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11화 (111/217)

〈 111화 〉 대동력 9,994년 5월 33일 (5)

* * *

­ 오후 7시, 대월국 서래번 일대

백사의 천제국 기병들은 어린진을 이루고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율도군 기병들은 그들의 측면과 후위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틈만 나면 여기저기서 화살이 날아왔고, 심지어 총을 쏘기도 했다.

율도군의 기습이 있을 때마다 천제국 기병들은 하나씩 하나씩 쓰러지고 있었다.

그들 모두 당장이라도 말을 달려 나가 저들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백사의 명에 의해 시야에 나타난 적을 향해 응사하는 거 외에 별다른 반격은 가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천제국군이 이동하는 방향의 10리 가량 앞에 야트막한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백사가 군의 이동을 정지시켰다.

한참동안 언덕을 주시하던 백사가 전령들을 호출했다.

“......전군, 전방의 언덕 오른쪽 방향으로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우회한다. 적의 공격에 절대 대응하지 말고 선두를 따라오도록.”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전령들은 그녀의 명을 각 부대로 전달했다.

“전군 기동!!!”

백사의 외침과 함께, 어린진을 이루고 있던 천제국 기병들이 전속력으로 언덕의 오른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언덕이 있는 곳으로부터 5리 앞까지 접근했을 때였다.

펑! 펑! 펑! 펑! 펑!

땅을 뒤흔드는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언덕 위 수풀 사이에서 새하얀 포연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 율도군 포병들이 매복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쾅! 콰광! 쾅! 쾅!

포탄이 천제국군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와 폭발했다.

야포에서 쏘는 순발신관이 장착된 신형포탄이었다.

검은 폭발의 연기와 함께 포탄의 파편과 땅바닥의 돌조각들이 매섭게 튀어 올랐다.

폭발에 휘말려 갈가리 찢겨진 천제국 기병들과 말들이 사방으로 피와 살점을 흩뿌렸다.

그나마 모두 말을 달리고 있어서 피해가 크지 않았다. 게다가 율도군 포병들도 이동하는 적을 쏘기 위해 포신을 계속 돌려야 했기 때문에 다음 포탄을 날리기 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율도군의 각 포가 두 번째 포탄을 발사하기도 전, 천제국 기병들은 언덕을 빠르게 우회해 서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율도군 기병들은 천제국군들이 언덕위의 포병들을 향해 돌격하는 줄 알고 그들 뒤를 맹렬히 쫓아왔다.

포병들의 앞에는 철조망과 장애물들로 기병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고, 그 뒤에는 말에서 내린 기병들이 수풀로 위장된 진지에 몸을 숨기고 총과 활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기병들이 올라오면 일차적으로 그들이 돌격을 저지하고, 언덕 아래 기병들로 포위해서 섬멸하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천제국군들은 아무 교전도 벌이지 않고 전장을 이탈해 달아나고 있었다.

이제 점점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야간이 되면 전투를 벌이기 어려워진다.

율도군들은 소규모 정찰대를 보내 백사의 기병들을 계속 뒤쫓는 한편, 다음 집결지로의 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오후 8시, 대월국 서래번 서쪽 경계 일대

동금의 천제국군을 추격해 온 2군단장 박윤수 중장은 그들과 1천 간 (약 2km) 의 간격을 두고 그들을 둘러싸고 포위하고 있었다.

“여기가 저들의 목표지점인가? 결국 지들이 원하는 곳까지 잘 당도했군.”

박윤수 중장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적들의 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곁에 있던 용마로 소장이 답했다.

“위치를 보니, 흥원을 공략하기 위한 전초기지를 세울 자리인 듯 싶습니다.”

“아마 천제 정선교가 올 때를 대비해 이곳에 전초기지를 세우고 기다리려는 모양이지.”

“보아하니 이미 진지도 어느 정도 만들고, 방어준비도 해놓은 모양이군요. 이곳에서 천제가 올 때까지 버티고 앉아있을 모양입니다.”

“저 놈들 지휘관, 성격이 우직해서 그런 것인지 정말 무식해서 저러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군. 지 놈들이 저기서 저러고 버티는 동안, 우리가 모든 보급로를 틀어막고 말려 죽이려들꺼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옆에 물이 흐르고 있으니 식수는 해결된 것일 테고, 어떻게든 천제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지금 저들의 기병들도 이쪽으로 합류하기 위해 달려오는 중이라고도 하지요?”

