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대동력 9,994년 5월 39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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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대월국 흥원번 흥원성 일대 율도군 주둔지
점심 식사 이후부터 율도군 주둔지에 있는 병력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윤수 중장이 모든 기병 부대에 출정 명령을 내린 것이다.
기병들은 자신의 말허리 위에 안장을 얹고 군장과 무기는 물론 부대에서 보급 받은 전투 식량도 함께 싣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싣고 있는 전투 식량의 양은 한눈에 봐도 저번 출정 때에 비해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었다.
휴대하는 화살이나 화약, 탄환의 양도 마찬가지였다.
기병들이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영록이 성시우 대위와 함께 지휘부 막사를 하고 있었다.
“마루한, 마루한이시다...!”
“아, 마루한, 부디 무운을...”
길에서 그와 마주친 군사들은 거수 경례를 하거나 투구를 벗고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영록도 가볍게 목례로 화답하며 지휘부 막사를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지휘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용마로 소장이 그를 보고 경례를 하며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마루한?”
“안녕하세요, 부군단장님? 군단장님을 뵈러 왔는데 어디 계시죠?”
“군단장은 기병 부대 지휘관들과 함께 작전 지역 정찰을 나갔습니다. 아마 저녁 즈음이 되어서야 돌아올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영록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관장님으로부터 작전 명령이 내려와서 기병들 모두 천제의 부대를 요격하러 출정한다면서요? 그런데 군단장님은 저더러 주둔지에 남아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용마로 소장은 난처해 하며 말했다.
“태상국 기하께서 곧 이 곳에 도착하시니 마루한께서는 주둔지에 남아 그 분을 맞이하시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번 출정의 목적은 천제의 부대를 직접 요격하려는 게 아닙니다. 여러 부대가 곳곳에서 적을 기습해 지치게 만들고 보급로를 끊는게 이번 출정의 주요 목표지요. 이런 경우 소부대 단위로 흩어져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위험 요소가 많습니다. 그래서 군단장님도 마루한을 이번 출정에 모시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관장님이 절 이 전쟁에 보내신 건 전쟁의 여러 상황 중에서 많은 것을 보고 몸으로 직접 느끼게 하기 위함이셨어요. 부군단장님 말씀대로 소부대 단위로 움직이다 보면 정말로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도 생길 수 있겠죠. 하지만 관장님께서는 제가 그런 상황도 직접 겪어 보고 스스로 헤쳐 나가는 법을 배우길 원하시는 마음으로 절 이곳으로 보내셨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굳이 이 전쟁터에 절 보내실 리 없으셨겠죠.”
“마루한, 하지만...”
“관장님이 제가 주둔지에 남아 있는 걸 보시면 오히려 크게 실망하실 거예요.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어요. 그러니 군단장님을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네?”
용마로 소장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군단장님께는 제가 마루한을 모시고 다니겠다고 보고드리겠습니다. 군단장님이 정찰에서 돌아오고 난 후 출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 전까지 채비를 하시고 푹 쉬고 계시지요.”
“아, 고맙습니다, 부군단장님!”
영록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막사로 돌아갔다.
영록은 자신의 막사로 돌아와 군경 여단 무사들과 함께 군장을 꾸리고 출정 준비를 서둘렀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자리에 앉아 뇌홍식 권총의 약실에 미리 화약과 탄을 재어 놓으며 박윤수 중장이 돌아오길 기리고 있을 때,
똑똑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군경 여단 무사 하나가 나가 문을 열어보니 흑영단원 율도 도깨비와 한 여인이 함께 서 있었다.
율도군의 검은색 전포로 갈아입은 유경패였다.
“마루한께서도 이번 출정에 함께 하신다면서요? 우리 유경패 단원이 마루한께서 주둔지를 떠나시기 전 한번이라도 더 만나뵙길 소원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율도 도깨비의 말에, 영록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경패 누나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군경 여단 무사들이 두 사람을 막사 안으로 안내했다.
유경패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영록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마루한께 누나라고 불리니 민망스럽네요. 그냥 이름으로 절 불러주세요. 그게 제 마음이 편할 거 같아요.”
“나이대로라도 저한테는 누나 뻘인걸요?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 마세요.”
군경 여단 무사들이 의자를 가지고 오고, 영록은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전 그 때 누나가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저와 예린이를 지키려다 많은 4군단 무사님들이 희생되신 것처럼 말이에요. 그 때는 정말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슬펐는데, 누나가 이렇게 건강히 돌아오셔서 너무 기쁘고 감사해요.”
영록의 말에 유경패는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경험을 했지요. 사람으로써, 여자로써 견디기 힘든 경험 말이에요...”
