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대동력 9,994년 5월 36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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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주나라 새한성 황궁
주나라의 수도 새한성의 황궁은 여러모로 현실 세계 옛 조선 왕궁과 닮아 있었다.
물론 그보다 훨씬 넓고 웅장하긴 했지만 황궁에서 가장 큰 태화전 뒤로 황제와 황후의 침소 등 각종 전각들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는 모습하며 웬만한 저수지보다 더 큰 거대한 연못 위에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정자들까지 지어 놓은 모습은 영락없이 그것들을 연상케 했다.
황제 황치우는 대동으로 넘어오기 전 그가 젊었을 무렵 과거 시험을 치르기 위해 당시 한양에 가 본 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당시 조선시대의 추악한 부조리로 인해 과거 시험에서 낙방했지만, 난생 처음 본 한양 궁궐들의 엄청난 위용은 이 곳 대동을 넘어오면서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황제가 대소신료들과 더불어 정사를 논의하고 각종 조례와 행사를 갖는 곳이 태화전이라면, 그 뒤로 황제가 조용히 정무를 보는 문화전이라는 전각이 있었다.
이미 주강 (황제의 아침 공부) 끝난 시간,
원래대로라면 조수라(아침 식사)를 받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겠지만 오늘 황제는 문화전에서 삼정승과 더불어 앉아 국사를 논하고 있었다.
주나라 황궁의 조직은 조선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었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 정승이 있는 의정부와 이조, 호조, 병조, 공조, 예조, 형조의 6조,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3사 등,
조선의 정치 시스템은 물론 그 호칭까지 그대로 가지고 온 모습이다.
조선 시대를 살다 온 이가 만든 나라이다 보니 이 곳 대동에서도 그가 알고 기억하는 것들을 똑같이 구현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진왕께서 보내온 서신에 의하면 본토에서 보낸 관군 5만이 모두 진에 무사히 도착하였고, 곧 그곳 군사들과 세를 합쳐 함께 난을 진압해 나갈 것이라 합니다. 하옵고...”
좌의정의 보고를 듣는 황치우의 표정은 그저 딱딱하기만 했다.
“...많은 공물론자들이 일반 백성들 사이에 숨어들어가 있기에 그 색출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 합니다. 하지만 관군들이 백성들의 이동을 통제하고 지역을 고립시킨 상태에서 쥐 잡듯이 수색을 펼치고 있으며, 공물론자들은 물론 그들을 도운 이들 모두 잡아들이고 있으니 난이 평정되는 것은 시간 문제...”
황치우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손을 가로 저었다.
“알았으니 그 일은 진왕에게 잘 처리하라 이르라.”
“받들어 전하겠나이다, 폐하.”
좌의정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보고를 올릴 국서들을 정리하는 동안,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우의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호조에서의 보고이옵니다. 율도에 나가 있는 우리 상단 중에서 어제 의헌친왕 (정국의 작위명)과 접촉한 이가 있었다 하옵니다.”
정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황치우가 자리를 고쳐 앉으며 우의정을 바라보았다.
“계속 고하라.”
“예, 페하. 보고에 의하면...”
우의정은 율도에 있는 이화수의 상단에 정국이 한 소녀를 대동해 나타났으며 이화수가 율도 관아에 알려 그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사내들이 상단으로 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놓치게 된 과정에 대해 소상히 아뢰었다.
“황자와 대동하고 있는 소녀라면, 역시 강운예의 여식인가?”
“그럴 것이라 사려되나이다.”
“...강운예도 지금 적잖이 속 끓이고 있겠군.”
황제는 같은 마루한이자 타국의 지도자를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럴 것이옵니다. 게다가 대월국으로 친정에 나선 중이니 엎친 데 덮친 격이...”
우의정이 황제의 말을 받으려다가 말을 멈추었다.
