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대동력 9,994년 5월 40일 (1)
* * *
오전 7시, 대월국 호문번 환강산성 일대
진미령과 흥원번의 도깨비 무사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는 율도군들은 여전히 환강산성이 있는 동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박윤수 중장으로부터 복귀하라는 명을 받은 후였지만, 어젯밤 환강산성 방향에서 들려온 엄청난 폭발음 때문에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율도군 몰래 환강산성으로 먼저 보냈던 흥원번의 무사 천태랑도 돌아오지 않은 상태,
진미령은 자신의 눈으로 환강산성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곳에 계신 아버지는 과연 생존해 계신 것인지 반드시 확인하고 말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들이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을 때,
일행들보다 앞서서 언덕 꼭대기에 다다른 율도군 무사가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내고는 재빠르게 말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자세를 낮추고 언덕 아래를 주시했다.
이들을 지휘하는 율도군 무관도 말에서 내려 무사가 있는 곳으로 자세를 낮추고 뛰어왔다.
“무슨 일인가?"”
무사가 손가락으로 언덕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환강산성이... 그리고 주변에 온통 천제국군들의 숙영지가 있습니다.”
진미령도 말에서 내려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오? 앞에 무슨 문제라도... 하앗!”
그녀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언덕 아래로 천제국의 붉은 깃발들이 무수히 휘날리고 있는 가운데, 어림잡아도 수천 개는 되보이는 크고 작은 천막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침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지 천막 여기 저기에서 무수한 연기들이 하늘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리고,
천막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 위쪽 언덕에 있어야 할 환강산성은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지고 깨어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성벽을 이루고 있던 거대한 돌들은 물론 그 안에 있던 건물들 모두, 성한 채로 남아 있는 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율도군 무관이 망원경을 꺼내 성이 있던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벽이나 건물이 무너진 모양, 검게 그을린 흔적으로 보아 화약 무기에 파괴된 것 같은데... 그럼 이제 천제국도 우리처럼 착발신관을 사용하는 신형 포탄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그 말에 진미령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천제국이, 환강산성을 저리 만들었단 말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저럴 수 있겠습니까? 반란군은 이미 악뢰관 북쪽으로 모두 퇴각했고 남아 있는 건 여기 있는 천제국군들뿐인데.”
“아니, 천제국이 왜... 왜 갑자기 대월국을...?”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한 듯 마구 요동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천제국... 천제국이 왜...?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분명 저 곳에 계셨을 텐데...’
진미령도 지난번에 본 율도군 무사들에 의해 살해당한 기병 전령으로 인해 이미 천제국군이 대월국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천제국이 국왕이 머물고 있는 환강산성을 공격할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우리 군 비화포로도 성벽을 저렇게까지 부수긴 힘들 텐데, 대체 화약을 얼마나 때려 박은 포탄이길래 두꺼운 돌로 된 벽이며 흙벽들까지 모조리 무너져 내렸단 말인가?”
“어젯밤 들려온 소리로는 두 차례에 걸쳐 수십 여발 정도를 쏘았던 것 같습니다.”
“수십 여발 만으로 성 하나를 없애버릴 정도의 위력이라면... 태상국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화약무기가 발달할수록 성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겠군. 그나저나 성이 저 꼴이 되었다면 저 안에 있던 이들은 모두 다...”
무관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옆에 있는 진미령 때문이었다.
성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때,
언덕 아래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한 떼의 군마들이 율도군이 있는 언덕을 향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천제국 놈들이 우리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아침밥 먹는데 정신 팔려서 못볼 줄 알았더니만... 자, 놈들이 따라붙기 전 서둘러 언덕을 벗어나도록 하자. 공녀, 환강산성을 보셨으니 이제 약속대로 우리와 함께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무관은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어있는 진미령의 손을 잡아끌고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20여 명의 두억시니 가마꾼들이 든 가마 하나가 친위대 무사들의 엄중한 호위 속에 언덕 위 환강산성이 있던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천제 정선교가 탄 가마였다.
그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잿더미로 변한 환강산성을 둘러보며 흡족한 듯 웃음 지었다.
“화약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는 게 흠이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하군.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성문이고 성벽이고 제대로 남아있는 것 하나 없이 모조리 부서져 버렸기에, 가마꾼들은 천제가 타고 있는 가마를 짊어진 채 잔해 위를 불안 불한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으으... 으으윽...!”
그 때, 무너진 잔해 여기저기에서 고통어린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천제벽력포의 엄청난 화력에 성에 있던 국왕파 도깨비들 대부분이 폭사했지만, 건물 더미에 깔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정선교는 고약한 표정을 지으며 가뜩이나 작은 눈을 뱀처럼 가늘게 뜨며 말했다.
