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대동력 9,994년 5월 39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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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4시, 거록 서쪽, 누리마루 / 위나라 와의 접경지대
주나라, 정확하게는 주나라의 제후국인 위나라의 국경에서부터 연결되고 있는 도로 작업은 꽤나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숙련된 인부들, 하다못해서 일머리가 있고 손에 감각이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작업을 시켰어야 하는데 율도 등 다른 나라의 감시를 피하겠다고 군사들을 동원해 작업을 하자니 일의 전척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초원지대에 땅을 다지고 돌과 모래를 채워 넣어 반듯한 도로를 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충분히 땅을 다지고 모래와 돌을 채워 넣어 봐도 다음날이 되면 길의 좌우 경사가 다르게 되어 있거나 울퉁불퉁하게 변해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렇게 된다면 사람이나 말의 이동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바퀴가 달린 수레가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게 된다.
게다가 병력이 한 곳에 모여서 작업을 해 봤자 일의 진도만 늦어질 뿐이니 구간을 나눠서 한 구간에 2천에서 3천여명의 병력으로 도로 놓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각 구간 마다 작업을 감독하는 숙련공들은 불과 한 두명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병사들도 손에 익지 않은 일을 계속 하려니 여기저기서 불평불만이 터져나왔다.
“젠장, 논에서 모내기 준비하고 밭에서 삽질하기 바쁠 때에, 왜 내가 지금 이 거록 땅까지 끌려 와서 엄한 데에다가 삽질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씨부랄것~!”
기온이 높고 다습한 율도의 경우 연초만 되도 봄이 시작되고 남쪽에서는 2, 3월부터 모내기를 하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하게 되지만, 누리마루보다 북쪽에 위치한 위나라는 겨울이 늦게까지 지속되기 때문에 5월 말이나 6월 초가 되어서야 농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이 딱 위나라의 농번기였던 것이다.
“토질도 드럽게 나빠서 비만 오면 도로 만들어 놓은 거 푹푹 꺼지기 쉽상이겠다. 어렵게 길 만들어봤자 유지도 못하는 거 아냐?”
“걱정마. 여긴 다른 곳보다 추운데 비는 잘 안오고 겨울 되서야 눈만 미친 듯이 쏟아지고 그런다니까. 비 많이 와서 도로 망가질 일은 없을거야.”
“그럼 겨울에 눈 쌓여서 도로 파묻히는 거 아냐?”
“파묻히면, 여기 배치되는 놈들이 제설 작업해야겠지. 크크크.”
“케케케, 어떤 놈들이 여기로 끌려올지 졸라 불쌍하네. 그 새끼들, 겨울 되면 도로에 눈 치운다고 좆빠지겠구만?”
“눈 치우는 것만 고생이겠냐? 여기 사는 야만 두억시니들이 언제 지랄 발광을 떨지 모른다는데.”
두억시니, 라는 말에 두 병사는 삽질을 멈축 잠시 초원 주변을 둘러 보았다.
눈에 보이는 건 푸른 풀밖에 없는 광활한 대지 뿐,
초원에는 뚝닥뚝닥, 도로를 내는 작업 소리 외에는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한 적막만이 가흐르고 있었다.
“천제국 놈들이 여기 사는 두억시니들을 포섭해 놔서 괜찮다며? 아냐?”
“어제 초관 나으리에게 들어보니까 천제국이 여기 거록에 있는 여러 씨족들을 포섭 하긴 했는데, 대부분 천제국에 있다가 거록으로 넘어온 말이 통하는 놈들만 어떻게 구워삶은 거 같다고 하더라고.”
“그럼, 포섭 안된 다른 씨족들은?”
“뭐... 천제국 말이고 우리 말이고 하나도 안 듣는다는 소리겠지.”
병사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놈들이 갑자기 여기를 치러 올 수도 있다는 소리야?”
“그러니까 매번 기병들 보내서 주변 경계시키고 작업하는 거 아냐? 무기도 바로 옆에 두고 있다가 무슨 일 터지면 바로 삽 버리고 무기 들고 싸울 준비하라고 그러는 거고.”
“이런 제길, 우리가 파고 있는 구덩이가 되려 우리들 무덤 되는 거 아냐?”
“이런 오살 할. 할 말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왜 재수 없게 그런 말을...”
두 사람이 한참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북쪽으로 나가 있던 기병 하나가 말을 달려 오고 있었다.
전력으로 달리는 말발굽 소리 너머로,
적 출현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위태롭게 울리고 있었다.
뿌우우우우우... 뿌우우우우우...!
“북쪽에 적이다! 모두 무장 하고 전투 준비!”
“모두 무장 하고 전투 준비! 빨리 갑주 갖춰 입어! 삽은 버리고 창이랑 활 들어, 어서!”
나팔 소리를 들은 무관들이 다급히 병사들을 다그쳐 모으기 시작했다.
수천의 병사들이 부랴부랴 삽과 곡괭이 등 작업도구들을 집어 던지고,
벗어 놓은 갑옷을 껴입고 머리에 투구를 뒤집어 쓴 채 자신의 무기를 찾아 들고 무관이 있는 곳으로 도열하기 시작했다.
