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대동력 9,994년 5월 35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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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율도 청북도 일대
진채연과 최용준, 사승범 등 일행은 청북도의 어느 작은 마을에 있는 부잣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길가의 사람들은 말을 타고 무장한 무사 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도 지금 대월국과의 전쟁으로 많은 군사들이 그리로 몰려가고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진채연 일행이 전장으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던지, 측은한 눈빛으로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다.
승범이 말 위에서 용준에게 물었다.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라고?”
“이 마을에 사는 최부자 라는 사람의 집. 간밤에 그 사람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재물을 훔쳐간 것도 아니고, 빨랫줄에 걸린 옷과 신발, 누룽지만 훔쳐 달아났데.”
“빨래하고 누룽지? 그냥 좀도둑이 들은 것 같은데 괜한 발길 하는 거 아니야?”
승범은 헛다리 짚은 거 아니냐는 등, 입술을 뾰족 내밀고 있었다.
“며칠 간 예린과 황자의 종적이 뚝 끊겼소. 거기서라도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오.”
앞서 말을 몰고 있던 진채연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승범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내 말대로 누리마루 쪽으로 가봅시다. 그곳은 두 사람이 전에 가출했을 때에 간 적이 있는 곳이지 않소? 원래 가출한 애들은 생판 모르는 곳으로 찾아가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곳으로 가는 경우가 더 많단 말이오.”
용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그걸 네가 어떻게 잘 알어? 너 어렸을 때 가출 좀 해 본거 아냐?”
“확, 그냥! 내가 가출은 무슨?! 국무관 들어가고 군에 들어오기 전까지 내가 집 학당, 집 경당, 집 경무관 만 오고가면서 모범적으로 커온 사람이야, 내가! 이거 왜 이래?”
“집 학당, 집 경당, 집 경무관 은 무슨~! 집 학당 놀이터 집, 집 경당 패싸움 관아 집, 집 경무관 술집 패싸움 관아 다시 집. 이 순서가 맞지 않아?”
둘은 또 말 위에서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예린과 황자가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누리마루로 넘어가지는 못할 것이오. 태상국 기하께서 이미 모든 국경 초소에 출입을 엄히 단속하라 명 하셨고 아이들의 초상화도 보내 찾고 있으니, 누리마루로 넘어가려다가는 오히려 우리 군사들에게 먼저 잡히고 말 것이오.”
진채연의 말에 용준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영애나 황자가 우리 군사들을 때려눕히고 국경을 넘어 버리면 어떻게 되오? 초병에게 상해를 입히고 국경을 넘는 자는 중형을 면치 못하는 것이 이 나라의 법인데......”
승범도 말을 거들었다.
“지난번 영애가 대월국 성산번으로 붙잡혀 가기 전에도 도깨비들 여럿을 맨손으로 때려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영애가 어려서부터 평연당의 수련장에서 타격낭 때리는 거를 보면, 정말 얘는 나중에 커서 장난으로 때려도 사람 죽일지도 모르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소만. 진짜 영식(강운예의 장남, 예성)보다 영애가 힘쓰는 거 하나 만큼은 태상국 기하를 쏙 빼닮은 것 같다니까요?”
“설마하니 예린이가 우리 군사를 죽도록 패고 국경을 넘는 짓을 하겠소? ......뭐, 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진채연의 눈앞에, 이전 평연당에 예나를 초대하는 가족 모임이 있던 날 예린이 경무관 수련장에서 목검을 마구 휘둘러 타격대를 부셔 버리던 장면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녀의 마음이 심히 불안해 졌다.
진채연 일행이 최부자 집에 도착했다.
군경 여단 수사 무관들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이미 관아에서 나온 사람들이 수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하고, 증거가 될 만한 것에 금줄을 쳐놓고 갔다고 했다.
“그 증거가 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엇이오?”
수사 무관의 물음에 사람들이 부엌 가까운 곳에 쳐놓은 금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도둑이 저기 바닥에 글을 적어 놓고 갔습니다.”
일행이 금줄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바닥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져 있었다.
[말하기 힘든 급한 사정이 있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훗날 돌아와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좀도둑 주제에...... 상당히 정중한 글인데?”
이를 본 승범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이때, 뒤에 있던 어느 수사 무관이 말에 싣고 있던 가방에서 이런 저런 자료들을 뒤지다가 무언가를 꺼나 금줄이 처진 곳으로 다가왔다.
“이건 경무관에서 받아온 주나라 황자의 시험 답안지인데, 흙바닥에 쓴 거라 약간 차이는 있어도 답안지의 필체와 매우 유사합니다.”
진채연과 승범, 용준도 그에게 다가와 답안지의 필체와 바닥에 쓰여진 글을 번갈아 바라보며 대조해 보았다.
“정말...... 이정도면 같은 사람의 필체라 볼 수도 있겠군요!”
“그럼 주나라 황자가 빨랫줄에 걸린 옷이랑 신발이랑 누룽지를 훔쳐 갔다는 말......?!”
승범은 말을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뒤에 있던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들을까봐서였다.
그들은 즉시 말이 있는 대로 돌아가며 목소리를 한층 낮추어 말했다.
“옷과 신발을 훔쳐가야 할 정도라면, 지금 옷을 급히 다른 옷으로 바꾸어 입어야 하거나 옷이 아예 없는 상황일지도...... 게다가 누룽지와 음식을 훔쳤다는 건 돈도 없고 배고 많이 주린 상태라는 말인데......?”
진채연의 말에 옆에 있건 수사 무관도 고개를 끄덕였다.