“대월국 놈들인가? 소리가 귀에 거슬리는군. 모처럼 멋진 광경을 감상하는데 방해되잖아?”
천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마를 호위하고 있던 친위대 두억시니 무사들이 칼과 창을 들고 소리 나는 곳을 해집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숨어 있는 대월국 도깨비를 발견하기만 하면,
푹! 푸슉!
“으, 으악~! 사, 살려줘...!!!”
돌과 나무 기둥 아래 깔려 있는 생존자들의 몸을 칼과 창으로 잔인하게 꿰뚫어 간신히 붙어 있는 숨통을 끊어 놓았다.
친위대가 칼과 창을 허공에 휘둘러 날붙이에 붙은 피와 살점들을 떨구고 가마 있는 곳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주변은 고요한 적막에 빠져들었다.
“어차피 성산백의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대월국왕은 적당한 구실을 잡아 처리하려고 했는데, 일이 우리의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듯 합니다.”
가마 옆에서 따라오던 대사마 주진경이 말했다.
도깨비라 그런지 호리호리한 체격에 갸름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언뜻 보면 2, 30대의 청년으로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50세가 넘는 군의 행정 책임자였다.
“그 말이 내 말이야. 진짜 대월국왕이 죽었든 아니었든, 이제는 살아있지 않은 건 확실하겠지. 그런데 정말 대월국왕이 살해되었을까? 이곽이 들은 대로 이곳에 남아있던 우리 군사들이 그런 실수를 했을리는 없을 것 같고... 설마 반란군 놈들이 암살자를 보냈던 걸까?”
주진경이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성산백이나 그에 동조하는 번주들 가운데에서도 이 성에 몰래 잠입해 왕을 살해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들을 수하에 두고 있는 이들이 있기는 한 것 같지만... 하오나 성하, 만일 그들이 정말 국왕을 살해했다면 우리 군이 죽였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왕의 수급을 베었다, 자랑하고 나서는 게 이 곳 대월국에서는 더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 말입니다.”
“그럼 대체 누가 죽였다는 게냐?”
천제의 신경질적인 물음에도 주진경은 주눅 들기는커녕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율도의 태상국, 강운예의 소행일 것입니다.”
“강운예 그 놈이? 어림없는 소리!”
정선교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피식피식 웃어댔다.
“강운예 그 놈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다! 그 놈은 무식하게 싸울 줄만 알지, 국왕을 죽이는 모략까지 생각해낼 수 있는 머리를 가진 놈이 아니야!”
“하오나 성하.”
주진경이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강운예는 이미 몇 십 년 전부터 계몽 전쟁에 참전했던 각국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기 위해 4군단이라는 부대를 조직해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대월국왕 역시 그들이 전범이라 부르는 척결 대상 중 한 명이었음은 대동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구요.”
“...그래서, 그 놈이 대월국왕을 죽였단 말인가?”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환강산성 안에 있던 국왕파들로 하여금 우리 군이 국왕을 시해한 것처럼 믿게끔 조작도 했을테지요. 그래서 이곽이 말한 것처럼 그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렸을 테구요.”
“그 놈이...? 계몽 전쟁 때의 복수를 지금...?”
정선교는 작은 눈을 찡그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하면 놈이 흥원을 차지하더라도 대월국 귀족들의 반발이 심할 텐데? 게다가 흥원은 국왕의 친족이 다스리는 땅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우리 천제국이 국왕을 암살한 것처럼 덮어씌우려 했겠지요. 게다가 국왕 뿐 아니라 여기 있는 왕자까지 죽였다면, 이제 남은 왕위 계승자는 단 하나... 강운예가 데리고 있는 7왕자 한 명 뿐일 테니 말입니다.”
그 말에 정선교의 가느다란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네, 성하. 강운예는 7왕자를 허수아비 국왕으로 앉혀 놓고 대월국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 했겠지요. 하지만 환강산성에 있던 자들 중 살아 남은 자는 하나도 없으니, 지금부터는 절대 강운예의 모략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겁니다.”
“이 놈, 처음부터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정선교는 언짢아하는 표정으로 입을 쩝쩝거렸다.
“명분 같은 걸 대단히 신경 쓰는 놈이니 대월국을 제 아가리에 바로 털어 넣기보다는 7왕자를 통해 간접 통치하는 편을 택하려는 것이겠지. 영악한 놈...!”
“우선 환강산성의 국왕파군이 먼저 우리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성 안에 있던 우리 군사들을 구속하였기에 부득이 하게 성을 공격하게 되었다고 선포해 놓도록 하시지요. 그리고 반란군 번주들에게도 사신을 보내어 회유를 시작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회유? 갑자기 전략을 수정하자는 것인가?”