“젠장, 두억시니들이야? 진짜로 두억시니들이 나타난거야?”
병사들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경계를 나갔던 기병 외에는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뭐야, 저 새끼? 지금 뭐 잘 못 보고 저러는 거 아냐?”
“진짜, 떠돌이 두두리들 보고 두억시니인줄 착각해서 저러는 걸지도 모르겠는데?”
기병이 커다란 방패를 앞세워 방어 진형을 구축하고 있는 위나라 군사들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실제로 두억시니들의 형상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드넓은 초원의 지평선 너머로 거대한 군상들이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것들이 한자손보다 배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존재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거록의 야만 두억시니들,
그들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씨벌... 진짜 우리 지금까지 우리 무덤 파고 있었던 거냐...?”
병사들의 다리는 벌써부터 후들거리고 있었다.
거록의 두억시니들은 위나라 군사들에게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두억시니들은 식량 등을 약탈하기 위해 위나라의 국경을 수시로 침법하곤 했다.
그 때마다 국경을 지키는 위나라 군사들은 소수의 두억시니들에게도 큰 피해를 당했다.
언젠가는 300여명의 위나라 군사들이 지키는 국경 요새를 불과 10여명의 두억시니들이 공격한 적이 있었는데, 무려 전사 70여명에 부상자 100여 명라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 요새를 빼앗긴 적도 있었다.
군대가 두억시니를 막지 못하니, 국경 인근에 있는 마을들은 쑥대밭이 되기 일쑤였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거록으로 끌려갔다.
식량으로 쓰거나,
아니면 성적 노리개로 쓰기 위함이었다.
거록으로 끌려간 사람들 중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끔 거록 땅으로부터 자신의 어미가 한자손이었다고 주장하는 두두리나 혼혈들이 국경을 넘어 오는 경우가 있을 뿐이었다.
위나라 병사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두억시니들이 싸움이 끝난 후 죽은 자, 혹은 살아남은 자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지 말이다.
여자라면 노리개로 쓰기 위해라도 살려두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남자는 끔찍한 죽음을 당하는 거 외에는 다른 길은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오직 단 하나의 방법뿐이었다.
죽기 살기로 싸워서 적을 물리치는 것,
그거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병사들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각자의 무기를 꽉 잡아 쥐고 두억시니들이 다가오는 북쪽을 노려보았다.
그 때였다.
뿌우우우우우~! 뿌우우우우우~! 뿌우우우우우~!
갑자기 남쪽으로부터 다급한 나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까 북쪽에서 나던 것과 똑같은 신호.
“나, 남쪽에서도 두억시니들이 몰려오는 건가...?”
병사들이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남쪽 지평선 너머로부터 커다란 도끼와 대도를 어깨에 짊어진 두억시니들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양쪽에서 두억시니들이 위나라 군사들을 포위하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 수는 어림잡아도 수 천여 명.
몇 백 명의 두억시니만 나타나도 몹시 위태로운 상황이건만,
수천명 여명의 두억시니라면 이곳 구간에 있는 2천여 명의 군사들만으로는 상대하기 벅찬 수였다.
“아, 엄니...”
병사들 가운데에서 벌써부터 겁에 질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오후 1시, 파림 무수막 고원 국경지대
율도의 국경에 2개 군단이 추가로 증원된 것을 알았던 것일까,
무수막 남쪽 파림의 포각수들은 이제 더 이상 포격조차 해오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군을 후방으로 물리고 방어진지로 들어가는 것이, 혹시라도 율도군이 치고 내려 올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파림의 포각수들이 천제국의 포를 사용하고 있다는 최기의 보고는 대원수부까지 전달되어 있었다.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이미 파림에 침투해 있던 흑영단원도 현장으로 급파되었다.
율도의 방어 토성으로부터 불과 20여리도 떨어지지 않은 작은 언덕,
이곳에는 파림군의 관측소 겸 전선 지휘본부가 위치한 곳이었다.
이 언덕 아래 후방지역에는 보급과 지원을 담당하는 부대들은 물론 파림 각지에서 끌어 모은 병력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대부분 직업 군인이 아니라 징집되어 끌려온 이들이라 그런지 두억시니 만큼 거칠기로 유명한 포각수 치고는 온순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도 여럿 보였고, 군인이라 하기에도 뭐 할 정도로 군기든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가운데, 관측소에서 근무하는 포각수 병사 하나가 근무를 마치고 교대를 했는지 후방으로 내려와 있었다.
그는 무척 초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디론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병사가 도착한 곳은 후방에 있는 인적이 드믄 자재 창고.
이곳은 실제 무기가 아닌 목검, 날이 없는 창, 나무 방패 등 훈련 물자들을 쌓아둔 곳이라 전시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병사는 누군가 보는 이가 없는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본 후, 조심스럽게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근무 교대 하자마자 달려 온 모양이군. 시간을 잘 맞추는데?”
