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대동력 9,994년 5월 36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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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0시, 율도 청남도 일대 원정군 대원수 지휘부 임시 숙영지
강운예는 원정군이 율도 자국 내에서 행군하는 동안만큼은 각 행군 도착지 마다 임시 숙영지를 미리 편성해 놓고 원정군이 도착하면 바로 씻고 식사하고 수면을 취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끝마쳐 놓고 있었다.
이동하는 군사가 수만에 이르기 때문에 한 곳에 몰아넣고 숙영하기는 힘들었다.
따라서 여러 곳에 병력을 분산시켜 숙영지를 편성해야 했는데, 보통 관공서나 그 지역 군부대 건물을 숙영지로 원정군에게 내어주거나, 지역의 공터에 천막을 쳐주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덕분에 원정군들은 행군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천막 치고 숙영지를 편성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게 되었다.
식사 역시 중단 없는 행군을 위해 이동 중에 말 위에서 전투 식량 등으로 간단하게 해결하지만, 숙영지에 도착해서는 미리 준비된 따뜻한 음식을 든든히 먹여 체력을 회복시키는 데 집중했다.
심지어 군사들의 숙면을 위해 불침번 및 숙영지 야간 경계 근무 역시 이번 원정에 참여하지 않는 동원 병력들, 즉, 해당 지역 예비군들을 투입해 근무를 시키고, 원정군들은 밤새 푹 잘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강운예는 적영단 및 대원수부 참모진, 각 부대 지휘관들과 함께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임시 숙영지들을 둘러보고 군사들이 휴식하는데 불편함이 없는지 직접 확인한 후, 대원수 지휘부 임시 숙영지가 있는 청남도의 공관 건물로 돌아왔다.
오늘 밤 그의 숙소인 공관의 안채 건물로 들어왔을 때, 방 안에는 그의 소실 한유리가 속살이 살짝 비치는 하얀색 속창의만을 입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올 때만을 기다리며 준비했는지, 탁자 위에는 음식들과 술병이 놓여 있었다.
“따뜻하게 데운 청주에 찌개와 쌀밥, 모듬전을 드시는 좋아하시지요. 그래서 마련해 보았습니다.”
한유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강운예를 향해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투구를 벗고 그녀가 차린 상을 내려다보던 강운예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도 갑주의 매듭을 푸는 법을 기억하는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이리 와서 나를 도와주겠나?”
한유리가 밝게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강운예가 입고 있는 검은색 유성금 갑주의 매듭들을 능숙한 손놀림으로 풀어냈다.
“내일 다시 갑주를 입으실 때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부탁하겠다.”
한유리는 그의 갑주를 받아 갑주 보관대에 능숙하게 정리 해 놓았다.
“다인께서 제게 처음으로 가르쳐 주셨던 일이 바로 이 갑주를 정리하는 일이었지요. 무기 만지는 일은 무서웠지만, 같은 쇠붙이 인데도 다인의 갑주를 만지고 정리하는 건 항상 즐거웠어요. 갑주에서 나는 당신의 향기를 맡을 수도 있었고, 때로는 갑주에서는 당신의 체온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이제 강운예는 갑주 안에 입고 있던 전포도 벗으려 하고 있었다.
한유리가 다가와 그의 전포를 받아 옷걸이에 정리해 걸어 놓고는, 그의 속창의를 가져다가 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몇 년 만에 당신을 안습니다. 잠시만 이렇게 있게 해 주세요.”
강운예는 말없이 자신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깍지를 끼고 있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예전에 전쟁터를 따라다닐 때, 매일 무섭다고 울지 않았던가? 적도 아니고 아군 무사들만 봐도 무섭다고 오들오들 떨면서 눈물 흘렸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그런데 지금 또 날 따라 전쟁터로 가게 되었는데, 지금이라고 괜찮겠나?”
“당신 없이 홀로 지내는 것보다는, 무섭고 두려워도 전쟁터에서라도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더 나아요.”
강운예가 몸을 돌려 한유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혼기가 찬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젊었을 적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음식은, 자네가 하였는가?”
“네, 최대한 예전에 전쟁터에서 다인께 만들어드렸던 것과 같은 맛을 내려고 노력해 보았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한유리가 그의 손을 잡고 탁자의 자리로 이끌었다.
그는 한유리가 건네는 따뜻한 청주를 한 잔 받아든 후, 그녀가 끓였다는 찌개를 수저로 떠 한입 맛을 보았다.
“......예전 맛 그대로군.”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수저로 몇 번 더 찌개를 떠먹고는 술잔의 청주를 쭉 들이켰다.
“다인께서 처음에 이 산초찌개(고추장찌개)를 끓여보라 하셨을 때는 정말 난감했었지요.”
“그랬겠지. 이 대동에는 없는 요리였으니까.”
“처음에는 왜 이렇게 매운 국물을 좋아하시는 걸까 이해가 안 되기도 했지만, 다인께서 맛있게 드시는 것을 보고 따라 먹다가 저 역시 매운 맛을 좋아하게 되었지요.”
한유리가 강운예의 술잔에 청주를 따른 후, 자신의 술잔도 함께 채우며 말했다.
“그 이후로는 다인께서 좋아하는 것은 저도 모두 좋아하게 되었지요. 이 청주도, 이 모듬전도. 특히 저는 어려서부터 굴은 잘 안 먹었는데, 다인께서 굴전을 맛있게 드시는 걸 보고 저도 굴전을 즐겨 먹게 되었지요.”
