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36화 (136/217)

〈 136화 〉 대동력 9,994년 5월 40일 (3)

* * *

­ 오전 12시, 대월국 호문번 환강산성 폐허 일대

이제 천제국군들은 천막을 모두 걷고 다시 행군 준비를 실시하고 있었다.

군사들은 등에 무기와 행낭을 짊어지고 무거운 짐들과 각종 보급품들을 소가 끄는 수레에 분주하게 실었다.

10만이 넘는 대군이 왔기에 보급품을 운반하는 수레의 숫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그 중에서도 검은색 항아리가 가득 든 수레가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모두 화약을 담은 항아리였다.

이 정도면 최소 예닐곱 개 국가가 가지고 있는 화약과 거의 맞먹을 정도의 양이다.

대월국의 경우 율도에 전쟁 배상금을 갚느라 재정이 열악해져서 다른 나라에서 유황을 들여올 돈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래서 왕실 외에는 포병을 운용하지도 못하고 총병, 포병이 사용하는 화약도 상당히 제한적인데 반해, 자체적으로 유황 수급이 가능한 천제국은 율도와 마찬가지로 모든 군단, 사단급 부대 예하에 포병부대를 배속시켜 운용하고 있는 중이고, 총병 부대도 여럿 거느리고 수시로 실사격 훈련도 할 정도로 화약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정도 양이라면 천제국에 있는 화약을 거의 다 가지고 나왔다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의 양이었지만,

천제벽력포에 들어가는 화약이 여간 많은 게 아니라서 포병 지휘관들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천제벽력포가 있어 든든하긴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성하. 본국에서 생산되는 화약의 양이 이번 전쟁에서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 천제벽력포 운용에 주의가 필요할 듯 합니다.”

가마 위에 앉아 천제벽력포를 운용하는 도깨비 군사들이 포를 밧줄로 비끌어 매고 거대한 수레 위에 얹어 행군 준비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선교는 대사마 주진경의 말에 한쪽 입술을 씰룩거리며 눈쌀을 찌푸렸다.

주진경의 말대로 화약을 만드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천제국이 유황과 숯은 쉽게 구할 수 있을런지 몰라도 화약을 만드는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염초(초석)를 만드는 과정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을 필요로 했다.

염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마루나 담 아래 오래 묶은 흙을 모아 재를 섞고, 거기에 사람이나 동물의 변을 뿌리고 짚과 지렁이를 섞어 햇빛에 말리며 건조시켜야 한다. 물론 몇 주에 한 번씩 이것들을 뒤집어 주는 수고도 빠트려서는 안 되고, 마지막에 이것들을 다시 정제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엄초가 생산되기까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 2년까지도 걸린다고 한다.

게다가 유황과 숯, 초석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 흑색 화약을 만드는 과정 역시 상당한 시간 동안 전문가들이 공을 들여야만 하는 일이었다.

포에 넣고 쾅쾅, 쏘아대며 없애기는 쉬워도, 이 귀한 검은 가루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인고의 시간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화약만으로도 강운예의 졸개놈들은 모두 뼈도 못추리게 될 테데, 뭔 걱정이라 말이냐?”

“율도군의 주력은 기병입니다. 다른 나라 군대와 같이 보병 위주로 진을 짜고 한데 모여 싸우는 군이라면 우리의 천제벽력포 앞에 모두 녹아내릴 테지만 그들은 다릅니다. 기병 위주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산탄이나 포도탄을 사용할 수 있는 일반 평사포를 많이 운용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화약들을 거진 다 천제벽력포를 운용하는데에만 사용한다면 적을 상대하는데 포병 전력을 적절하게 활용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천제벽력포를 한 번 쏘는데 들어가는 화약이 다른 화포의 수배에 달하니 부디 신중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정선교는 마른 몸에 보기 흉하게 불룩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비웃음 섞인 말투로 말했다.

“난 네놈이 태어나기 전부터 강운예 그 놈과 싸워왔다. 전쟁터에서 그 놈이 어찌 움직일지 이제 보지 않아도 훤히 다 알 수 있을 정도지. 그래, 네놈 말대로 강운예 그 놈의 기병들은 성가신 존재야. 아마 우리가 흥원으로 이동하는 내내 그 놈의 기병들이 여기 저기 숨어 있다가 모기떼처럼 달려들어 귀찮게 굴 것이다. 하지만,”

그가 천제벽력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저것을 어찌 쓸지는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것이다. 황실 안에까지 강운예 그놈의 쥐새끼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통에 의중을 밝히지 않고 있었지만, 내 장담컨데 천제벽력포 앞에 그 놈의 기병 전술은 모두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그의 말대로 천제국 황실 내에서도 강운예가 보낸 흑영단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다만 누가 진짜 흑영단원인지 실체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을 뿐.

그 때문에 정선교는 주변에 있는 자신의 신하들조차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군권을 총괄하는 대사마 주진경 역시 이번 원정의 전략적 목표와 세부 전술에 대해 아직 듣지 못했을 정도로.

“참, 그건 그렇고, 작년에 강운예의 여식과 함께 대월국 성산번에 나타났다던 어린 마루한이 지금 대월국에 와 있다면서?”

정선교도 작년 영록이 대동에 나타난 일은 물론 그가 지금 율도군과 함께 대월국에 원정 와 있다는 사실까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천제국에도 흑영단 정도의 수준은 아닐지라도 꽤 큰 규모의 첩보 기구가 있었던 것이다.

“네, 율도 태상국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마루한을 흥원을 점령하는 부대에 배속시켜 함께 보냈다고 합니다.”