창고의 어둠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사가 목소리 난 곳을 바라보니 갑주 없이 파림군의 전포만 입고 있는 포각수 하나가 방패들을 쌓아둔 것을 의자 삼아 앉아 있었다.
병사는 그에게 다가가 한층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았어. 천제국 도깨비들이 야단법석을 떨더군.”
“야단 법석? 너희 군 대장들을 상대로 칼이라도 뽑아들었나?”
“아니,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계집애처럼 빽빽 소리를 지르더군. 누가 도깨비 아니랄까봐 말이야. 덕분에 그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잘 들을 수 있었어.”
“다행이군, 그래. 도깨비들이 뭐라고 하면서 소리를 지르던가?”
“그전에...”
병사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속한 돈, 그거부터 줘.”
“허허, 생각보다 성미가 급하시네. 돈이 되는 정보인지부터 들어보는 게 순서 아닌가? 먼저 돈부터 달라고 해놓고 제대로 된 이야기가 하나도 없으면? 친구, 날 바보라 생각하지 말아주었으면 하는데?”
어둠 속에 앉아 있는 포각수가 눈을 부라리며 조용히 말했다.
병사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제국 도깨비들, 왜 약속대로 우리가 추가 공격을 하지 않느냐고, 지금 적의 토성을 향해 2차 공격을 해야 하는데 왜 도리어 병력을 뒤로 뺐냐고, 새하얀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소리를 빽빽 지르더군.”
“그 여리여리한 도깨비 새끼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혓바닥 놀리는 재주뿐이지. 그래, 그래서 너희 군 대장은 뭐라고 대답했나?”
“우리도 위에서 받은 명이 있어서 공격할 수 없다고, 나도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이니 답답하면 위에다 대고 말하라고 말하더군.”
“위라고 하면...?”
“우리 군 총대장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우리 국왕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어둠 속에 앉아 있던 포각수가 주머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내 들며 말했다.
“그런데 친구, 자네는 관측소에 있으니 거기 사정을 잘 알거 아니야? 갑자기 공격을 멈춘 이유, 그 이유가 뭔지 알려준다면 이것부터 주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금화를 본 병사가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그, 그거야 뻔하지! 율도군이 내려왔다는 거, 그것도 수만 명이나 이리로 왔다는 거 우리도 다 들었거든! 무관들 말이 그 정도 병력이면 2개 군단은 족히 넘을 거라던데? 병력이 수만 명이나 추가로 왔다면 그냥 가만히 국경이나 지키고 있을 율도군이 아니라는 거, 때가 되면 국경을 넘어 우리를 공격하러 올 수도 있다는 거 우리 군 무관들도 모두 다 잘 알고 있어! 그러니 병력을 뒤로 빼서 방어 준비를 하려는 거야!”
어둠 속 포각수가 그에게 금화 한 닢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다른 금화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며 말했다.
“그런데 이미 너희는 천제국과 동맹을 맺고 율도를 공격하기로 했잖아? 단지 율도군이 공격해 올까봐 무서워서 병력을 뒤로 뺀 거야? 그럼 천제국이 약속을 어긴 대가로 너희에게 보복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그에 대해서도 들은 거 없어?”
병사는 공중에서 빙그르르 돌았다가 다시 떨어지는 금화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약속을 먼저 어긴 건 천제국이거든. 그래서 우리도 공격을 안 해도 그들에게 할 말이 있는거고.”
“천제국이 먼저 약속을 어겼다고? 무슨 약속?”
“화약, 보내주기로 약속한 만큼의 화약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 우리 군 대장이 도깨비들한테 약속한 화약과 화약 무기를 받지 못하면 율도군과 제대로 싸울 수 없으니 그것들이 올 때까지 공격을 미루겠다고 말하니까, 도깨비들은 이번에 자기네들 천제가 대월국으로 직접 군을 이끌고 가는데 엄청난 무기를 가지고 가면서 걔들 나라에 비축된 화약들을 거의 다 쓸어 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화약이 부족해서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그래도 약속된 2차 공격은 시작해 달라고 말하는 거 내 귀로 똑똑히 들었어!”
어둠 속의 포각수는 손으로 튕기던 금화를 그의 발아래 툭 던져 주었다.
병사가 바닥에 떨어진 금화를 줍느라 허둥지둥 하는 동안, 그는 주머니에서 또 다른 주머니를 꺼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거래 즐거웠네, 친구. 좋은 정보 정말 고마워.”
병사는 주머니를 풀어보고는 그 안에 든 금화들을 보고 입이 귀에 걸렸다.
“헤헤헤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줘. 물론 이런 주머니 두둑이 채워서 말이야. 헤헤헤헤.”
“이를 말인가, 내 조만간 다시 찾도록 하지.”
어둠 속에 앉아 있던 포각수가 먼저 창고 밖으로 나갔다.
병사도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조심스럽게 창고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보았다.
역시, 어둠 속에서 만났던 포각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하늘 위로 갈색 털의 새 한 마리가 하늘 높은 곳에서 북쪽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관측소에 근무하다보니 그도 그 새가 어떤 새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대동에서, 특히 율도에서 주요한 정보들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영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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