엎친 데 덮친 격, 이란 말은 지금 주나라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니 말이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숙고를 거듭하던 황치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강용영 무사들 중 정예를 뽑아 율도로 보내 황자를 데려오라. 만일 강운예의 여식도 확보하게 된다면 함께 데려오라 이르라.”
“하, 하오나, 폐하...!”
좌의정이 정리하던 문서들을 손에서 떨어뜨리며 다급히 말했다.
“지금 우리가 천제와 손잡고 거록의 땅에 북방 교역로를 개척하고 있다는 사실을 율도가 이미 눈치 챘을 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율도에 우리 군사를 들여보내고 거기에 태상국의 영애까지 납치하신다면... 반드시 양국 간 후환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에 우의정이 결연한 표정으로 대신 답하였다.
“이미 천제국과 연합하기로 한 이상 율도와의 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국본인 의헌친왕께서 율도에 인질로 잡히는 사태가 벌어지기 전 서둘러 본국으로 모시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거기에 율도의 영애까지 우리가 모셔와 보호하게 된다면... 향후 율도와의 외교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좌의정은 답답하다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우상께서는 율도 태상국의 심성을 아직도 간파하지 못하셨단 말이오? 지난 해 그의 영애가 대동에 새로 나타난 마루한과 함께 대월국 성산번주에게 납치당했을 때 수 만 병력으로 북으로 진군했던 그였소! 그런데 영애가 다시 한 번 납치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지금 대월국으로 향하는 십여만 율도군들이 머리를 돌려 우리 주나라 국경으로 향하게 될지 모르오!”
그 때, 황치우가 조용하면서도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좌상은 우리 제국이 율도와 싸우면 패할 것이라 보는가?”
좌의정은 다급히 황제를 향해 엎드리며 말했다.
“그렇지는 않으오나... 전쟁으로 인하여 제국의 강토가 피폐해지고 백성들의 삶이 무너지는 일이 생길까 다만 그것이 불안할 뿐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제의 눈동자는 좌의정 옆에 말없이 좌정해 있는 영의정에게로 향했다.
“영상의 생각은 어떠한가? 좌상의 생각과 같은가?”
영의정은 황제의 물음에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북방 교역로 개척은 앞으로 천년 동안의 대동 패권을 결정하는 국가적 대사가 될 것이옵니다. 그 과정에서 언젠가 율도와의 분쟁은 피할 수 없을 터, 이런 때에 우리가 태상국의 영애를 보호하게 된다면 앞으로 외교적 실리를 노릴 수도 있겠으나... 이는 엄연히 주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기에 감히 옳은 일이라 간언드릴 수 없겠나이다.”
황치우의 눈썹이 무섭게 흔들렸다.
“상대국이 주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나도 응당 주자의 예로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율도가, 그리고 강운예가 과연 주자의 예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자유민주주의? 감히 그와 같은 주자의 말씀에 역행하는 사상을 가진 이들을 우리가 주자의 예로 대할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계속해서 강운예를 태상국이란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며 마치 아랫사람 대하듯 부르고 있었다.
2백여 년 전, 황치우는 내란으로 혼란스러웠던 대동 서부에서 강운예와 처음 만났다.
당시 강운예는 황금사자단이란 용병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황치우는 그들을 고용해 내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강운예와 황금사자단의 용력은 대단했다. 그들은 단 시간 내에 반란을 일으킨 제후국들을 차례차례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그의 명성은 대동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황치우는 이 마루한과 그의 용병단이 점점 두려워졌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던 반란을 저리도 쉽게 제압해 버리는 그가,
그러면서 자신에게로 향해야 할 백성들의 존경과 지지마저 모두 가져가 버리는 듯한 그가,
언젠가는 자신의 자리마저 위협하게 되지는 않을까 불안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 쯤,
강운예는 마치 그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는 듯, 약속한 돈을 모두 받고 여기서 계약을 종료하자고 먼저 제의했다.