“천제국 기병들이 저들과 합류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박윤수 중장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이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기병전을 벌이기 좋은 벌판이 하나 있었지.”

“이디인지 압니다. 그곳에서 적을 맞이하실 겁니까?”

“오늘 밤은 저들도, 우리도 많이 지쳤으니 병력들을 푹 쉬게 하고, 내일 대부분의 병력들을 그곳으로 돌릴 것이다. 천제국 기병들부터 먼저 몰살시키고, 저들은 천제가 오기 전까지 모두 처리한다.”

박윤수 중장이 지휘봉으로 두억시니들이 모여 있는 천제국군의 숙영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 전투에 마루한도 모시고 갈 예정이신지요?”

“그럴 생각이네만,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네. 그렇지 않아도 아까 오전에 두억시니 하나를 혼자서 잡아 내셨다더군? 전장에 나서도 전투에는 휘말리지 마시라 그리 당부드렸건만, 쯧.”

“이미 군사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합니다. 덕분에 군의 사기도 크게 올랐으니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행여나 다치시거나 잘못되시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서네. 그리 되면 내가 태상국 기하를 뵐 면목이 없어지니.”

“혼자서 두억시니를 잡아낼 정도의 실력이면 전투에서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다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전투의 선봉에 서거나 한 부대를 지휘하는 것도 아닌데, 마루한이 전장을 자유롭게 둘러보시도록 놔두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용마로 소장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때로는 학생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믿고 지켜봐 주는 것도 교사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감히 마루한을 가르치는 교사가 될 수 있겠는가? 난 다만 마루한을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안전하게 모시는 게 우선이네만...... 일단 자네 말대로 하도록 하지. 대신, 자네도 마루한께서 잘못되시지 않나 수시로 살펴주길 바라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은 적진 주변으로 율도군을 어떻게 배치하고 감시할지에 대해 좀 더 의견을 나눈 후,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 오후 10시, 율도 청북도 일대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이제 월 말이 다가오며 두 개의 달도 둥근 모습을 잃고 얇은 초승달로 변해가고 있었다. 달빛은 그 전보다 약해지고 어둠은 전보다 더 짙어져 있었다.

정국은 어둠 속에 자신의 맨몸을 숨긴 채 산 아래 마을로 내려왔다. 아까 두 사람이 붙잡혀 있던 공물론자들의 집합소 반대쪽에 위치한 마을로 가는 것이었다.

그는 우선 마을 어귀에서 여기 어떤 집들이 있나 스윽 살펴본 후, 그 마을에서 가장 잘살 것 같은 으리으리한 기와집으로 다가갔다.

율도 백화에서 본 회반죽이나 돌, 대리석으로 지어진 근대적인 건물들과는 달리, 아직도 이런 시골 마을에는 옛날 기와집, 초가집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기와집의 담벼락을 훌쩍 뛰어 넘어 빨랫줄에 걸린 옷들을 집어 입기 시작했다. 역시 부잣집이라 그런지 빨랫줄에 걸려 있는 옷들 모두 옷감이나 모양이 제법 세련된 것들이었다.

빨랫줄에 걸린 옷들 중 예린이 입을만한 옷도 골라 보았다. 그중에 제일 마땅한 것은 이 집 부인이 입던 것으로 보이는 치마와 상의였다. 도망치는 중 치마를 입고 다니기 거추장스럽긴 하겠지만, 그 외에는 딱히 그녀에게 입힐 만한 옷은 없었다.

정국은 옷과 속옷 등을 몇 벌 더 챙기고, 문지방돌 위에 올려진 남자 여자 신발들도 훔쳤다.

‘옷과 신발은 다 되었고 다음엔......’

정국은 찬간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아궁이 위 솥뚜껑을 들어보니 밑에 들러붙은 누룽지에 물을 부어 불리고 있었다. 정국은 옆에 있던 그릇에 누룽지들을 박박 긁어 모두 담고는, 찬간을 더 뒤져 반찬거리 몇 개를 더 챙겼다.

그렇게 다시 돌아가려할 때, 갑자기 이 집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손으로 무어라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말하기 힘든 급한 사정이 있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훗날 돌아와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정국은 이 글을 남기고는 다시 담벼락을 넘어 산을 향해 달려갔다.

