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대동력 9,994년 5월 35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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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대월국 서래번 달성벌 북동쪽 일대
탕......! 탕......!
저 멀리서 간간히 총소리와 함께 도깨비의 비명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직도 율도군 기병들이 천제국 패잔병들을 추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염대철과 귀족들은 그 소리를 듣고 점심 챙겨 먹으며 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동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율도놈들, 지옥까지 쫓아올 생각인건가?”
“율도놈들이 무서운 건 전투를 잘 해서만이 아니라, 전투 후 잔적들을 싸그리 섬멸해버려서 후일 다시 자신들에게 대항할 여력을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라 들었소. 놈들, 소문대로 우리를 단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잡아 죽일 작정인 모양이오!”
“율도놈들은 우리 천제국이나 다른 나라들처럼 포로를 잡아 노예로 부리거나 금품을 받고 교환하거나 하지 않소?”
“놈들에게 노예제가 없다오. 강운예가 모든 대동인들이 평등하다며 계급과 지위는 물론 노예제까지 모두 폐지해 버렸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포로를 잡아 돈을 받고 풀어주는 일도 거의 없다 들었소. 저들은 적의 수급을 하나라도 더 베어 자신의 전공을 올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오.”
귀족들은 언제 율도군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방을 경계하며 길을 가고 있었다.
아침에처럼 한가롭게 말 안장 위에 짐짝처럼 실어 놓은 백사의 알몸을 더듬으며 쾌락을 느낄 여유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렇게 그들이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앞장서서 걷고 있던 중년의 도깨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모두 조용......!”
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모양이었다.
도깨비 귀족들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구부러진 외날도를 꺼내 들었다.
그들이 칼을 들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을 때였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모두 죽여라!”
갑자기 좌우에 숲에서 도깨비 수십여 명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제대로 된 갑주를 걸치고 있지 않았다.
그들 중 장자검을 들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죽창이나 몽둥이를 들고 있었고, 제대로 된 무기를 가진 이는 별로 없어보였다.
“이 놈들, 패잔병 사냥꾼들이냐?”
염대철이 농민 복장을 하고 자신들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는 도깨비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들은 이 주변에 사는 농민들이었다.
예로부터 대월국은 각 번끼리의 크고 작은 전투가 자주 일어나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 주변의 농민들은 전투가 끝난 후 패잔병 사냥에 나서곤 했다.
패잔병이 가지고 있는 재물들은 물론 갑주와 무기들을 내다 팔아 돈을 벌거나, 상대편에게 그들의 시신이나 수급을 내어주고 돈을 받기 위함이었다.
이번에도 이곳 서래번에 사는 이들 모두, 달성벌에서 펼쳐진 율도군과 천제국 기병들과의 전투에서 천제국군이 완전히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후였다.
그들은 당연히 이번에도 ‘부수입’을 올리기 위해 집안 깊숙한 곳에 숨겨 놓았던 무기를 찾아 꺼내 들고 패잔병 사냥에 나섰던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 색으로 칠해진 데다가 다른 이들보다 화려한 갑주를 입고 있는 귀족들은 당연히 이들의 눈에 잘 띌 수밖에 없었다.
비록 갑주로 몸을 보호하고 무장도 농민들보다 잘 되어있다고는 하나, 지칠 대로 지친 여섯 명의 귀족들이 한꺼번에 수십여 명을 상대하기는 버거운 일이었다.
“죽여!”
귀족들을 둥글게 포위한 농민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농민들은 일부러 갑주를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팔과 다리 등 비어있는 곳을 집중 공격했다.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무장을 벗겨서 팔 생각이었기에, 흠집이라도 생기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이 천한 것들이 건방지게!”
염대철과 귀족들은 자신의 몸을 향해 찔러 들러오는 죽창을 손으로 붙들고 외날도로 내리쳐 베어 버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농민들을 베어내며 길을 열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앞뒤좌우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모두 피하고 막을 재간이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귀족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농민들이 열 명 쯤 죽어 넘어졌을 때, 귀족들 역시 염대철과 중년 도깨비를 제외한 모두 목숨을 잃은 후였다.
죽음의 공포가 그들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악~!”
염대철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숲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체면이고 뭐고, 나중 일은 생각도 안 하고 살기 위해 도망을 치는 것이다.
농민 몇 명이 그를 쫓아 숲으로 달려갔다.
그동안 중년 도깨비는 십여 명의 농민들을 맞아 분전하다가 결국 죽창에 찔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
농민들은 도망간 염대철을 뺀 나머지 천제국 귀족들이 모두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그들의 시신에서 갑주를 벗기고 무기를 주어들기 시작했다.
“서둘러라. 싸우는 소리를 듣고 이들을 추격하던 율도군들이 이리로 들이닥칠지 몰라. 그 놈들이 자기들 전리품 챙길려고 이 모든 것 다 놓고 가라고 할 수 도 있으니까, 다들 서두르라고!”
농민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천제국 귀족들의 말고삐를 잡아끌고 왔다.
“이 말도 끌고 가야지? 말들은 어떻게 할 거야?”
“전쟁 때문에 동네 사람 모두 굶주려 있으니까 일단 한 마리는 다 같이 잡아먹고, 나머지 말들은 팔아서 돈으로 나눠가져야지. 혹시 돈 잘 쳐주는 곳이 없으면 남은 말들도 잡아먹으면 되는 것이고.”
