동시 동쪽 검문소 일대
며칠 째 상동시 전체를 봉쇄하고 검문 검색을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린과 정국은 물론 아무런 특이점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태상국 강운예의 명령이 지엄할지 몰라도 언제까지고 도시 하나를 완전히 봉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시민들의 반발이 거세어질 게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진채연, 군경여단 무사들과 함께 상동시 동쪽 검문소에 짐을 풀고 도시 곳곳에서 검문을 실시하는 관리들이 보내온 보고 내용들을 정리하던 사승범이 보고서들을 책상 위에 탁, 내려 놓으며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상동시 안에 있는 쥐구멍까지 샅샅이 다 뒤졌는데 못 찾았다는 건 분명 어디 민가에 숨어 있다는 말 아니겠소? 영애랑 황자는 물론이고 상단에서 총 들고 설쳤다는 그 놈들도 모두 말이오. 이제 내 말대로 민가들에 대한 수색을 실시해야 합니다. 도시를 계속 봉쇄할 수도 없으면 그 방법 밖에는 없으니까.”
맞은편에 앉아 창날을 기름 먹인 천으로 손질하던 진채연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시 봉쇄나 민가 수색이나 주민들이 싫어하는 건 다 똑같소. 차라리 남의 집 뒤지는 것보다 시의 접경을 막는게 욕을 먹어도 덜 먹지.”
“그래도 우리가 이대로 그냥 가만 있다가 아무 소득도 없으면? 아니, 그건 둘째치고 영애랑 황자랑 여기 어디 집에다 신혼집 차리고 숨어살려고 눌러 앉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신혼집, 이란 말에 진채연의 두 눈을 날카롭게 부릅뜨며 말했다.
“황자는 몰라도 예린이... 아니, 큰 영애는 그렇게까지 분별력 없는 아이가 아니오. 제멋대로 천방지축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이 시국에 지들끼리 살림이나 차리려는 머리 빈 아이는 아니란 말이오.”
“영애 머리가 비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벌써 두 번이나 가출한 거 보면... 그나저나 그 둘이 지금 시국이 어느 시국인지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소. 전쟁 터져서 태상국께서 대월국으로 직접 가신 건 알고나 있는 건지, 쩝...”
“아무튼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지금까지 상동시 관리들이 불철주야 검문 검색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제 뭔가 잡힐 때가 되지 않았겠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시내를 순찰하러 나갔던 최용준이 동행했던 적영단 무사들과 함께 검문소로 돌아왔다.
“소식 들었소? 서쪽 국경에서 초원길의 각 고을로 영매가 돌았다던데?”
최용준이 두 사람 사이에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
“며칠 전 동주와의 국경에서 한 떼의 군마가 국경지대를 돌파해서 우리 영토로 들어왔다더군.”
“동주에서? 설마 주나라도 우리 율도를 침공한거야?”
사승범의 말에 최용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아닌거 같아. 영매에 의해 전달된 전문을 보면 국경을 넘어온 이들은 불과 10여명 뿐이라고 했어. 그것도 은밀히 국경지대 토성을 넘어온 거라고 하고.”
“10여명? 뭐야, 그럼 그냥 밀수업자들 아니야?”
“밀수업자 따위가 우리 군이 지키고 있는 토성을 쉽게 넘을 수 있을 거 같아? 그것도 말을 타고 강행돌파를?”
그 말에 진채연이 손질한 창을 벽에 기대어 두며 말했다.
“훈련 받은 말과 무사들이 아니면 힘든 일이겠지요. 밀수업자들이었다면 토성을 넘기보다 철조망 지대 아래의 땅을 파거나 철조망을 자르고 들어오려고 했을 겁니다.”
“옳은 말이오. 나도 주나라 정규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인데...”
사승범이 최용준의 말허리를 자르며 끼어들었다.
“주나라 정규군? 이 시국에? 그 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 우리 땅으로 정규군을 보냈겠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태상국께서 이 사실을 아는 날에 자기 나라가 완전 초토화 될 수도 있다는 거, 주나라 놈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걔네가 무슨 목적으로 정규군을 보내?”
진채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목적이... 있을 수 밖에요. 자기네 나라 황자가 지금 우리 나라 안에 있으니까.”