전쟁으로 용병단의 전력이 많이 감소했기에 대동 남쪽으로 내려가 전력을 보충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그 후 강운예는 대동 남부에 잠시 정착하는 듯 하다가, 당시 천제국의 침공으로 멸망 직전에 몰려 있던 주신을 돕기 위해 동쪽으로 떠났다.
그리고 십 수 년 후,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당시 대동의 최강국이라 할 수 있던 천제국이 이구전투에서 주신에게 대패를 당했고, 천제 정선교 마저 붙들리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전투를 지휘한 자가,
한 때 자신의 밑에서 내란 토벌을 도왔던 일개 용병대장 강운예였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황치우는 수백 년 만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천제국이 주신에 크게 패하고 천제 정선교를 송환받는 조건으로 막대한 전쟁 보상금은 물론 광활한 영토까지 떼어주며 국력을 소진하고 있는 동안,
황치우는 자신의 제국이 대동의 패권을 차지할 기회는 오직 지금 뿐이라 여기고 초원길 장악을 위해 동진을 준비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또 한 번의 내란으로 주나라의 동진 계획은 또다시 미루어지기 되는데,
그 십여 년의 시간동안 주신에서 돌아온 강운예가 백화를 본거지 삼아 초원길과 대동 남부 지역 전체를 석권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제 천제국의 시대는 끝나고 주나라가 대동의 패권국이 될 것이라 그토록 자신했건만,
항상 햇병아리라고 여겼던 젊은 마루한에게 이 모든 꿈이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황치우는 공식석상이 아닌 곳에서는 늘 강운예를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며 경시하는 모습을 보여 왔었고,
지난 계몽 전쟁 때에도 강운예의 맹활약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전까지는 천제국과 수호 동맹의 편에 서서 율도를 공격하는 등 적대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계몽 전쟁 이후 율도가 명실상부 대동의 패권국이 된 이후부터 화친을 제의하고 동맹을 맺는 등 관계 개선을 하려는 모습도 보이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외교적 처사였을 뿐,
황치우 입장에서 강운예란 존재는 그저 옛날 옛적 자신의 밑에서 싸우던 용병대장, 그 이상도 이하로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율도로 유학 보낸 황자 정국이 강운예의 큰 영애와 교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에도 기뻐하기는커녕 고작 그 정도 놈의 딸과...? 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을 정도였다.
“이미 천제의 말대로 무수막의 파림이 율도의 남쪽 국경지대를 괴롭히고 있고, 천제가 이끄는 친정군도 대월국으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제 아무리 강운예라도 감히 군대를 돌려 우리 주나라로 쳐들어올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영의정의 옆에서 납작 엎드려 있던 좌의정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오나 폐하, 태상국이 직접 이끌고 떠난 친위군단과 남쪽에서 파림을 막고 있는 군사들은 율도가 가지고 있는 병력의 1/4도 안 되는 병력입니다. 지금 동쪽 변방 우리 제후국들과 율도의 국경지대에 배치되어 있는 저들의 군세는 우리의 모든 군사력을 합친 것만큼이나 많습니다. 만일 저들이 우리와의 전쟁을 원한다면, 저들은 대월국과 파림을 상대하는 병력을 제외하고도 10만 이상 충분한 수의 군사들을 우리의 국경으로 투입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치우는 엎드려 있는 좌의정에게서 고개를 돌린 후,
맞은편의 우의정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상의 말대로 북방 교역로 개척은 천년의 대동패권이 걸린 국가전 대사이다. 천제가 약속한 대로 율도의 군사력은 그들이 잘 붙잡아 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거록 땅에 도로 연결 공사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아울러,”
황제의 목소리가 한 층 낮아졌다.
우의정도 그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명을 기다렸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강용영의 정예를 뽑아 율도로 향하게 하라. 황자가 율도군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함은 물론... 강운예의 여식이 황자와 함께 있다면 그녀 역시 함께 데려 올수 있어야 한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우의정은 황제에게 절을 하며 허리를 숙였고,
영의정과 좌의정은 그저 황망한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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