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대동력 9,994년 5월 37일 (1)
* * *
오전 2시, 대월국 호문번 환강산성
슉! 슉!
어디선가 어둠을 찢는 바람소리가 연이어 들려오고,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대월국 국왕파 군사들의 목에 날카로운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컥! 커헉...!”
갑주와 투구 사이를 정확히 노리고 날아온 화살에 목을 관통당한 도깨비들은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고꾸라졌다.
깊고 야심한 밤,
경비병들이 제압된 것이 확인되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검은 그림자들이 성벽으로 빠르게 접근해왔다.
율도 4군단 무사들과 천제국군의 갑주를 두르고 있는 두억시니들이었다.
그들은 밧줄과 갈고리를 엮은 화살을 성벽 위로 쏘아 걸은 후 재빠른 솜씨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소리 나지 않게 주의하고 날 따라 와라.”
모두 성위로 올라오자 그들을 인솔하는 무관이 선두에 서서 환강산성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계단을 따라 성벽을 내려와 내성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어둠 너머로 내성으로 통하는 입구 앞에도 경비병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무관은 잠시 일행들을 그 자리에 정지시킨 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활시위를 잡아 당겼다.
슉! 슉!
30보 정도의 거리에서 연달아 쏜 두 발의 화살이 두 명의 도깨비들의 목에 정확히 꿰뚫었다.
내성 입구의 경비병들도 제압되자 무관이 손가락으로 내성 안쪽을 가리키며 두억시니들을 향해 말했다.
“저기 저 안에 있는 집들이 보이나? 그 안에 있는 도깨비들을 모두 죽이면 된다.”
“저 안에 있는 도깨비가 모두 몇이나 되나?”
“우리가 알기로는 20여명 정도. 모두 죽이고 나오면 되는 거다. 그리고,”
무관이 내성 안쪽에 있는 가장 큰 건물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건물 안에 있는 놈은 우리가 맡을 테니 너희들은 다른 건물에 있는 놈들을 깨끗이 처리해다오. 너무 요란 떨면 성 안의 군사들이 달려올 수 있으니 최대한 조용히 처리할 수 있도록 하고, 알았나?”
“흐흐, 잘 알아들었다. 일 마치고 성을 빠져나가면 바로 금을 주는 거지?”
“물론이다. 눈이 번쩍번쩍거리게 될 것이다.”
“번쩍번쩍... 아주 좋다... 흐흐흐. 그럼 오랜만에 쑤시고 썰러 가볼까?”
두억시니들은 칼과 도끼 등 무기를 빙빙 돌리며 호기롭게 내성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어서 4군단 무사들도 중앙에 있는 큰 건물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내성 입구를 지날 때, 문득 죽어 넘어져 있는 도깨비들의 목에 꽂혀 있는 화살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보면 일반 화살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판금 갑주를 뚫기 위해 얇고 뾰족하게 만들어진 화살촉하며, 버드나무로 만들어진 화살대, 대동 중부에서 주로 서식하는 새의 깃털 세 개가 붙어 있는 화살깃...
이는 분명 율도군이 쓰는 화살이 아니었다.
이것은,
천제국에서 사용하는 화살이었다.
무관이 두억시니들을 이끌고 성 안으로 들어간 사이,
십여 명의 4군단 무사들은 아까까지 대기하고 있던 숲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뇌홍식 강선소총이나 산탄총 등 총을 가지고 있는 무사들이었다.
성 안으로 잠입해 조용히 적들을 처리하는 임무이기에 총을 가진 무사들이 빠진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또 다른 임무가 있었다.
그들은 일행이 성으로 간 사이 주변에 적당한 곳을 골라 땅을 파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은신처로 쓸 토굴을 파는 줄 알았는데,
그들은 그저 깊고 넓게 땅을 계속 파내려 가기만 하고 있었다.
퍼낸 흙과 미리 떠 놓은 떼들을 구덩이 바로 옆에 그대로 놓은 채로 말이다.
내성 여기저기에서 두억시니들의 칼부림 소리, 콰자작,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중앙에 있는 건물로 들어간 4군단 무사들도 건물 안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소리 없이 살해해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도깨비의 피와 살점들이 덕지덕지 뭍은 군도를 손에 든 무관이 건물 안쪽에 있는 방으로 다가갔다.
“열어라.”
함께 있던 4군단 무사들이 장지문을 좌우로 열어젖히고,
무관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군도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침대에 누워있는 늙은 도깨비가 한 사람 있었다.
바로 대월국의 국왕, 진위선이었다.
“게, 누구냐...?”
