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대동력 9,994년 5월 34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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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대월국 왕성 은허 일대 반란군 주둔지 서쪽
반란군 주둔지를 떠난 유경패는 마차를 타고 명천번 무사단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유경패는 더 이상 누더기 같은 옷이나 일반 백성들의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비단으로 된 정갈하고 아름다운 대월국 양식의 의복이었고, 머리도 귀부인 마냥 곱게 손질되어 있었다.
마차의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고 있던 그녀가 무언가 느낀 듯, 갑자기 몸을 일으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마차 주변에는 말을 타고 있는 갑주로 중무장한 명천번 도깨비 무사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그녀는 분명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기분 나쁘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유경패는 께름칙한 표정으로 좀 더 창문 밖을 둘러본 후, 다시 안락의자에 등을 기대고 피곤한 표정으로 자리에 누웠다.
길가 옆에 있는 울창한 숲에서도 유경패가 탄 마차와 명천번 무사들이 말을 타고 지나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 숲속 깊숙한 곳에 십여 명의 도깨비들이 있었다.
이들은 명천번 무사들이 호위하고 있는 마차를 조용히 따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들 무리의 맨 앞에 있는 자는 성산백 심운보 휘하에 있는 구천락이었다.
그의 옆에는 팔 한쪽이 없는 곤마가 함께 걷고 있었다.
“저 년이 어찌 명천백을 만날 수 있었더란 말이냐?”
“명천백은 보통 호색한이 아닌 자입니다. 진중에 웬 아리랑년이 들어와 다 찢어진 옷을 입고 젖가슴이고 허벅지고 훤히 드러내고 다니고 있는데 그 미색이 매우 출중하더라, 는 소문을 듣자마자 열일 제쳐두고 그 년을 보겠다고 달려갔다 하더이다.”
“망할, 그년이 그렇게 명천백에게 접근했다고?”
“그 후 그년이 명천백에게 어떻게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곧장 진중에 숨어 있던 여개와 우리 수하 대부분이 명천번 무사들에 의해 체포되어 끌려갔습니다. 그들이 끌려간 곳에는 명천백과 그 아리랑년이 기다리고 있었고, 명천백이 저들이 모두 성산백 각하의 부하가 맞는지 묻자 그 아리랑년은 여개를 지목하며 저 자가 성산백의 부하가 맞는 것은 확실하고, 나머지는 문초해보면 모두 이실직고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하더이다.”
“......그리고 어찌 하더냐?”
“여개는 바로 목이 잘렸고 다른 수하들은 문초를 당한 후 이내 목이 잘렸답니다. 제가 보지는 못했지만, 여개의 목은 그 아리랑년이 직접 베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독한 년......”
구천락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명천백이 저년을 통해 율도와 손을 잡게 된다면, 그 다음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보나마나 자신들의 지위와 영지를 보존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멍청한 놈들, 율도에 세금 갖다 바치며 종속되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천제국도 참전했으니 은허를 점령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 자신들에게 승기가 없음을 깨달은 것이겠지요.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율도에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닐까 사려 됩니다.”
“율도가 과연 저들을 도울까?”
“강운예라면, 이득이 되는 범위 내에서 명천백의 반란군들을 활용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대월국 내로 들어온 천제국군과 맞서는데 이용한다던지 하면서 말입니다.”
곤마의 말에 구천락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들키지 않게 저년과 명천번 놈들을 계속 쫓아가자. 아리랑년이 어디서 누굴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각하께서 무척 궁금해 하시니까.”
구천락은 무리들을 이끌고 발걸음 소리를 죽여 가며 계속 마차를 쫓아 걸었다.
오후 10시, 대월국 서래번 달성벌 북동쪽 일대
월말이 가까워지며 밤하늘의 두 개의 달도 점점 그믐달로 변해가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서 낮의 길이는 길어지고 있었지만, 달빛은 무디어졌다.
덕분에 천제국 패잔병들은 율도군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다. 살아 도망친 이들을 마치 동물 사냥하듯 뒤쫓아 오던 율도군들도 해가 지고 어둠 때문에 사방이 분간하기 힘들어지니 모두 자신들의 군영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백사와 염대철 등 천제국 귀족 십여 명은 달성벌 북동쪽 숲속 으슥한 곳에 몸을 숨기고 하룻밤을 보낼 준비를 했다.
대동에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숲 속의 음지에 자리 잡아 그런지 제법 쌀쌀함 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닥불을 피울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율도군들에게 발각될 수도 있었으니까.
백사는 부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말에서 내렸다. 그녀는 부관의 부축을 받아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녀는 한쪽 다리를 제대로 펴지도 접지도 못하고 있었다. 말에서 떨어질 때 그 다리를 크게 다친 모양이었다.
부관이 그녀에게 말에 싣고 있던 물과 찐쌀 등의 식량을 가져다주었다.
백사는 잠시 이것을 내려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염대철과 다른 귀족들도 말에 싣고 있던 양식으로 허기를 채웠다. 하지만 그 적은 양을 예닐곱이 나눠먹으니 순식간에 동이 나고 말았다.
“이제 내일 끼니는 어떻게 해야 하나?”
“지나는 마을에서 얻어먹으면 되지 않겠소.”
“그러다 그들이 우리를 율도군에게 밀고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도 먹어야 사는 거 아니겠소? 밥만 얻어먹고 바로 달아나면 될 터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오.”