그간의 기억들 때문인지, 그녀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정말 그냥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이렇게 짓밟힘 당하는 채로 살아봤자 무슨 소용 있나, 두억시니나 도깨비들의 노리개로 살아서 무얼 하나, 그냥 깨끗이 죽어버리면 이 고통도 끝날텐데... 놈들에게 유린당하는 매일 매 시간 동안 이 생각들이 머리 속에 가득했지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나더군요. 도망가자, 어떻게든 여길 빠져 나갈 기회를 찾아보자, 나가서 어떻게든 율도로 돌아가자, 돌아가기만 한다면 날 짓밟은 이들 모두에게 복수할 기회가 분명히 올 거다, 내가, 이 유경패가 어떤 사람이란 걸 저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때가 분명히 올 거다... 이 생각이 이를 악물고 참았지요. 그러니 진짜 기적적으로 탈출할 기회가 생겼어요. 이번에 우리 군에 투항한 백사님의 부대가 저를 끌고 가던 성산백의 군대를 기습했던 거지요.”
유경패를 따라 율도군에 투항한 백사는 그녀와의 약속 대로 박윤수 중장 등에 의해 손님으로서 대접 받고 있었다.
박윤수 중장은 백사에게 천제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모두 구출해 율도국으로 데려올 수 있도록 태상국 강운예에게 건의하겠다고 약속했고, 백사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천제국 군대의 현황 등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다.
유경패는 나이 어린 마루한이 자신이 당한 험한 일들이 어떤 것인지 모두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록은 그녀가 두억시니와 도깨비들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 모두 짐작할 수 있었다.
유민이 마선욱에게 당했던 짓,
유성모에게 당했던 짓,
박광에게, 전도한에게, 일월촌 아지트에 숨어있던 조폭들에게
매일 같이 당했을 그 짓,
심지어,
자신의 눈 앞에서까지 범해졌던 바로 그 때, 유민이 당했던 그 치욕스러운 짓들...
영록은 그녀가 하는 말과 그녀의 감정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편으로,
유경패가 정말 대단한 정신력을 가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는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는 중에도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거구나... 아... 유민이도... 유민이도 부디 그래야 하는데...’
일월촌 조폭들의 아지트를 탈출하던 때,
도망치는 자신을 위해 총 개머리판으로 마선욱의 머리를 후려치고 달려드는 조폭들을 막아섰던 유민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유민이는... 지금 무사히 있는 걸까?’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온몸을 엄습했다.
오후 7시, 대월국 호문번 환강산성 10리 밖
10만이 넘는 천제의 친정군 행렬은 수십여리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두억시니는 물론 도깨비, 두두리, 다모랑, 아리랑까지 여러 종족들로 이루어진 대부대였다.
물론 근접전을 담당하는 보병들은 대부분 두억시니, 혹은 두두리들이었지만, 총과 대포, 특히 이번에 새로 제작한 천제의 비밀 무기 ‘천제벽력포’와 기병 등 주요 전력을 운용하는 이들은 모두 도깨비와 아리랑들이었다.
천제국이 더 이상 두억시니들만의 나라가 아니라는 걸 대동 천하에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행군 도중 앞서 가는 부대로부터 기병 전령 둘이 행렬 중앙으로 급히 말을 달려 오고 있었다.
그들은 행군하는 군사들을 거슬러 친위대가 호위하는 천제의 마차가 있는 곳을 향해 곧장 말을 달리고 있었다.
“멈춰라!”
금으로 세공된 화려한 갑주로 무장한 친위대의 두억시니 무사가 전령들을 막아 세웠다.
“환강산성에 있던 7방면대 11군단으로부터의 급한 전갈이오.”
전령들이 말 위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친위대 무사는 두루마리를 받아들고는 친위대장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얼굴이 온통 칼자국, 화살 자국 등 상처로 가득한 두억시니 친위대장 규영은 전령들이 가지고 온 두루마리를 받아 주욱 훑어보고는, 표정을 험상궂게 구기며 천제가 타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30마리의 물소가 이끄는 천제의 마차는 거대한 수레 위에 으리으리한 가옥을 올려놓은 형태였다.
멀리서 보면 마치 화려한 집 한채가 길을 따라 스르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처럼 어마어한 규모의 마차이다 보니 공병대가 앞서서 이동로를 확인하는데,
마차가 통과하기 힘든 곳이 있다면 길을 넓히고
땅이 울퉁불퉁하여 행여나 마차가 흔들릴 만한 곳이 있다면 모조리 평탄화 작업을 해야만 했다.
수레 위로 올라가니 거대한 도끼를 든 두 명의 두억시니 무사들이 가옥의 입구 양 쪽에 서서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규영을 보자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군례를 하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아름다운 장식품들이 가득한 방이 나왔다.
