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대동력 9,994년 5월 38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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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대월국 흥원번 흥원성 일대 율도군 주둔지
조리병들이 박윤수 중장의 지휘관 막사로 아침 식사를 가져다 주었다.
나무 그릇에 정갈하게 담긴 밥과 나물국, 양념에 재운 고기찜과 채소 절임 등.
야전에서 먹던 전투식량보다는 훨씬 나은 음식들이지만,
군단장의 식사라고 하기엔 다른 무사들이나 일반 군사들이 먹는 식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식단이다.
대월국이나 천제국과 같은 다른 나라 군대에서는 높은 계급의 장수가 먹는 식사와 일개 병졸들이 먹는 식사의 질이나 양은 큰 차이를 보이곤 했다.
계급 높은 장수들에겐 좋은 곡식과 기름진 고기 등이 푸짐하게 나오는 반면,
일개 병졸들의 식사래봐야 잡곡밥이나 염장한 채소, 소금으로 간한 무국 정도가 일반적인 일이다.
그에 비해 율도군은 계급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모두 거의 같은 식사가 나오고 있으니,
확실히 다른 나라 군과 차별된 모습이었다.
조리병들이 야전 탁자 위에 식사를 차려 놓고 나가고,
곧바로 그의 부관이 들어와 지난 밤 있었던 일들에 대한 보고를 시작했다.
“군단장님께서 미리 예상하셨던 대로 지난밤 서래번 포진지를 향한 천제국군들의 야습이 있었습니다. 진지 밖으로 나온 두억시니들 대부분이 우리가 쳐 놓은 매복에 걸려 섬멸 당했고 살아서 돌아간 자는 수십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야간 전투 중에 발생한 우리 군의 피해는 전사 7명, 부상 11명이며 현재 부상자들은...”
박윤수 중장은 천천히 밥숟가락을 뜨며 부관의 보고를 경청했다.
“...이어서 흑영단에서 보내 온 소식입니다. 성산번에서부터 거록 두억시니들을 이끌고 환강산성으로 이동했던 4군단 무사들이 정해진 임무를 완수하고 이곳 흥원으로 복귀 중에 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박윤수 중장도 숟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대월국왕과 그곳에 남아 있던 왕자들도 모두 제거 되었다고 하는가?”
“네, 대월국왕은 물론 왕자까지 모두 4군단 무사들이 직접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다른 왕자들은 전쟁 중 모두 전사 했는지 2왕자만이 국왕과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박윤수 중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군단 본부근무대장에게 4군단 무사들이 주둔지로 복귀하는 즉시 편히 쉴 수 있도록 막사를 따로 배정해 두라고 전하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천제의 위치는 어디쯤이라고 하던가?”
“아직 대월국과의 국경 부근에 있다 하고 밤 사이 이동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흥원공녀의 위치는?”
“공녀 역시 밤사이 이동하지 않고 우리 군과 함께 서래번 일대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합니다.”
박윤수 중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이내 내려놓았던 밥숟가락을 다시 뜨며 말했다.
“공녀와 동행하고 있는 무관에게 영매를 띄워서 지금 천제국군이 서래번까지 들어와 진을 치고 있고 천제가 이끄는 군세도 환강산성을 공격하고 있으니 즉시 공녀를 데리고 흥원으로 복귀하라 전하라.”
아직 천제는 대월국에 당도하지도 않은 상황,
하지만 부관은 이미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즉시 명을 전하라 하겠습니다.”
부관은 군례를 올리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오전 8시, 대월국 서래번 서쪽 경계 일대 전체국 전초기지
천제국군의 진지에서도 언덕 부근 율도군 진지에서 피어오르는 새까만 연기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융 등 야습에 실패하고 전사한 두억시니들의 시체를 불태우는 연기였다.
율도군은 두억시니들처럼 쓰러뜨린 적의 시체를 전시하는 야만적인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만일 전투 중에라도 양군간의 교섭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전사자의 시체를 넘겨주거나 서로 교환하기도 했지만 오직 두억시니들만은 그와 같은 교섭을 필요치 않아 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율도군도 굳이 그들에게 먼저 시체를 가져가라 제의하지 않았다.
시체들은 그렇게 불태워졌다. 적의 시신, 그것도 커다랗고 무거운 두억시니 시체들을 매장하기 위해 군사들이 땅을 파야하는 고역을 할 필요도 없거니와 시체에서 나는 악취와 혹시 모를 전염병의 창궐을 막기 위해서라도 화장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동금 역시 망원경을 통해 기융과 수하 전사들의 시체가 불길에 타들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튀어 나온 그의 입에서는 짐승 같은 으르렁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곽은 환강산성에 도착했다고 하는가? 천제께서는 대월국에 들어오셨다고 하고?”
동금이 망원경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으며 수하 참모에게 물었다.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었소.”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환강산성에서 영매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것이... 환강산성에서 오는 영매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우리가 보낸 영매도 모두 돌아오지 않았소.”
참모의 말에 동금이 버럭 성을 내었다.
“우리는 야전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데 성에 남아 있는 놈들은 거기서 먹고 마시고 퍼질러 자고만 있는 것인가? 내 돌아가기만 하면 거기 남아 있던 놈들을 모두 그냥...!”
순간,
그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백사의 기병대가 율도군에 의해 전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기 전, 양군을 오가던 전령들이 하나둘씩 실종되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환강산성에서 마지막으로 영매가 온 것이 언제더냐?”