“천제국으로 넘어간 타깨비놈들, 그래도 전쟁 중에 가지고 다니는 식량 같은 게 있지 않을까?”
“거기 말안장 같은 데 뒤져봐. 보통 그런데에 식량 달고 다니니까.”
농민 중 한 명이 말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안장 위에 덮여 있는 담요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치웠을 때,
“아니, 이게 뭐야?”
도깨비 농민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 안에 벌거벗고 있는 여자 도깨비, 백사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오후 3시, 율도 황남도 상동시
이화수의 상단에서 도망쳐 나온 예린과 정국은 어느 식당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다.
“후우...... 여기까지는 쫓아오지 못하겠지?”
“설마, 여기 시내 다 뒤질 거 아니라면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겠어?”
“그런데, 예린아?”
“응?”
“아무리 식당에 들어와 숨으려고 한 거지만, 음식을 이렇게 많이 시키면 어떻게? 우리 가진 돈도 없는데?”
정국의 말대로, 그들이 앉아 있는 식탁 위에는 율도의 여러 고기 요리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헤헤, 아까 상단에서 준비해 준 음식도 제대로 다 먹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뛰고 달리고 그래서 배가 다시 꺼졌지 뭐야? 배고파서 어쩔 수 없었다구.”
“그래도 이화수한테 아직 돈을 빌리지도 못했는데, 이 음식 값은 어쩌려고?”
그 때, 그녀가 품안에서 무언가 꺼내놓으며 말했다.
“이거면 음식 값은 물론 며칠 식비는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어, 이건?”
예린의 손에 든 것은 무척 값이 나가 보이는 도자기로 된 연적이었다.
“이거 아까 이화수 상단 응접실에 있던 거 아냐?”
“응, 창문으로 도망치기 전에 내가 슬쩍 했지. 헤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말이야.”
“아니 그래도, 이러면 내가 나중에 이화수 그 사람 얼굴 보기 민망해질 수밖에 없는데......”
“무슨 상관이야? 단주 그 사람은 이 연적을 우리가 아니라 우리 쫓아온 그 놈들이 가져갔다고 생각할거야.”
예린이 연적을 다시 품안에 집어넣고 젓가락을 들어 음식들을 맛있게 먹으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를 쫓아온 놈들, 주나라에서 온 놈들이라고 했지? 그런데 널 모셔가려 온 자들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 보이던데, 뭐 짐작 가는 데라도 있어?”
“그자들이 우리를 청북도에 있는 어떤 집으로 끌고 갔을 때, 그 때 그 자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이 인민이니 혁명이니 하는 말을 했었어. 그런 말들은 북쪽 바다 건너 진나라에서 유행하고 있는 공물론이란 사상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라고 알고 있는데 말야, 나도 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게 없어.”
“공물론?”
“대동천지는 애초부터 공물이다, 즉, 주인이 따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이 대동의 모든 부조리한 상황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마루한이나 왕, 대동 각지를 다스리고 있는 법과 질서들을 모두 사라지게 해야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걸 주장하는 사상이야.”
“듣기만 해도 반역의 기운이 절로 느껴지는데? 그래서 널 잡아가려고 그렇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거야?”
“아마도. 내가 귀국길에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때부터 나를 쫓아왔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를 잡아 아마 황제 폐하에게 무언가 요구 하려고 했던 거 같고.”
“그런데 그 와중에...... 그 놈들이 왜 날 건드렸던 거야?!”
예린은 아직도 그 때의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주먹으로 식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소리에 놀란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우! 나 방금 아빠랑 똑같은 행동 한 거 같은데?”
예린도 방금 자신이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친 것 때문에 깜짝 놀란 눈치였다.
고개를 숙여 식탁 아래를 보니, 주먹으로 내리친 자리가 벌써 쩍, 갈라져서 쪼개질랑 말랑 하고 있었다.
“헤헤, 정국아? 음식 들어.”
“응?”
“이거 식탁 부서질 것 같아. 식당 주인이 눈치 채기 전에, 얼른 음식 들고 옆에 식탁으로 옮겨 가자고.”
두 사람은 재빨리 음식들을 가지고 옆에 식탁으로 옮겨 앉았다.
“아무튼 여기서 천천히 음식 먹으면서 숨어 있다가, 해질 때쯤 되면 나가자.”
“그러면 그 연적 줘봐. 내가 가서 그거 돈으로 바꿀 데 있는지 찾아보고 올 테니까.”
“그럴래? 그래도 지금 움직이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여기서 계속 죽치고 앉아 있기도 좀 그럴 것 같고, 저기 저 식탁도 금방 쪼개질 것 같고...... 일단 내가 빨리 이거 돈으로 바꿔와 볼게.”
정국은 예린에게 연적을 받아들고 식당 밖으로 나섰다.
정국이 상동시 시내에서 연적을 돈으로 바꿀 만한 상점을 찾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거기, 총에 맞기 싫으면 그 자리에 가만있어!”
누군가 그의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정국이 급히 싸울 준비를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전에 청북도에서 본 적 있는 공물론자 일당 두 명이 총구를 그를 향해 겨누고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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