“흑영단에서 받은 첩보에 따르면 주나라 황자가 귀국 중 도망쳐 나올 때 수중에 엄청난 금액의 수표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옷과 먹을 걸 훔쳐야 하는 상황이라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거나 빼앗긴 상황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럼 영애와 황자 두 사람이 지금 몹시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는 거 아닙니까?”
용준의 물음에 진채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가정을 해 봅시다. 지금 두 사람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상태요. 그래서 급히 돈을 구해야 하는데, 돈을 구하려면 어디로 가야겠소?”
“훔치거나 빌리거나...... 만약 돈을 빌린다면 은행이나 고리대금업자? 아니면 부자 사업가를 찾아 가지 않겠소?”
승범의 말에 진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돈을 구해야 되는 상황이라면, 여기가 아무리 율도라 하더라도 이 부근에서는 예린이 아는 인맥은 전혀 없을 것이오. 하지만 주나라 황자는 다르지. 율도에 들어와 있는 자신의 나라 주요 상단이나 상인들이 어디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지 쯤은 뻔히 알고 있을 테니.”
“그럼 그들이 주나라 상인들에게 돈을 구하러 갈 것이란 말이오?”
진채연이 말에 오르며 승범의 말에 답했다.
“나도 주나라 한자손 출신이지 않소. 짚이는 곳이 있으니 서둘러 가봅시다.”
일행들 모두 진채연을 따라 북쪽으로 말을 달렸다.
오전 12시, 율도 황남도 상동시
돈을 구하기 위해 고민하던 정국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주나라 상단이 어디인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청북도의 북쪽 상동시에 주나라의 제후국 남주 출신의 상인 이화수의 상단이 위치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이화수라면 이 곳 율도에서도 몇 번씩이나 만난 인연이 있는 자이지 않은가? 그라면 도움을 청하는 나를 모른 척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국은 예린과 함께 이화수의 상단을 찾아들어갔다.
옷은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지어져 있었지만 젊은이들이 입기엔 다소 어른스러운 유형인데다가 펑퍼짐하니 몸에도 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상단의 문을 열고 들어오니, 안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들이 그들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상단의 단주는 안에 있는가?”
정국이 황자의 기품과 위엄이 잔뜩 담긴 엄숙한 말투로 물었다.
직원 한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실례지만 어떻게 찾아오셨는지요? 혹 단주님과 미리 약속이 되어 있으십니까?”
“약속은 하지 않았고, 단주에게 가서 이곳 율도의 경무관에서 유학하고 있는 황자 정국이 단주의 얼굴을 보고 싶어 왔다고만 전해주게.”
지금 이 상단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주나라 사람들이었다. 황자라는 말에 그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엎드려 예를 표했다.
“황자님을 몰라 뵈어 송구하옵니다. 바로 단주님께 모시겠습니다.”
직원은 그에게 연신 허리를 조아리며 그를 상단 내부로 안내했다.
예린이 정국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야~ 너 이렇게 보니까 진짜 대단한 사람인 거 같아~!”
“황자니까, 대단한 사람인 거 맞지, 아니.”
정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단한 사람이었던 거지. 이제는 앞으로 아니게 되겠지만.”
두 사람은 곧바로 이화수의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사무를 보고 있던 이화수는 자신의 상단에 찾아온 황자 정국을 보고 놀라 버선발로 뛰어 나왔다.
“아니, 황자님! 어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왕림하셨습니까?!”
“잘 지내었는가? 내 이 근방을 지나다 자네의 소식이 궁금해 이렇게 염치 불문하고 찾아오게 되었네.”
“황자님이 이곳까지 절 찾아오시다니......! 자, 어서 이리로 드시지요~!”
이화수는 만면에 미소를 띄며 그를 사무실 옆에 있는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에서 황자의 이야기를 들은 이화수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말씀하신 액수를 빌려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오나, 황자님께서 이를 어디에 쓰시려는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실런지요?”
“황실 몰래 하는 일이라 자네에게도 말해주기 어렵겠군. 하지만 이 일이 모두 끝나면, 다른 이는 몰라도 자네에게 만큼은 반드시 사실대로 말해 줌세. 내 약조하지.”
“네,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과를 내어올 테니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시겠습니까? 제가 수표를 끊어 오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이 은혜 반드시 잊지 않겠네.”
이화수는 황자에게 허리 숙여 공손히 인사하고 응접실을 나왔다.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곧장 직원을 호출했다.
“율도 관아와 주나라 대사관으로 각각 사람들을 보내서, 이곳에 황자님과 율도 영애가 와 있다고, 어서 사람들을 보내 모셔가라고 전하거라. 두 분이 알지 못하도록 은밀히, 두 분이 도망가기 전에 서둘러서 신속히 처리하거라!”
이화수는 상인이었다. 상인들의 정보통에 정국이 귀국 중에 도망치고 예린도 군단 실습 도중 도망갔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이미 파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정국과 예린의 사이는 율도와 주나라 사람들 모두 알만큼 다 아는 사이이고.
‘그렇다면 황자가 내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이유는 안 봐도 뻔 한 거지.’
이화수는 이들을 도와주는 것보다, 이들을 각자의 나라에 돌려보내는 것이 자신의 사업에 더 이득이 되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주나라와 율도까지 전쟁 분위기에 쌓여 있는 마당에, 자칫하다가는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자리 잡은 이곳 상동시에서 쫓겨날 지도 모르는 운명 아닌가? 황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영애를 돌려주면서 태상국과 율도에 잘 보이고 내 사업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율도와 주나라에서 사람들이 올 때까지 정국과 예린을 어찌 잡아둘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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