“엥? 그럼 황자를 데리고 가려고 주나라에서 정규군 무사들을 보낸 거라구요? 걔네들이 황자가 어디 있는 줄 알고?”
“황자가 주나라로 연통을 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대동에서 영매는 국가 기관과 군대 뿐 아니라 큰 상단에서도 널리 활용되고 있었다.
정국과 예린 정도라면 영매를 구하거나 이용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진 대위의 예상대로 주나라 정규군들이 황자가 어디 있는 줄 알고 데리러 오는 거라면, 상동시 서쪽으로 들어오려 하겠군요.”
최용준이 말에 진채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우리 짐 싸서 이동할 준비를 해야할 거 같은데요? 상동시 관리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거 같구요.”
“서쪽 검문소로 이동하려는 겁니까?”
“네, 그리고 동행하는 병력들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 때에 따라서는 주나라 정규군들과 부딪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사승범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국경을 넘어온 건 고작 10여명 뿐이라면서요? 그럼 뭐 굳이 추가 병력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우리 적영단에 군경여단 무사들에 진대위님과 함께 온 백영단 무사들까지, 율도 최정예 대원수부 친위대 무사만 30여명이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하하하.”
곧이어 세 사람은 물론 모든 무사들이 각자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곧바로 상동시 서쪽 검문소로 이동하기 위함이었다.
오후 10시, 대월국 서래번 동쪽 일대
영록은 자신의 호위하는 성시우 대위 등 군경여단 무사들과 용마로 소장이 이끄는 2군단 철기병들, 이렇게 80여명의 무사들과 함께 동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모든 무사들은 타고 가는 말 이외에도 서너마리의 말들을 더 끌고 가고 있었다.
각각의 말 안장 위에는 화살과 탄, 화약 등 무기 뿐 아니라 전투식량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아직 제대로 된 전투식량 없이 찐쌀이나 말린 떡, 포를 떠서 건조시킨 생선류와 볶은 콩 등을 들고 다니거나 취사지원 부대가 따라다니지 않는 이상 각자 알아서 전장 주변에서 먹거리를 구해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다른 나라 군사들에 비해, 율도군은 휴대성과 취식의 편의성이 뛰어난 전투식량 덕에 지금처럼 소규모 부대들이 어느 정도 기간 동안 아무런 보급 지원 없이도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이는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오랜 기간 군생활을 하다 온 강운예의 지식과 경험이 적극 반영된 것으로, 현대에 사용되던 전투식량의 포장을 참고해 음식들을 기름 먹인 한지로 감싸 열로 봉합해서 공기가 통하지 않게 함으로써 장기 보존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영록이 애국청년십자군에 있을 때 먹어본 즉각 취식형 전투식량처럼 줄만 당기면 스스로 열을 내서 음식을 뎁히는 정도의 기술력은 없지만, 동결 건조 시킨 음식에 물, 또는 뜨거운 물을 부어 먹거나 냄비 또는 투구에 담아 간단하게 끓여 먹거나, 아니면 육포 흑당 등 포장된 상태 그대로 먹을 수 있는 것 등, 제법 간편하고 효율적인 식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도 혹시 작전 도중 식량이 부족해질 걱정 때문일까, 용마로 소장의 철기병들은 이동 도중 꿩이나 사슴, 야생 멧돼지 등을 보기만 하면 민첩하게 활을 당겨 사냥감을 잡아 말 위에 얹어 함께 가져갔다.
단 한 번도 빗나가지 않고 사냥감들을 꿰뚫어 버리는 무사들의 신기의 활솜씨에, 영록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백발백중, 모두들 신궁인거 같아요!”
용마로 소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정예 무사라면 모두가 다 이 정도 활솜씨는 기본으로 갖춰야겠지요.”
“저 짐승들은 혹시 전투식량이 부족할까봐 잡아가시는 건가요?”
“뭐 그런 이유도 있고, 아직 적과 조우하기 전이니 야영하며 고기를 구워 먹을 여유도 있을 거 같아 그리하라 시켰습니다.”
