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14화 (114/217)

〈 114화 〉 대동력 9,994년 5월 34일 (3)

* * *

­ 오전 12시, 대월국 서래번 달성벌 북쪽 일대

영록이 박윤수 중장을 따라 달성벌 북쪽의 전장에 도착했을 때, 차마 눈 뜨고 보기조차 힘들 정도의 끔찍한 광경이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너른 평원 위로 검은 갑주를 입은 만여 명의 율도군 무사들이, 그들의 절반도 안 되는 붉은 갑주의 천제국군들을 아무데도 도망가지 못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 나가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철갑으로 중무장한 철기병들은 군도와 편곤, 도끼와 미늘창을 휘둘러 적들을 닥치는 대로 베고, 쳐 죽이고 있었다.

철기병들은 율도 무사들 중에서도 최정예로 손꼽히는 이들이었다.

천제국 도깨비들 중 그 누구도, 율도군 철기병들의 절륜한 무예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군도를 든 철기병 무사 하나가 다음 희생 제물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미 수십의 도깨비들이 그의 손에 쓰러졌는지, 그의 군도는 물론 갑주까지 모두 도깨비의 검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때, 외날도를 들고 있는 천제국 기병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타고 있던 말은 화살에 맞아 쓰러졌는지, 말도 없이 겁먹은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며 서서 다른 도깨비들이 율도군들에게 척살당하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으리얏!”

철기병 무사가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철기병의 군도가 천제국 기병의 왼쪽 머리를 향해 대각선으로 날아들었다.

“으아악~!”

천제국 기병이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외날도로 그의 군도를 막아냈다.

챙!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순간,

철기병 무사가 군도를 든 두 손목을 반원을 그리며 회전시켰다.

그의 칼등이 미세하게 외날도를 왼쪽으로 밀어내는가 싶더니,

그 찰나에 생긴 아주 조금의 간격을 타고,

철기병 무사의 군도 날이 천제국 기병의 오른쪽 목을 향해 들어왔다.

군도의 3/4 지점이 적의 목에 닿는 순간,

슉!

철기병 무사가 군도를 뒤로 확, 잡아당기며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커어억......!”

베인 자리에서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오고, 도깨비의 입에서도 피가 토해져 나왔다.

철기병 무사는 그의 다리를 향해 다시 한 번 군도를 휘둘렀다.

도깨비의 다리가 풀썩 꺾이고 땅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마지막 공격으로 그의 목을 향해 군도가 찔러 들어왔다.

또 하나의 도깨비를 쓰러뜨린 철기병 무사는 군도를 휘둘러 칼에 묻은 적의 피를 한번 털어 내고는, 다시 새로운 상대를 찾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는 다모랑 출신 철기병 무사가 무시무시한 힘으로 미늘창을 휘둘러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천제국 기병들을 마구 도살하고 있었다.

“건방진 놈들! 어디 도망갈 수 있으면 더 도망쳐 보아라!”

그는 말 위에 타고 있는 천제국 기병을 미늘창으로 걸어 말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적을 향해 미늘창의 도끼 부위로 그의 갑주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미늘창은 애초부터 갑주를 입은 상대를 부수려고 만든 무기였다. 우악스럽게 생긴 미늘창의 도끼 부위는 인정사정없이 천제국 기병들의 갑주를 깨뜨렸고, 그 안의 몸까지 잔인하게 찍어버렸다.

철기병들의 뒤에는 말을 탄 율도군 기병 무사들이 말 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총과 활을 쏘아 천제국군들을 거꾸러뜨리고 있었다.

총기병들 옆에는 그들 부대의 지원병들이 붙어 무사들이 뇌홍식 강선소총을 쏠 때마다 장전된 새 총을 건네주고, 그들이 쏜 총을 받아 재장전 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말을 탄 상태에서 소총을 재장전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기병 부대에서는 전투시 총의 재장전은 지원병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율도군 무사들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땅바닥 위로 피칠갑을 한 천제국 도깨비들의 시신들이 하나 둘씩 쌓여갔다.

무사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가벼운 갑주를 입은 지원병들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적들을 찾아 월추로 때려죽이고 있었다.

전투는 이제 일방적인 학살이 되어가고 있었다.