그도 주위에서 느껴지는 살벌한 기운에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리에 입은 부상 때문에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제 몸 하나 가눌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검은 전포와 두건으로 몸과 얼굴을 가리고 있는 4군단 무관은 잠시 이 힘없고 나약해 보이기 그지없는 늙은 도깨비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래도 일국의 왕을 대하는 것이니 예의를 갖추려는 듯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율도 태상국 기하께서 보내서 왔소.”
나지막한 목소리로 짧게 대꾸했다.
율도 태상국, 이란 말에 진위선의 표정이 사색이 되기 시작했다.
그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강운예가 보내는 사신들,
율도 4군단에 대해서 말이다.
“그, 그럼 너희가 바로... 강운예 그 놈이 기어이...!”
“일국의 국왕으로서 최후를 맞고 싶다면 내 앞에서 말을 가려하시오. 아무리 경황이 없기로서니, 태상국 기하께 예를 갖춰 말하란 말이오.”
“이 놈! 무엄하다! 너 따위가 감히 내게 강운예 같은 놈에게 예의를 갖춰라 마라 하는 것이냐? 그리고, 그 놈이 날 죽여서 뭘 어쩌려는 것이냐?”
“...기하께서 그대에게 전하라 하시더이다. 국왕이 계몽전쟁 당시 우리 국민들에게 했던 짓들, 우리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고.”
무관은 소름 돋도록 차갑게 말했다.
진위선은 누운 상태로 이를 빠드득 갈며 으르렁 거렸다.
“강운예 이 놈...! 그 옛날 일 때문에 지금 나를...?! 그래, 어차피 성하지도 않은 몸, 차라리 편하게 죽여다오! 그래도 내 아들이 내 뒤를 이어 이 나라를...”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
무관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4군단 무사 하나가 손에 들고 있던 걸 침대 위로 휙, 집어 던졌다.
그의 아들 진효기의 목이었다.
“2왕자를 말하는 것이오? 유감스럽게도 2왕자는 보시다시피 왕위를 잇지 못할 것 같소만.”
진위선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쩍 벌린 채 이불 위에 떨어져 있는 아들의 잘린 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잠자는 도중 참하였으니 부지불식간에 고통 없이 갔을 것이오. 찾아보니 2왕자 말고 부상당한 다른 왕자들도 있던데, 그들도 모두 2왕자처럼 보내주었소. 이제 이곳에는 그대의 유지를 이어받아 대월국을 이끌 이가 아무도 없게 된 것 같구려. 자, 이제 당신도 갈 차례요. 그래도 일국의 국왕이라는 체면이 있을 테니 아들과 마찬가지로 내 고통 없이 끝내 주리다.”
그가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
“마지막 남길 말은 없소?”
무관이 두 손으로 군도를 잡고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진위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운예 그 놈... 단지 옛날 계몽전쟁 때 원한 때문에 나를 죽이는 것이냐? 아니면 이 나라가 도탄에 빠진 지금 나를 죽이고 내 왕가의 가계를 끊고 이 나라를 제 아가리에 삼키려 이러는 것이냐...?!”
무관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답했다.
“태상국 기하의 깊은 뜻을 나 같은 하급 무관이 어찌 알겠소? 다만,”
그의 칼이 높게 들어 올려졌다.
“최소한 그대의 나라는 당분간 존속할 것이오. 그러니 안심하고 가시오.”
휙!
탁!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군도가 소름끼치는 바람소리를 일으키고,
하얀 이불 위로 도깨비의 피가 튀어 올랐다.
그의 말대로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점점 목구멍으로 숨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과,
얼굴 밑의 몸이 아무런 감각도 없다는 것이 느껴질 뿐.
그리고,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르륵 두 눈이 감겼다.
마지막 순간,
그의 눈앞에 몇달전 자신의 명을 받고 성산번으로 떠났던 7왕자 진효명의 밝게 웃던 모습이 흐릿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오전 3시, 대월국 호문번 환강산성 일대
4군단 무사들과 거록 두억시니들이 성을 빠져나오고 얼마 후,
성안 여기저기에 불이 밝혀지고, 도깨비들의 다급하고도 요란한 목소리들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제야 내성에서 국왕과 왕자들, 그 안에 머물고 있던 국왕의 측근들이 모두 살해된 것을 안 모양이었다.
4군단 무사들을 지휘하는 무관은 두억시니를 데리고 애초에 대기했었던 숲속으로 들어갔다.
“자, 이제 갑주와 무기를 벗어서 반납하라.”
무관의 말에 두억시니들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잠깐, 황금이 먼저다! 약속한 황금을 먼저 내놔라!”
“맞다! 황금을 어서 보여줘! 그리고 주는 김에 갑주와 무기도 그냥 우리에게 다오! 거록까지 가려면 어차피 대월국 땅을 통과해야 하는데, 도깨비들을 상대하면서 가려면 이 정도 무장은 필요하다!”