예린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정국은 그녀에게 훔쳐온 옷과 신발을 입히고 가지고 온 누룽지와 음식을 나눠 먹었다.

둘 다 많이 굶주렸는지, 음식은 금세 동이 나 버렸다.

“와, 누룽지가 이렇게 맛있었나? 난 우리 아빠가 식사 후에 누룽지에 뜨거운 물 부어서 숭늉으로 드시거나 가끔 누룽지 말린 거 과자처럼 드시는 거 보고 왜 좋은 음식들 놔두고 그런 거 드시냐고 뭐라 하기도 했는데......”

“난 누룽지라는 거 처음 먹어봐. 황실에서도, 율도에 와서도 이렇게 먹는 건 처음이라.”

“아, 갑자기 집에서 먹던 음식들이 그립다. 경무관에서 먹던 학식들도 그립고, 경무관 끝나고 친구들이 다과 먹는 것도 그립고......”

예린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예린아, 그럼...... 우리 다시 돌아갈래?”

“돌아가? 어디로, 집으로?”

“응, 지금 이상한 놈들 때문에 너도 큰 일 당할 뻔 했고, 계속 이렇게 쫓겨 다니다가는 정말 위험해질지도 모를 거 같아서.”

“......”

“내일 아침 해가 뜨면 가까운 관청에서 가서 도움을 청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럼 너는? 너는 어떻게 되는데?”

“나는...... 다시 주나라로 돌아가게 되겠지.”

“그럼 우리 다시 헤어져야 하는 거야?”

“......아마도.”

그의 말에 예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 너랑 다시 헤어지기 싫어. 이렇게 헤어지면, 우리 영영 다시는 못 만나게 될 수도 있는 거잖아? 아무리 위험해도 우리 원래 계획대로 대동 동부로 같이 도망가자, 응?”

“가지고 있는 돈 다 빼앗겨서, 지금 당장 배를 탈 돈도, 대동 동부에 가서 집 사고 터전을 잡을 돈도 없어.”

“그럼 돈만 있으면 되는 거 아냐? 돈만 있으면, 나랑 같이 대동 동부로 갈 수 있는 거잖아? 아까 네가 다 책임 질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며?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헤어질 생각이나 하는 거야?”

말은 분명 그렇게 했지만, 정국은 아까 기와집에서 옷과 음식을 훔쳐 나오면서도 커다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 집에서 대동 동부로 가기 위한 돈을 훔칠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황실에서 황자로서 살아오고 교육받아온 사람이었다.

자신의 사욕을 위해 남의 돈까지 훔쳐야 하는 현실 앞에, 커다란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정국은 함참동안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어차피 예린과 함께 하기 위해 내 신분까지 버리기로 한 마당인데.’

정국이 결국 결심한 듯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나, 네 곁을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네게 약속한대로, 내가 다 책임질 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마. 우리 같이 대동 동부로 떠나는 거야.”

예린은 그의 말에 눈물을 훔치고 밝게 웃으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지금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율도의 모든 국경과 항구에는 전시 특별 경계령이 내려져 있었다.

율도인이나 율도의 상선들은 물론, 외국인이나 외국의 상선들이 육로상 국경이나 바다의 항구를 통해 율도를 드나들 때, 다른 때보다 더욱 엄정한 검문검색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치는 전쟁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시 예린과 정국을 찾기 위함이었다.

아무래도 영애와 황자를 찾는 일이다 보니 다른 현상 수배범들 찾는 것 마냥 길거리 여기저기에 전단지를 붙이거나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국경 지대에 있는 모든 군사들 및 관리들에게는 두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가 배포되어 있었고, 이를 근거로 국경을 오가는 이들의 얼굴을 일일이 대조하며 검문검색이 진행되고 있었다.

심지어 어부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갈 때에도 군사들이 배를 한번 수색한 뒤 승인을 얻어 나갈 수 있었다.

강운예가 예린과 정국이 율도 밖으로 도망 나가지 못하게 아예 국경을 철저하게 통제해버린 것이다.

“영애나 황자 그 샊...... 아니, 그 녀석 놓치는 국경 근무자 놈들은 군법이 아니라 내 방법대로 처벌할 거라고, 그렇게 모두 전달해!”

강운예는 대월국으로의 출정 준비를 서두르는 와중에도 계속 자신의 딸과 그 새끼, 아니 황자 정국을 찾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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