적들이 전의를 잃은 것을 확인한 박윤수 중장이 명을 내렸다.

“적들에게 항복을 권하고, 항복하는 자는 무기를 압수하고 포박하라. 항복 권유에 응하지 않는 자는 참해도 좋다.”

군단장의 명은 모든 무사들에게 신속하게 전해졌다.

교차로에서 매복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115기병 여단장이 상황보고를 위해 군단장에게 달려왔다.

“현재까지 파악된 피해 현황으로는 전사 14명에 부상 37명, 죽은 말은 5마리, 상한 말은 9마리입니다.”

“적장은 어찌 되었는가? 선두에서 지휘하고 있었다던데?”

“아직 생포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전사해 시신들 사이에 끼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박윤수 중장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수염 때문에 까끌까끌해진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부상자들은 후방 구호소로 즉시 이송하고, 전장 정리가 끝나는 대로 무사들이 각자 말과 전리품들을 챙길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부여하라.”

군단장은 그리 명을 하고 말을 돌려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는 뒤에서 전장을 바라보며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영록에게로 다가갔다.

“......저와 함께 본진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이곳에 남아 좀 더 전장을 보시겠습니까?”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네, 따라 오시지요.”

영록은 군단장의 뒤를 따라 천제국군의 전초기지 부근에 세워진 율도군 기병 부대들의 본진으로 되돌아 갈 준비를 했다.

어느 틈엔가, 피 냄새와 시체 냄새를 맡은 갈가마귀 무리들이 하늘 위를 시커멓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 오전 13시, 율도 청북도 일대

마을로 내려갔던 김사미의 동지 하나가 공물론자들의 집합소로 돌아와 보고했다.

“어젯밤 아랫마을 최부자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돈이나 재물을 훔쳐 달아난 게 아니라 빨아 놓은 옷하고 음식들을 훔쳐 달아났답니다. 옷도 남자 옷, 여자 옷 이렇게 한 벌씩 훔쳐 갔다 하구요.”

그 말을 들은 김사미가 무릎을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옷이 어떤 색의, 어떤 모양의 옷인지도 알아 왔느냐?”

동지는 그가 전해들은 대로, 도둑맞은 옷에 대해 소상히 말해 주었다.

“우리한테 가진 것을 모두 빼앗겼으니 우선은 옷부터 구해야 했겠지. 그럼 그들이 다음에 어디로 갈지는 쉬 짐작할 수 있을 터.”

김사미가 곧장 모든 공물론자 동지들을 불러모았다.

“모두들, 총과 몽둥이 등, 무기들 챙겨가지고 날 따라 오시게. 다시 그 년놈들을 붙잡으러 갈 것이니. 이번에 붙잡으면 두 번 다시 도망치기 못하게 두 다리를 모두 부러뜨려 버릴 것이야.”

김사미는 공물론자들을 이끌고 다급히 집합소 밖으로 달려 나갔다.

­ 오전 14시, 대월국 서래번 서쪽 경계 일대

동금이 있는 천제국군의 전초기지에서도, 저 멀리 달성벌 일대의 하늘 위에 갈가마귀들이 시커멓게 몰려드는 것이 눈에 보이고 있었다.

바람결에 미세한 피 냄새가 섞여 있는 듯 한 느낌도 들었다.

동쪽 하늘을 바라보던 동금이 옆에 있던 참모 두억시니에게 물었다.

“백사로부터의 전령은?”

“며칠 전부터 당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낸 전령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동금은 마치 짐승 울음소리같이 그르렁 거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우리가 가진 양식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다고?”

“열흘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된다. 천제 성하께서 이곳에 당도하실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양이면 족하다.”

“하지만 율도놈들이, 천제 성하가 이곳에 당도하시기 전까지 우리를 가만 놔두겠습니까?”

동금이 참모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천제 성하의 명은 죽음으로 수행한다! 그분께서 오시기 전까지 전초기지 축성을 모두 완료한다! 그리고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이곳을 죽음으로 지킨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 오후 4시, 대월국 서래번 달성벌 북쪽 일대

율도군의 포위를 뚫고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천제국 기병들의 수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말에서 떨어진 백사는 그녀의 부관의 도움으로 간신히 사지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말에서 떨어지며 다리를 크게 다쳤고, 지금 상태로는 혼자 말에 오르지도, 걷거나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곁에는 휘하에 있던 높은 귀족 신분의 도깨비들 10여명이 동행하고 있었다.