그들은 내성에서 죽인 도깨비들의 피들이 찐득하게 묻어 있는 무기를 허공에 붕붕 휘두르며 당장 무력시위라도 하려는 모습이었다.
무관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달랬다.
“그래, 알았다. 그럼 황금과 갑주와 무기, 모두 다 주도록 하지.”
“좋았어! 율도 놈들, 아, 아니 율도 분들 역시 시원시원하구만!”
두억시니들은 그의 말에 금방 기분이 풀어진 듯 촐싹맞게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자, 그럼 한 사람씩 한 사람씩 황금을 나눠줄테니까 한 줄로 서라. 차례대로 나눠 주겠다.”
그러자 두억시니들이 그의 앞으로 앞 다투어 달려왔다.
“내가 먼저 왔어! 내가 먼저 받을 거야!”
“이 새끼가 어디서 새치기야?! 야! 줄 똑바로 안 서? 황금 받기도 전에 뒈지고 싶어?!”
“이 멍청한 놈들아! 성 위에 도깨비들이 다 듣겠다. 아가리 닫고 줄이나 서라고! 얼른 황금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두억시니들은 서로 옥신각신하며 간신히 무관 앞으로 일렬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미처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그들 맞은편에 서 있던 4군단 무사들도 그들을 바라보고 1열로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아까 이곳에 남아 기다리던 총을 가진 무사들이었다.
그들 뿐 아니라, 다른 무사들도 모두 휴대하고 있던 활시위에 화살을 재어 들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들이 사용하는 화살은 아까 사용하던 천제국의 화살이 아닌,
대월국 국왕파 군사들이 사용하던 화살을 들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두 눈을 번쩍번쩍 거리게 해주지.”
“크크크, 그래 그래. 어서 빨리 황금을 보여줘~!”
“알았다. 참, 그러기 전에 다들, 잠시 저 쪽을 한 번 봐주겠나?”
무관의 손짓에 따라 두억시니들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탕! 타당! 타다당! 탕! 탕!
번쩍 번쩍 거리는 총구의 화염과 함께,
두억시니들을 향한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날카로운 원추형 탄환들이 두억시니들의 목과 얼굴을 관통해 버리고,
그들의 커다란 몸뚱이가 땅바닥에 콰당, 널브러졌다.
무사들은 총과 활을 내려놓은 채 군도를 뽑아들고 시신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호흡이 있는 자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확실히 절명했습니다.”
무관은 쓰러진 두억시니들을 발로 한 번씩 툭툭 쳐 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구덩이는 준비되었겠지?”
“네, 물론입니다.”
“그럼 이것들을 모두 묻고 흔적을 없애라. 아, 그리고.”
무관은 맨 끝에 쓰러져 있는 두억시니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그 시신은 다른 것들과 달리 총상이 없었다.
대신, 대월국의 화살이 눈과 목, 얼굴 여기저기에 박혀 있었다.
애초부터 한 놈은 이렇게 처치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따가 이놈은 적당히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겨 두고 간다. 대월국 도깨비들이 찾을 수 있는 곳에다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무관의 지시에 따라 4군단 무사들은 일제히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리 파놓은 구덩이 안에 두억시니 시체들을 모두 던져 놓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떼를 입혀 감쪽같이 위장을 하고,
대월국 화살에 맞아 죽은 두억시니 시체도 숲속 깊숙한 곳에서 좀 더 바깥쪽으로 옮겨다 놓았다.
이 모든 것들이 끝날 때 쯤, 저 멀리 환강산성에서 한 떼의 횃불들이 성문 밖으로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대월국 도깨비들이 총소리를 듣고 성 밖으로 나온 모양입니다.”
무사들의 보고에 무관이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
“주변에 흔적들 남긴 건 없겠지?”
“네, 전투식량 먹은 것부터 용변 본 것까지, 모두 잘 처리해 놓았습니다.”
“좋아, 다들 놓고 가는 장비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바로 이곳을 뜬다.”
무사들은 자신이 가져온 짐과 무기를 챙겨들고 장비 점검을 실시했다.
모두 이상 없음이 확인되자 무관이 이동명령을 내렸다.
“이번 작전 동안 모두들 고생 많았다. 이제 흥원으로 가서 원정군과 합류하도록 한다. 그곳에 율도식 병영이 지어졌다고 하니 오랜만에 목욕도 하고 푹 쉬다가 고향으로 내려가자구.”
“네, 알겠습니다!”
무사들은 계획대로 작전을 완수한 것에 모두 만족했는지, 미소를 짓는 얼굴로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 횃불을 든 대월국 국왕파 군사들이 숲속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화살에 맞아 죽은, 천제국군의 갑주를 입은 두억시니 시체가 있는 곳을 향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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