염대철은 대월국 국왕군에서 지원 받은 식량인 찐쌀을 한 움큼 집어 입안에 털어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맨밥만 먹는 것과 다를 바 없기에 금방 목이 막혀 왔다. 그는 가죽 수통의 물을 한 모금 들이키며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백사와 부관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백사는 부상의 고통으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그의 부관이 마치 그녀를 지키려는 듯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도 지난 전투에서의 피로 때문인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를 본 염대철이 다른 귀족들에게 저것 좀 보라며 턱짓을 했다.
귀족들 모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깊어지고 찌르륵, 찌르륵 풀벌레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백사는 여전히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그녀의 부관은 이제 땅바닥에 엎드려 잠들어 버렸다.
이를 본 염대철과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르릉
그들 모두 옆구리에서 얇은 외날도를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쇳소리에, 부관이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뭐하는 거요?”
밤의 어둠 속에서도 그들 모두 손에 무언가 들고 있다는 사실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부관도 허리춤에서 외날도를 뽑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번거롭게 만들지 말고 조용히 저 세상으로 가거라. 명예롭게 싸우다 고결하게 죽은 것으로 우리가 알아서 잘 포장해 줄 터이니.”
“뭐라고? 이 배신자들, 대체 뭐하는 짓이냐?”
귀족들이 칼을 휘두르며 부관에게 달려들었다.
부관이 자신의 앞으로 달려오는 귀족의 갑주 사이로 칼을 찔러 넣었다.
푸슉!
“으, 으아아아악!”
부관은 피를 뿜으며 쓰러져 내리는 그의 팔을 붙들고 외날도로 손목을 베어 버렸다.
귀족의 손에 들고 있던 외날도가 떨어졌다. 부관은 그의 칼을 들어 양손에 외날도를 들고 다른 귀족들을 노려보았다.
“나와 대장을 죽여 어찌 하려는 것이냐?”
염대철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말했지 않나? 너와 너의 대장 모두 영웅으로 만들어 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목숨을 구할 것이고.”
“멍청한 놈들, 나와 대장을 죽여 율도놈들에게 바친다 해서 너희들이 목숨을 연명할 수 있을 것 같나?”
“너희를 죽여 율도놈들 갖다 준다 말 한 적 없다. 무엇들 하나? 쓸데없이 지체하지 말고 빨리 저 놈부터 죽여!”
염대철의 일갈에, 다른 귀족들 모두 그를 둘러싸고 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치열한 싸움 끝에 한 명의 귀족이 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수적 열세는 어쩔 수 없었다. 부관은 백사를 지키기 위해 분전했지만, 결국 몸 수십여 군데를 난자당하고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귀족들이 부관을 죽이고 뒤돌아보니,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던 백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모두 흩어져서 찾아!”
“다리를 다쳤으니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 주변부터 샅샅이 찾아 보자!”
염대철과 귀족들이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 으, 으아악!”
귀족들이 비명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수풀 사이를 살펴보던 귀족 하나가 다리를 베여 피를 철철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백사가 손에 외날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체 그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역시 멀리 도망가지 못 했군.”
염대철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내게 왜 이러는 것이냐?”
백사가 자리에 앉은 채로 그에게 칼을 겨누며 말했다.
“대장을 영웅으로 만들어 주려고. 좀 더 정확히는 영웅처럼 죽은 것으로 만들어 주려는 것이오.”
“......날 죽여 너희들에게 무슨 득이라도 될 것 같나?”
“그건 생각하고 행동하기 나름 아니겠소?
그녀가 염대철을 쏘아보고 있을 때, 어느 틈엔가 그녀의 뒤에서 귀족 하나가 그녀 곁으로 쓰윽 다가왔다.
쉭!
퍽!
귀족이 외날도로 백사의 오른손을 내려쳤다.
“으윽!”
백사는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놓치고 말았다. 팔뚝에 판금으로 된 보호대를 차고 있어 망정이지, 하마터면 손목이 절단될 뻔 한 순간이었다.
백사가 칼을 떨어뜨리자 다른 귀족들이 달려들어 그녀의 칼을 발로 멀리 차내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팔과 몸을 발로 짓밟아 눌러 버렸다.
염대철이 다가와 그녀의 얼굴 앞에 칼끝을 갖다대고 말했다.
“그래도 여자의 몸으로 기병 대장까지 올랐으니 좋은 삶 살고 가는 거 아니겠소? 이 대동에 원한 따위는 남기지 말고, 구천도 떠돌지 말고 좋은 세상으로 편히 가시오.”
그가 칼을 들어 그녀의 목에 박으려는 찰나,
귀족 하나다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잠깐, 그냥 죽이기는 너무 아깝지 않소?"
“뭔 말이오? 그럼 뭐 하자는 거요?”
“뭐긴 뭐겠소? 그거 하자는 거지. 전쟁터 나와서 여자 맛 본지도 오래되었구만.”
그러면서 다른 귀족들을 둘러보며 음탕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염대철도 잠시 칼을 거두며 말했다.
“나이 서른도 안 되서 기병 대장에 오를 정도로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오는 동안, 일찍 결혼한 남편 외에 다른 남자의 맛을 즐겨볼 시간도 없었다던데.”
“천지가 정력 넘치는 무사들로 가득했을텐데, 참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크하하하하.”
“듣기로 슬하에 어린애 하나 두고 있다지? 밖에서는 군무보랴 집안에서는 애보랴, 뭐, 즐기며 살 시간도 없이 살았을 거 같은데, 죽기 전에 그 외로움의 한 풀어주고 보내는 것도 우리가 은덕 쌓는 거 아니겠소?”
그의 말에 귀족들이 킬킬거리며 웃어댔다.
그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갑주를 벗기고,
그녀의 옷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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