말을 하는 동안에도 수십 가지 불길한 생각들이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오전 11시, 대월국 서래번 동쪽 지역 일대
마차에 올라 명천백 피호석의 번군들의 호위를 받으며 은허를 출발했던 유경패.
그녀는 곧장 흥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명천백 피호석의 입을 통해 이미 율도군이 흥원을 점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흥원... 다시 율도로... 다시 흑영단으로 돌아갈 수 있어...!’
그녀는 고개를 내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산천과 몹시도 맑은 하늘,
그저 벌판 위의 포장도 되지 않은 흙길을 지나는 것뿐인데도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성산성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깜깜한 지하 감옥에서 두억시니들에게 매일같이 윤간당하기를 몇 달, 번군들의 막사에 갇혀 강제로 도깨비들의 몸을 받아내야 했던 나날도 몇 달... 그러다 자유의 몸이 되다보니 이런 아무것도 없는 시골길 모습마저도 율도의 도시들 못지않게 아름답게 보여...’
유경패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으니 지난날 괴롭던 시간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감고 있던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경패는 옷소매로 얼굴을 비비며 흐르는 눈물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그 때였다.
“멈춰라!”
“누구냐? 뭐하는 년이냐?!”
갑자기 그녀를 호위하고 있던 명천번군 무사들이 무기를 꼬나 잡고 고함을 질렀다.
마차 안에 있던 유경패도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며 창밖으로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앞쪽을 바라보니 행렬의 선두에 있던 맹약 무사 두 사람이 길 옆 갈대숲을 향해 맹렬히 말을 달려 나아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유경패는 말을 달리는 무사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50보 가까이 달려간 맹약 무사들이 갈대 숲속 한 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아까부터 뭔가 계속 쫓아오는 거 같더라니! 가만히 있어! 또 달아나려 한다면 네년 몸을 꿰뚫어 버리겠다!”
“뭐야, 이런 년이 우리를 쫓아왔다는 건가? 다 빨가벗고 있는 게 그냥 미친 년 같은데? 근데... 손에 웬 식칼을...?”
맹약 무사들은 말 위에서 갈대 숲 아래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장자검과 창을 겨누고 소리를 질렀다.
“손에 든 칼, 천천히 옆으로 던져라!”
“자,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에 두 손 모두 올리고!”
잠시 후 갈대 숲 사이에서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의 여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있는 여인의 온몸에는 상처와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녀의 두 다리 사이에서는 발목까지 흘러내린 시뻘건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유경패가 자세히 보니 도깨비 여자였다.
그것도,
하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이 근처에 사는 여자일까? 시골 사람치고는 귀티가 나는 얼굴인데? 이 부근에서 무슨 변이라도 당한 걸까? 대월국 전체가 전쟁 중이니 충분히 그럴 지도...’
머리는 하얀색이었지만 절대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정도,
젊은 나이에 머리가 하얀색인 걸 보니 태생적으로 머리카락 색이 하얀색인 듯 싶었다.
유경패는 그녀가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너무 무섭게 몰아붙이지 말아주세요. 이 부근 마을 사람일수도 있으니 우선 몸부터 덮어주고 마차 가까이로 데리고 와주세요.”
유경패의 말에 무사들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손에 식칼을 들고 있었소. 미친 여자인 모양인데 그대가 가까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만?”
“미친 사람인지 어떤지 제가 한 번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지요. 괜찮으니 어서 무엇이든 가져와서 저 분 몸부터 먼저 가려주시고 이쪽으로 모셔 주세요.”
명천백으로부터 유경패에게 예의를 다해 모셔야 한다는 명을 받았기에, 무사들도 더는 그녀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무사들은 마차 뒤에서 담요를 꺼내와 하얀 머리 여자의 몸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유경패의 마차가 있는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갈대 숲 어디선가,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한 무리의 도깨비들이 있었다.
구천락과 곤마, 그리고 그의 수하들이었다.
“난 또 저 놈들이 우리가 따라오는 걸 발견하고 쫓아오는 줄 알았는데, 갈대 숲 사이 저 년이 있었을 줄은...! 저 미친년은 또 뭐야?”
구천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속 명천백의 무사들과 번군들을 엿보았다.
거리가 너무 멀어 그들이 어떤 말을 나누는지 알 수 없었지만,
유경패는 하얀 머릿카락의 여인과 무언가 기나긴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의 어깨를 위로하듯 안아주며 친절하게 마차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들이 다시 마차에 오르자 명천백의 무사들과 번군들은 사방을 경계하며 다시 서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계속 서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가면 율도군이 점령하고 있는 흥원땅...”
곤마의 말에 구천락도 고개를 끄덕였다.
“명천백과 그 추종자들이 그 년을 통해 율도에 도움을 청하려 한다더니, 역시 율도군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구나!”
“그 년이 흥원땅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더 쫓을 길이 없어질 것입니다. 율도군이 모든 길목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요.”
“암, 그 년이 흥원으로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지, 율도군과 만나게 해서는 안 되지.”
“그럼 역시 그 전에...?”
구천락이 앞서 가는 명천백의 번군들을 따라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여기 서래에서 흥월까지 가려면 아직도 반나절은 더 가야한다. 이 길로 쭉 가다보면 기습하기 알맞은 곳이 몇 군데 있지. 그것에서 저들을 기다리도록 하자.”
구천락은 곤마와 수하 도깨비들은 갈대숲 사이로 빠르게 달려 사라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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