한유리가 두 손으로 잔을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강운예도 그의 잔을 들어 그녀의 잔을 가볍게 부딪혀 주었다.
“예전에 이렇게 하는 걸, 다인께서 오신 세상에서는 건배, 라고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술 마시며 지나가는 소리로 했던 이야기 같은데, 그걸 모두 기억하고 있군,”
“당신이 하는 말씀은 모두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작은 것 까지 모두 다.”
한유리는 강운예를 따라 술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가 술잔을 비운 것을 보고는 젓가락으로 굴전을 집어 그의 입에 먹여 주고는 그의 빈 술잔에 청주를 따라 주었다.
“전쟁터에 나가면서,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당신을 모시겠습니다. 당신께서 아무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옛날의 그 때처럼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그 때의 저를 보셨던 것처럼 저를 돌아봐 주시고, 그 때의 저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제게 말씀해 주시는 거, 단지 그것뿐입니다.”
강운예는 그녀가 따라주는 청주를 비웠다. 그리고 산초찌개 국물을 국자로 떠 앞접시에 덜은 후, 그 매운 국물을 쭈욱 들이켰다.
“내가 왜 매운 것을 좋아하는 지 말해준 적이 있었던가?”
“그에 대한 말씀은 하신 적이 없습니다.”
“매운 맛은 사실 혀가 느끼는 맛이 아니라 통각이라고, 입 안이 느끼는 일종의 고통스러운 감각 같은 거지. 그래서 매운 맛의 음식이 입에 들어가면 머리에 있는 뇌라는 놈이 지금 몸이 고통 받고 있다고, 이걸 달래줘야 한다고 마치 마약 같은 행복물질을 몸에 퍼뜨리게 돼. 그러면 그 행복물질 때문에 가슴 속 깊이 쌓여 있던 울화와 분노 같은 감정들이 일시에 해소되고 기분까지 좋아지게 되지. 그래서 매운 음식을 먹게 되면 화가 풀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 거다.”
한유리가 강운예의 잔에 다시 청주를 따라주며 물었다.
“그럼 화를 푸시기 위해 일부러 매운 음식을 자주 드셨던 건가요?”
강운예가 한유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가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마루한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야. 나는 물론 대동에 있는 모든 마루한들 다 말이지. 내 마음과 내 감정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자가 어찌 전지전능할 수 있단 말인가? 너에 대한 내 감정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야.”
그 말에, 한유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직도 네 얼굴을 보면 그 때의 일 때문에 내 마음에서 화가 솟구쳐 오른다. 하지만 널 용서하겠다 맹세했으니 이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나? 이 산초찌개처럼 매운 것이라도 잔뜩 입안에 집어넣고 내 스스로 화를 다스리려 노력해야지. 마루한도 결국 너희들과 다를 바 없이 제 감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평범한 존재란 말이다.”
한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강운예의 손을 꼭 잡고만 있었다.
한참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운예가 자신이 직접 자신의 술잔에 청주를 따랐다.
그리고 그녀의 술잔에도 술을 채워주며 말했다.
“당분간, 내가 별다른 말을 하기 전까지는 매일 밤 이렇게 산초찌개를 준비해주게. 가는 곳에 따라 모듬전 재료는 구하기 어려울 수 있을 터이니 이건 굳이 준비 안 해도 되고, 찌개랑 밥, 술과 너만 있으면 될 거 같네. 그렇게 해주겠나?”
한유리가 기뻐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오전 4시, 대월국 서래번 달성벌 북동쪽 작은 시골 마을
말고기를 배불리 먹고 밤늦게 까지 백사를 범하던 농민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 골아떨어진 모양이었다.
백사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보았다.
말에서 떨어질 때 다친 다리가 몹시 아파왔고,
다리 사이도 매우 쓰라려 일어서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손에 묶인 밧줄을 내려다보았다.
농민들이 묶어서 그런지 매듭이 그리 튼튼하지 않았다.
백사는 금세 손에 묶인 밧줄을 풀어내고, 자신이 갇혀 있던 창고 밖으로 나가 보았다.
밖에는 말을 잡아 고기로 만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뒷정리를 제대로 안했는지, 말을 잡을 때 썼던 식칼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백사는 알몸 상태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그리로 다가가 식칼을 집어 들었다.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무기부터 먼저 확보한 것이다.
그녀가 마을 입구를 찾아 절뚝이며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저 멀리에 농민 하나가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소변을 보러 나온 사람이었다. 그는 집에서 가까운 나무로 다가가 바지를 내리고 시원하게 소변을 갈기고 있었다.
백사의 눈에 낯이 익은 자였다.
아까 자신을 창고로 끌고 가 윤간했던 자들 중 한 명임에 틀림없었다.
그녀가 조용히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으응, 누, 누구...... 흑!”
소변을 보던 사람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려는 찰나,
그 고개는 옆으로 돌아가기도 전의 그의 몸에서 뚝 떨어졌다
그녀가 손에 든 식칼로 농민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잠시 죽어 나자빠진 도깨비 농민을 노려보고는, 다시 마을 입구를 찾아 절뚝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그녀의 표정에 고통스러움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계속 길을 찾아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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