“국왕이 우리 손에 죽었다는 것을 알면 반란군 모두 크게 동요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반란군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게 된다면... 불필요하게 전선을 양분시킬 필요 없이 율도군이 있는 흥원으로 모든 전력을 투입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정선교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옳거니! 대사마의 말이 옳다! 이래서 머리 나쁜 두억시니들보다 머리 좋은 도깨비들이 이 나라에 필요하단 말이야, 하하하하하~!”
천제는 주위에 있는 가마꾼들과 친위대들이 모두 두억시니라는 걸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친위대 무사들은 이런 말을 한두 번 들어본 게 아닌 듯, 조금도 괘념치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만을 경계할 뿐이었다.
그 때, 전령 무관 하나가 언덕을 올라와 천제가 탄 가마 앞에 부복했다.
“아룁니다! 숙영지 서쪽 언덕에서 율도군으로 보이는 자들을 발견, 현재 추격 중이 있습니다!”
율도군이란 말에 정선교는 가마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놈들이 벌써 여기까지 왔단 말이냐?”
주진경이 그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아마 탐망을 나온 자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을 터이니 직접 확인하기 위해 병력을 내보냈겠지요.”
그 말에 천제는 두 눈을 뱀같이 치켜뜨고 전령 무관을 향해 소리쳤다.
“율도 놈들은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추격부대에 일러 놈들을 찾아 모두 수급을 베어 가져오라 전하라!”
“명 받들겠나이다, 성하!”
전령 무관이 즉시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오전 8시, 대월국 호문번 환강산성 일대
붉은 갑주를 입은 천제국의 기병들이 검은 갑주를 입은 율도군들을 맹렬히 뒤쫓고 있었다.
정찰병을 발견하면 어느 정도 거리까지 밖으로 몰아내고 더 이상 추격하지 않는 게 보통인데, 천제국 기병들은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악착같이 따라붙고 있었다.
“먼저 가십시오, 제가 뒤를 맞겠습니다!”
천제국 기병들의 추격이 계속되자, 편전을 사용하는 율도군 무사가 말 안장에서 활을 꺼내며 무관에게 소리쳤다.
“어제 지나온 세 갈림길에서 기다리겠다!”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무사는 말머리를 좌측을 틀어 천제국 기병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천제국 기병들도 율도군 중 하나가 방향을 바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목격했다.
“흥, 한 놈 희생해서 시간이라도 벌어보겠다는... 크악...!”
앞서 달려가던 천제국 기병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 그가 말과 함께 쿵, 하고 땅바닥에 처박혔다.
율도군 무사가 100보 밖에서 쏜 애깃살이 말의 앞다리를 정확히 꿰뚫었던 것이다.
“앗!”
“으아아악!”
뒤 따라오던 기병들의 말들이 땅바닥에 쓰러진 말과 기병의 몸뚱이에 걸려 연쇄충돌을 일으켰다.
달려오던 천제국 기병들이 우르르 쓰러지는 가운데, 율도군 무사는 천제국 기병들과 여전히 100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그 주위로 호를 그리며 천천히 말을 달리는가 싶더니,
슉!
또 한 발의 애깃살을 천제국 기병들에게로 날렸다.
“끄아아아아아악~!”
부대기를 들고 있던 기병의 투구 사이로 애깃살이 날아들고,
화살에 한쪽 눈을 관통 당한 기병은 부대기를 손에서 놓치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멍하니 있지 말고 따라가! 같이 응사하란 말이다!”
수석식 소총을 들고 있던 기병들이 앞으로 나와 율도군 무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타당!
하지만 100보의 거리라면 그들이 가진 강선조차 없는 수석식 소총으로는 명중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율도군 무사는 그들의 총격을 비웃듯 유유히 말을 달리며 다시 통아에 애깃살을 넣고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슉!
“커헉...!”
총구에 화약과 탄을 넣고 재장전 하던 기병 하나가 목덜미를 붙잡고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여지없이 그의 목에 애깃살이 박혀 있었다.
천제국 기병들의 숫자가 하나씩 둘씩 줄어드는 와중,
율도군 무사가 전통에서 조금 다른 모양의 화살 하나를 꺼냈다.
일반 화살보다 긴데다가 끝에 아이 팔뚝 정도 길이의 기다란 원통이 달려있는 화살이었다.
그는 원통 뒤에 있는 줄을 강하게 잡아당긴 후 재빠르게 활시위에 재어 천제국 기병들의 머리 위로 쏘아 보냈다.
“저건 또 무슨...?”
천제국 기병들에 등에 맨 방패를 들어 막으려 하는 찰나,
푸슈슈슈슉!
화살에 매달린 원통에서 회색 연막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율도군이 사용하는 연막 화살이었던 것이다.
희뿌연 연기에 갇힌 천제국 기병들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
율도군 무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일행들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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