천제국 궁성의 화려함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마차 내부의 모습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지어 다른 나라의 왕성보다 더 호화찬란한 모습이었다.
하늘하늘거리는 붉은 색과 흰색, 노란색의 눈부신 비단 가림천 사이로
얇은 천쪼가리로 가랑이와 커다란 가슴 만을 간신히 가린 절세 미인들이 눈웃음을 치며 오고가고 있었다.
천제 정선교가 전장까지 데리고 온 궁녀들이었다.
외모를 보아하니 대부분 아리랑이나 미호랑 여인들이었고, 간간히 한자손으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들 고르고 고른 미인들인지라 얼굴이나 몸매 모두 대동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 할 미모들이었다.
친위대장이 들어온 걸 본 그녀들은 수줍은 듯, 혹은 홀리는 듯한 교태어린 웃음을 지으며 길을 터주었다
규영도 그녀들을 보고 혀로 추잡하게 입술을 핥으며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천제는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이 안에서 궁녀들과 함게 밤낮 할 거 없이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화장실로 쓰는 공간 외에는 넓게 탁 트여있었는데, 그녀들 모두 비단으로 된 푹신한 보료와 이불 위에서 천제와 함께 잠을 자고 같이 몸을 섞고 뒹굴며 여정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규영이 고개를 들어 돌아보니 천제가 이 방 가운데에 있는 단상 위에 놓인 화려한 장식과 금실 은실로 수놓아진 비단 등받이가 있는 호사스러운 의자에 있었다.
천제 정선교,
한 때 대동 전체를 호령했고 신 그 이상의 존재로 추앙받았던 사내,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는 하늘의 황제라는 칭호가 아깝다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 비루하게 생긴 인물이었다.
단추를 풀어헤친 비단 옷 사이로 보이는 얇은 가죽만 붙어 있는 좁은 어깨의 볼품없는 상체에는 갈비뼈가 훤히 보이고 팔 다리마저 노인네처럼 얇고 앙상한데 배만 올챙이처럼 볼록 튀어나와 있었고,
3,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시커먼 얼굴은 작고 가느다란 눈에 광대뼈는 툭 튀어나오고 볼은 움푹 들어갔는데, 귀는 앞에서도 양쪽 귀의 모습이 모두 보일 정도로 살짝 앞으로 접혀 있는 것이,
이렇게 천박하게 생긴 자가 과연 천제가 맞는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마루한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신이요 통치자로서의 위엄을 갖춘 모습이라 평가 받는 강운예나 황치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행색이었다.
그의 주변으로 네명의 아름다운 궁녀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녀들 모두 아예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었는데
한 명이 등 뒤에서 그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고,
두 명의 궁녀들은 양쪽에서 천제의 팔과 손을 정성그럽게 안마해주고 있었으며,
마지막 궁녀는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규영이 다가가 보니 천제의 바지는 이미 발목 밑으로 내려와 있었고,
그 앞에 무뤂꿇고 앉아 있는 궁녀는 그의 작고 볼품없는 육봉을 입에 넣고 억지 신음을 내며 고개를 앞뒤로 흔들고 있는 중이었다.
“흠흠!”
규영이 단상 아래 서서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제서야 정선교는 자신의 앞에 있는 궁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 보았다.
“또 무슨 일인가? 곧 대월국왕이 숨어 있는 그 산성에 도착할 거란 이야기는 오늘만 벌써 너댓번은 들은것 같은데?”
규영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는 조심스럽게 단상 위로 올라갔다.
“행군을 여기서 잠시 멈춰야 할 것 같사옵니다, 성하.”
“뭐?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규영이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내밀며 말했다.
“11군단장 동금 휘하의 이곽이 보낸 전갈이온데, 환강산성의 대월국 놈들이 우리를 배신했다 하옵니다.”
“뭐라?! 배신?!”
정선교는 궁녀의 머리를 거칠게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꺄악~!”
비명을 지르며 넘어진 궁녀가 고통에 흐느끼든 말든, 정선교는 규영의 손에 든 두루마리를 빼앗듯 낚아채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뭐? 우리 군사들이 대월국왕과 하나 남은 왕자를 시해했다 우기고 있다고?”
“네, 대월국왕과 왕자가 실제로 시해되었는지, 아니면 이게 무슨 농간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확인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런 가운데 환강산성으로 입성하는 건 어려울 것이니 전군을 일단 여기서 대기시키는 것이...”
규영이 말을 듣던 정선교가 뱀 같은 눈을 교활하게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여기서 환강산성이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
“약 10리, 1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10리... 그럼 이미 천제벽력포의 사거리 안이지 않은가?”