“고기를 구워 먹는다구요? 그럼 불을 피워야 하는데, 작전 중에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하하하, 전술적 측면으로 보자면 마루한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하지만 아직 적정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원래 전투를 치르기 전 부하들에게 고기를 배불리 먹이고 싶은 게 상관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주둔지에서 나오는 식사나 전투식량도 나쁘지는 않지만 갓 잡아서 구워 먹는 고기만큼 무사에게 힘을 주는 음식도 없지요. 다들 아까 저녁을 말 위에서 전투식량으로 시원찮게 먹었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야영지를 편성하고 고기 구울 준비를 해볼까요?”
영록도 지치고 배가 고팠던 터라, 부군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랜 훈련을 통해 체득된 솜씨인지, 무사들 모두 숙련된 솜씨로 야영할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말들에게도 물을 주고 주변의 풀을 마음껏 뜯어먹을 수 있게 했다. 원래 말들은 고운 마초나 곡식들을 주로 먹지만 율도의 군마들은 전장에 나가면 들판의 아무 풀이나 뜯어먹을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병들이 움직일 때 마초를 따로 챙기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었다.
말들이 풀을 뜯으며 휴식을 취하는 동안, 무사들은 간단히 땅을 고르고 장작으로 쓸 나무들을 모아와 아까 사냥해서 잡은 짐승들의 가죽을 능숙하게 벗겨내고 먹기 좋은 크기로 토막을 낸 후, 휴대하고 다니는 기다란 쇠꼬치에 꾀어 불에 굽기 시작했다.
이미 야전에서 여러 번 사냥을 해서 고기를 구워먹은 경험이 있는지, 말 안장에 소금과 후추, 향초 등을 가지고 다니는 무사들이 제법 있었다. 고기에 소금과 후추 등으로 간을 하고 불에 굽자 금세 고소하고 향긋한 고기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그 와중에도 무사들은 갑주와 무기를 풀지 않고 있었다. 개중에는 투구 정도를 벗은 이들은 있었지만 역시 야전에 나와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무도 갑주를 벗지 않고 있었다.
무사 하나가 잘 구워진 사슴 고기 한 점을 들고 와 가장 먼저 영록에게 바쳤다.
“마루한, 아까 제가 잡은 사슴 고기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고마워요, 잘 먹겠습니다.”
“아이구, 별 말씀을요. 다른 고기도 드시고 싶으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무사는 영록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는 다시 불 있는 데로 가 열심히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영록이 그가 가져다 준 사슴 고기를 한 입 베어 먹어 보았다.
처음에는 사슴 고기 특유의 노릿한 냄새가 나는 듯 했지만 입에 넣고 씹을수록 고급 스테이크와 같이 풍부한 육즙이 입안에서 팡팡 터지고 식감도 쫄깃쫄깃한 것이 입안을 즐겁게 만들었다.
“마루한, 이것도 함께 드시지요.”
용마로 소장이 가죽 주머니에 든 음료를 투박한 야전용 나무잔에 따라 영록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영록은 이를 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금방 얼굴을 찌푸렸다.
“크아~! 부군단장님! 이거 술 아니에요?”
“하하하, 맞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담근 과실주지요. 어떻게, 입에 맞으십니까?”
“향도 좋고 사슴 고기와도 잘 맞는 거 같긴 한데요... 우리 전쟁 나와서 술 마셔도 되는 거예요?”
“하하하, 적당한 음주는 전투를 앞둔 무사들의 긴장을 덜어주고 용기를 더해 주지요. 이들 모두 그런 점을 잘 알고 있기에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분만 낼 것이니 너무 염려 않으셔도 됩니다.”
돌아보니 용마로 소장처럼 별도의 가죽 주머니에 술을 담아온 무사들이 더 있는 듯 보였다.
장작 주변에 둘러앉은 무사들이 주거니 받거니 술을 돌렸다.
그들은 동행한 군경여단 무사들에게도 술을 권했다. 하지만 마루한을 경호하는 군경여단 무사들은 함부로 술잔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다 영록이 성시우 대위에게 허락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딱 한 잔씩만 마시도록.”
그도 못이긴 척 철기 무사들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 시원하게 쭈욱 들이켰다.
다함께 술과 고기를 나누며 담소를 나누던 중,
영록이 용마로 소장에게 물었다.