그의 물음에 주진경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율도 백화에 꼭꼭 숨겨놓고 있을 줄 알았더니만 왜 여기까지 보냈을까? 나이도 많이 어리다면서? 듣기로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어린애라던데?”

“네, 경무관 다니는 강운예의 첫째 영애와 동갑이라 들었습니다.”

“동갑? 마루한에게 동갑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 녀석도 나처럼 늙지도 않고 영원히 지금 모습으로 살아갈 텐데...”

정선교는 천천히 손가락을 꼽아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강운예 그놈이 대동에 나타나고 260여년이 흘렀으니... 원래 내가 있던 세상은 지금 2020년 정도인가? 아니, 2030년 정도인가...? 강운예가 대동에 오기 전에도 조선이 일본제국에서 독립해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했었는데, 2030년에 조선은 어찌 되었을까...? 또 어떤 기술들이 새로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을까...”

한동안 생각에 빠져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주진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어린 마루한이 지금 어디 있는지 확인해 보아라. 그리고 내 앞으로 데리고 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고.”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주진경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 오후 3시, 율도 황남도 상동시 일대

진채연 일행은 상동시에 도착하자마자 이곳 관리들과 병력들을 총동원해 인접 지역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하고 철저한 검문검색을 실시했다.

이들이 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협조하라는 강운예의 추상같은 지시가 이미 각 지방 관청에 하달되어 있었던 것이다.

관리들은 각 검문소마다 예린과 정국의 초상화를 붙여놓고 그들을 찾는 한편,

총기를 가지고 이화수의 상단에서 난동을 피운 의문의 사내들도 함께 추적했다.

하지만 며칠간 지속된 검문검색에도 애린과 정국은 물론 수상한 자들 역시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여행객들이 묵을 만한 객잔들은 물론 빈집이나 인근 야산까지 샅샅이 수색해 보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럼 잘 지내다가 가요, 할머니. 그동안 신세 많았습니다~!”

“아유~ 신세라니? 두 사람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 늙은이 혼자서 이삿짐 나르고 벽지 바르고 고생 고생 했을 텐데, 두 사람 다 며칠간 고생 많았어. 덕분에 편하게 이사를 마쳤구나. 자, 얼마 안 되지만 이거 수고비야. 고마워서 주는 거니까 사양하지 말고~”

진채연과 관리들이 상동시 전체를 뒤지고 다녀도 예린과 정국 두 사람을 찾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길에서 무거운 이삿짐 나르는 할머니를 우연히 만나 이사를 도와주게 된 인연으로 그 집에 며칠간 숨어있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관리들이라 할지라도 일반 민가까지 함부로 수색하지 못할 거란 사실, 두 사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예린은 할머니가 건네주는 은전닢들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재워주시고 먹여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이런 것까지... 할머니, 정말로 감사해요.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

“으이그, 은혜는 무슨~ 그런데 두 사람 이제 어디로 가려고?”

“홍진으로 가려구 해요.”

“홍진? 왜, 배라도 타려고?”

“네, 다른 나라 가려구?”

“음... 네, 맞아요.”

“여행 같은 거라도 가려는 거야?”

“아, 아뇨... 다른 나라로 가서 살려구요.”

예린의 말에 할머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상에 율도보다 더 좋은 나라도 없을 텐데 왜 다른 나라 가서 살려구? 부모님도 그거 아시구?”

“아, 아뇨... 그, 그게...”

부모님이란 말에 예린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아버지 강운예의 근엄한 표정과 어머니 이소영의 자상한 미소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아빠, 엄마, 난...’

그녀가 말을 제대로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자, 할머니는 무언가 눈치를 챈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두 손을 꼭 어루만지며 달래는 듯 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바로 다른 나라 가지 말구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 어머니 뵙고 얘기 나눠봐. 그렇게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그 때 다른 나라로 갈지 말지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야.”

“할머니...”

예린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는 옆에 서 있는 정국의 잠시 노려보더니,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팡, 후려쳐버렸다.

“멀쩡하게 생긴 놈이 어린 여자애랑 지금 바다 건너 다른 나라 가서 뭐 하려구? 넌 부모님한테 얘기나 하고 나온 거냐?”

“아! 아, 저, 제 부모님은...”

제 아버지는 마루한이시고 주나라 황제입니다만,

이렇게 말했다가는 할머니한테 미친놈 취급받으며 부지깽이로 처맞을지도 모르는 분위기.

“...죄송합니다.”

정국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온 나라가 전쟁 중인 거 몰라? 대월국에 우리나라 군대가 들어간지 얼마 안 되서 천제인가 뭔가 하는 천제국 임금이 대군을 이끌고 들어오고, 그것 때문에 우리 태상국께서도 또 군대를 이끌고 대월국으로 가시고. 지금 큰 전쟁이 또 한 번 터질꺼라고 세상이 난리인데, 어린 너희 둘이 외국 나가면 무탈하게 잘 지낼 수 있을 거 같아? 혹시... 너희 징집 되서 군대 가기 싫다고 외국 나가려는 건 아니지?”

정국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저희 아직 군대갈 나이도 아닌걸요? 그런데 전쟁이라구요? 태상국께서도 군대를 이끌고 나가셨구요?”

“몰랐어? 매일 같이 신문사에서 호외 뿌리고 그러는데. 설마 너희 나보다 글 모르는 건 아니지?”

도망다니는데만 바빠서 전쟁이 나고 강운예가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는 걸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두 사람,

놀란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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