이들도 모두 탈출하는 과정에서 여기 저기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갑주와 무기도 깨어지고 부서져 있었다.

백사는 부관의 말에 올라 몸을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

투구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그녀의 하얀 머릿결이 바람에 애처롭게 흩날리고 있었다.

부상의 고통에 패전의 아픔,

도망치고 있다는 치욕까지,

그녀는 지금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부관은 상관을 자신의 말에 태운 채, 말고삐를 잡고 아무 말 없이 걷고 있었다.

이들은 일단 대월국 국왕군이 주둔하고 있는 동쪽 호문번의 환강산성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까지 도착하려면 며칠을 더 걸어야 했고, 그 사이 율도군이 언제 또 추격해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백사와 부관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이들 중에서도 말을 타고 있는 도깨비는 단 두 명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전투 때 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걷고 있는 이들 중 염대철이란 도깨비가 있었다.

비록 지금은 백사의 밑에서 복무하고 있지만, 그는 천제 정선교의 신임을 얻고 있는 명문가 출신의 귀족이었다.

언젠가는 백사보다 더 높은 계급과 직위를 얻을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늘 말도 짧고 잘난 척만 하더니, 네년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꼴좋다!’

염대철은 평소 여자인 백사가 무장이 되기를 소원하는 모든 천제국 도깨비들이 선망하고 있는 기병 대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탐탐치 않게 여기고 있었고,

이번 패전이야말로 그녀를 기병 대장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 그의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귀족 도깨비 하나가 앞서 가고 있는 백사와 부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곧 천제 성하께서 대월국으로 친정 오실 거라 하지 않았소?”

“그렇지. 다음 달 초면 도착하신다고 알고 있소.”

“그럼 우리가 살아서 환강산성으로 돌아 간다 해도, 천제 성하께서 오시면 우리를 가만 놔두시겠소?”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옛 이야기도 모르시오? 이구 전투 때 패배로 얼마나 많은 두억시니 군 지휘관들이 숙청되었는지? 계몽 전쟁 때 역시 패전한 지휘관들과 군 수뇌부들은 가차 없이 처형당하거나 변방으로 끌려가 평생 강제 노역을 하며 살았지 않소? 이제 우리도 그들과 다를 바 없게 되는 거 아니오?”

“우리는 아니지. 적어도 나는 아니오. 내 아버지가 누구신데, 내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내가 그런 자들의 전철을 밟을 거란 말이오?”

그렇게 말은 하지만 염대철도 불안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패전의 책임을 물을 거면 어리석게 군을 이끌어 패전을 자초한 자, 그 자 하나에게만 물게 하면 그만이오. 우리는 그저 군인으로써 그 자의 명을 따른 죄 밖에 없다고 하면 되는 것이고.”

“백사 대장에게 패전의 원인 모두 전가하자는 말이오?”

“그게 사실이지 않소? 어리석게 진을 짜고 느리게 이동하다가 본대와도 거리가 멀어지고 적에게 포위당하는 우를 범한 거 아니오? 그러다가 결국 놈들이 쳐놓은 함정에 제 발로 빠지게 된 거고.”

“......”

“천제 성하께서 오시면 그리 고하고 우리는 빠져 나가면 되는 거요.”

“......그리하지 말고, 차라리 없앱시다.”

“뭐요? 백사 대장을 없애자고?”

귀족의 말에 염대철도 적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어리석은 지휘관 때문에 대패를 당했다면, 그 밑에 있던 우리도 그 지휘관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로 처벌받게 될지도 모르오. 차라리, 백사 대장과 우리 모두 강력한 율도군에 맞서 결사 항전하다가 힘의 차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끝까지 싸우다 분패했다고 하고, 백사 대장도 그 때 장렬히 전사했다고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백사 대장의 시신을 가족들에게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들어가 그녀의 시신을 수습해 가져온 거지. 그리 되면 우리는 패전 중에도 영웅적 행동을 한 것으로 칭송받을 수 있게 되지 않겠소?”

그의 말에, 염대철의 입가에 간사한 미소가 흐르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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