“부군단장님은 여러모로 군단장님과 많이 다르신 거 같아요. 군단장님은 지나치게 FM... 아니, 지나치게 원리원칙만 고집하시는 분이라면 부군단장님은 그와 다르게 완전 융통성 있는 분이라고 할까요?”
“하하하. 군단장님 다소 완고하시고 딱딱한 면이 많은 분이시긴 하죠. 원래는 말도 많고 참 재미있는 분이었는데.”
“군단장님과 오래 알고 지내신 사이세요?”
“적영단에도 함께 있었고 같은 부대에 소속되어 여러 작전을 함께 하기도 했지요.”
“그럼 군단장님이 언제부터 그렇게 원리원칙, 고집불통이 되신 거예요?”
용마로 소장이 잔에 든 과실주를 쭈욱 들이키며 말했다.
“원리원칙, 고집불통이라기보다...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아, 진짜 그런 면도 있으신 거 같아요. 너무 완벽주의자 같은 부분 말이에요. 원래 군단장처럼 대군을 이끄는 지휘관이라면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려는 성향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긴 한데, 가끔 보면 융통성도 하나 없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 보일 때가 많아요.”
“자리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법이지요. 기대도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법이구요.”
“기대도 사람을 변하게 한다구요? 그럼 군단장님이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그와 같은 완벽주의자가 되셨다는 말씀이세요?”
“네, 저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럼 누구의 기대 때문에... 아, 지금 관장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용마로 소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태상국께서 박윤수 중장을 하급 무관 시절부터 끔찍이 아껴왔다는 사실은 군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군단장이 된 지금, 박윤수 중장은 어떻게든 태상국 기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남들이 보기에 거북스러울 정도로 저리도 철저하게 굴게 된 것입니다.”
영록도 이제 이해가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관장님을 향한 충성심 같은 거였군요? 혹시 이번 전쟁에서 관장님의 명을 잘 수행해서 좋은 성과를 얻으면 중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하시게 되나요? 혹시 그것 때문에 더 열심히 하려는 거?”
“물론 우리가 승리를 거두게 되면 박윤수 중장의 대장 진급은 따 놓은 당상이라 하겠지요. 하지만 박윤수 중장은 대장 계급장보다 더 받고 싶은 게 있어서 이러는 걸 겁니다.”
“대장 말고 다른 거요? 율도군 계급에 대장 위로 부원수, 원수 계급이 있다고 듣긴 했는데, 설마 거기까지 오르고 싶어서?”
“아니오. 군단장이 원하는 건 부원수나 원수 계급장도 아닐 겁니다.”
“그러면요?”
“군단장이 원하는 건 태상국의 인정, 그것뿐일 것입니다.”
“인정이라구요? 관장님이 군단장님을 인정한다, 그런 인정 말씀이세요?”
“뭉뚱그려서 말씀드린 게 인정이라는 단어이긴 한데 조금 더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그냥 ‘잘 했다. 앞으로도 부탁한다.’ 와 같은 태상국의 치하의 말씀, 그것만을 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고작 칭찬받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거라구요? 에이 말도 안 되요~!”
황당하다는 영록의 표정과는 달리,
용마로 소장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자에게, 특히나 저희와 같은 무사들에게는 태상국처럼 믿고 따르는 이가 나 자신을 인정한다고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만큼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도 없는 법이지요. 전공을 통한 진급이 없을지라도, 전리품 등 물질적인 보상이 없을지라도 주인이 자신을 인정한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도 천하를 다 가진 기분을 느끼는 것이 바로 무사입니다.”
그가 손에든 멧돼지 고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말을 이었다.
“어찌 보면 태상국 기하라는 분, 참 대단한 분 아니겠습니까? 박윤수 중장 같은 무사들도 단지 그 분의 인정을 얻기 위해 그리도 용을 쓰며 사는 걸 보면...”
“...”
“모름지기 남자란, 사람들을 이끄는 남자란 태상국 기하처럼 무언가 특별한 대가 없이도 이처럼 자신을 따르게 만들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걸 보고 지도력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용마로 소장의 말에 그동안 자신의 무술 스승이자 멘토 쯤으로 생각해오던 강운예라는 존재가
영록에게 헤아릴 수조차 없이 거대한 존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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