정선교가 궁녀들에게 의관을 가져오라 명했다.
알몸의 궁녀들이 화려한 황금빛 천제의 의복을 가지고 오고, 정선교는 그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갖춰 입으며 말했다.
“친위대장은 가서 일단 전군의 행군을 정지시키고, 모든 천제벽력포를 지금 당장 환강산성을 향해 포격이 가능한 위치로 이동시켜 방렬시키라 전하라. 어차피 반란군 따위에 져서 쫓겨난 왕, 그런 왕이 살이 있으나 없으나 우리가 이 나라를 접수하면 그만이다. 오늘 신무기의 위력을 이곳에서 직접 시험해 볼 것이다.”
“예! 성하!”
명을 받은 규영이 급히 밖으로 뛰어 나갔다.
오후 9시, 대월국 호문번 환강산성 10리 밖
일반 포의 너댓배는 될 듯 한 크기와 길이, 무게를 지닌 거대한 천제벽력포를 방렬시키는 데는 한 시간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는 사이 이미 해는 저물고 어둠 사이 두 개의 달이 높게 떠올라 있는 상태.
하지만 표적은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성이었기 때문에 목표를 조준해 포격을 날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성하, 포격 준비가 완료되었사옵니다.”
친위대장 규영이 천제에게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정선교는 높은 언덕에 마련된 그를 위한 단상에 앉아 환강산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그가 총애하는 궁녀 셋이 그가 즐기는 술과 안주가 든 상을 들고 대기하는 중이었다.
성곽 여기 저기 피워놓은 횃불의 불빛으로 인해 밤인데도 성의 윤곽은 제법 뚜렷이 눈에 들어왔다.
“포격을 준비하는데만 1시간이 넘게 걸려? 이래가지고서야 진짜 전쟁 때 제대로 포를 쏠 수나 있겠어?”
다소 신경질적인 천제의 반응에, 규영은 그를 달래려는 듯 거칠기만 한 두억시니 답지 않은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행군 도중 갑자기 방렬 명령을 받은 지라 포병 지휘관들이 마땅한 포진 위치를 잡지 못해 시간이 많이 소요된 모양입니다.”
“실제 전쟁 때에도 이렇게 행군하다가 갑자기 포진을 점령해야 할 때가 많을 것이다. 적은 우리가 여유롭게 포를 방렬할 시간 따위를 주지 않는다. 두 번 다시 포 방렬하는데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면 포병 지휘관들 모두 그 자리에서 참수 시킬 것이라 확실히 전해 주어라.”
“네, 성하! 분부 받들겠나이다.”
20여문의 천제벽력포가 모두 포격 준비를 완료하고,
정선교가 손에 들고 있던 황금 부채를 머리 위로 들었다가 힘차게 밑으로 휘둘렀다.
그와 함께,
“방포하라!!!”
“방포하라!!!”
친위대 두억시니 무사들이 우렁찬 목소리가 밤하늘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펑!
펑!퍼벙! 펑! 펑!
각 포진의 천제벽력포들이 귀를 찢는 굉음을 내며 일제히 불꽃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슈우우욱~!
슈우우우우우욱~!
별빛 사이로 육중한 포탄이 하늘을 가르고,
포탄 날아가는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싶어지는 순간,
꽝!
꽈과과광!!!
10리 밖에 있는 천제국군들이 있는 곳까지 폭발의 위력으로 지축이 흔들렸다.
커다란 검은 연기가 밤하늘 높이 치솟으며 환강산성을 감싸는가 싶더니,
우르르, 쿵! 쿵!
폭발에 휘말린 환강산성의 돌벽과 흙으로 된 토성 부분들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대충 가시고 환강산성의 전경이 다시 한 번 두 개의 달빛 아래 드러났을 때,
폐허가 되기 직전 모습으로 처참하게 부서진 환강산성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무 문만으로 저런 산성 하나쯤은 간단히 초토화시킬 수 있군. 그래, 아주 좋아. 포병 지휘관들에게 초탄 모두 명중했으니 오늘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해. 그리고 어서 둘탄도 날려서 저기 저 곳에 성이 있었나 어쨌나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버리라고 전하고.”
정선교는 궁녀가 주는 술을 받아 마시며 입술을 씰룩였다.
이윽고 천지를 흔드는 폭음과 함께 두 번째 탄들이 밤하늘에 날아가고,
고막을 찢는 폭발의 소리와 함께 환강산성이 또 한번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두 번째 연기가 걷혔을 때, 그곳에 있었던 횃불의 불빛도 달빛에 반사 되던 성벽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망원경을 통해 부서진 성의 잔해를 둘러보며, 정선교는 소름끼치는 소리로 웃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