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110화 (110/217)

〈 110화 〉 대동력 9,994년 5월 33일 (4)

* * *

­ 오후 15시, 율도 청북도 일대

김사미가 돌아왔을 땐, 예린을 겁탈하려던 사내놈은 얼굴이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 뭉개진 채 숨을 거둔 후였다.

그가 집합소에 있던 동지들에게 물었다.

“어찌된 일인가?”

“이 친구가 쉬고 오라고 해서 잠시 밖에 다녀왔는데, 돌아오고 나니 창고 문도 열려 있고 그 년놈들도 사라져 있고...... 이 친구도 이 꼴이 되어 있었습니다.

피떡이 되어 죽은 사내놈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정국과 예린이 그의 옷을 가지고 간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옷은 창고 바닥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김사미는 짚이는 것이 있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년놈들 옷은 모두 찢어 버렸으니 다른 옷을 구해 입지 않는 이상 맨몸으로 멀리 도망가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동지들을 불러 모아 집합소 부근에 몸을 숨길만한 곳을 찾아 나섰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곳은 인근에 있던 숲이 우거진 산이었다.

­ 오후 1시, 율도 청북도 일대

산속으로 달아난 예린과 정국은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닫지 않은 숲속 깊숙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둘 다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기에, 탁 트인 곳으로 활보할 순 없었다.

산의 7,8부 능선 안쪽 햇볕도 잘 들지 않을 만큼 수풀이 무성한 곳에 도착한 두 사람,

마침 부근에 산의 수원에서 흘러 내려오는 작은 골짜기 개울물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개울가에 엎드려 입으로 물을 들이켰다.

“너, 팔에 피......”

물을 마신 예린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가죽이 벗겨지고 핏물이 흐르는 그의 팔을 바라보았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정국이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그고 피를 씻어냈다. 물에 닿은 상처가 시큰했던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예린이 일어서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나무의 넓은 잎사귀들을 가져와 물에 씻고는, 그의 상처를 덮어주었다.

“일단 이거로라도 누르고 있자. 지혈이 될 거야.”

예린은 두 손에 잎사귀를 들고 정국의 상처 난 팔을 감싸 쥐며 말했다.

“하마터면 너 말고 다른 놈에게 먼저 순결을 빼앗길 뻔 했잖아.”

예린의 눈에 다시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내 처음을 너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어.”

“나도 그래. 내 처음을 너 말고 다른 여자와 하고 싶지 않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정국을 바라보던 예린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나도......”

서로의 혀를 교차하던 두 사람,

예린이 몸을 숙이며 정국의 다리 사이에 입을 가져가려 했다.

“예, 예린아, 잠깐만!”

“왜?”

“지금 지혈하는데 네가 그러면...... 나 흥분해서 피 안 멈춰!”

“......쳇.”

“게다가 언제 놈들이 쫓아올지도 모르고, 너와의 처음을 이런 풀밭위에서 하고 싶지 않아.

“난 너에게 내 순결을 줄 수 있다면 흙바닥이라도 상관없는데?”

“이런 데에서 그 짓하면 여자 건강에 안 좋다고 배웠어! 우리 좀 만 더 참았다가 좋은 데 찾아가서 하는 거로 하자.”

“그래, 알았어. 근데 지금 우리 옷도 다 뺏기고 돈도 다 뺏겼는데 이제 어쩔 거야?”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넌 아무 걱정 마.”

정국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 오후 3시, 대월국 서래번 일대

백사가 이끄는 병력의 수는 모두 7천,

보병 없이 모두 기병들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어린진은 선두에 선 보병들이 정면을 두텁게 막아주면 기병들이 유연하게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적의 빈틈을 노리는 진법이었다.

하지만 보병이 없는 백사의 부대는 기병들로만 이 어린진을 구현해야 했다.

그녀는 정면에 창기병을 배치해 보병의 역할을 대신하게 하고, 후미에 총기병을 위치시켰다.

좌우 익측에도 창기병들을 사선으로 세워 적의 측면에 대한 기습에 대비했다.

“......우리는 이미 적의 땅에 들어와 있다. 율도놈들, 분명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백사는 사방으로 척후를 보내 적정을 탐지하며 조심스레 군을 이동시켰다.

낮의 해가 가장 뜨거워졌을 무렵이었다.

척후대 대장이 백사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진형 좌측에 나가있던 척후대 일부가 사라졌습니다!”

백사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며 명했다.

“......놈들이 왔다. 전군 전투 준비!”

부관이 다가와 물었다.

“진형을 좌측으로 돌리시겠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놈들은...... 사방에 있다.”

붉은 갑주를 입은 천제국 기병들이 진형을 갖추고 주위를 경계하고 있을 때였다.

휙!

100보는 더 떨어진 우측 언덕 위에서 화살 하나가 천제국군의 진을 향해 날아왔다.

“으악!”

미처 피하지 못한 기병이 화살에 맞아 낙마했다.

“어디냐? 어디서 쏜 거냐?”

“저기다! 저 쪽 언덕에서 날아왔다!”

“쫓아라!”

우익에 있던 기병들이 화살이 날아온 곳을 향해 달려가려는 찰나였다.

“전군 부동(?, 움직이지 마)!!!”

어지간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백사가 소리를 질러 부대의 움직임을 막았다.

우익의 지휘관이 달려와 말했다.

“우리 군사들이 어디서 화살이 날아오는지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적을 쫓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백사는 고개를 저었다.

“......적을 쫓겠다고 진형을 흩트리면...... 우리 모두 죽는다.”

그녀는 이것이 자신들을 분산시키고 각개격파하려는 율도군의 계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진형을 단단히 유지하고 계속 서쪽으로 이동한다. 적의 기습에 방어만 하고, 내 명이 있기 전까지 적과 싸우지 마라.”

천제국 기병들은 어린진의 진형을 유지한 채, 다시 천천히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진형의 좌우에서 산발적으로 화살들이 날아왔다. 심지어 율도군 기병들이 그들의 눈에 보이는 곳까지 다가와 공격하는 시늉을 했다가 다시 기수를 돌려 달아나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적의 도발에도, 천제국 기병들은 지휘관 백사의 명에 따라 함부로 준동하지 않았다.

­ 오후 5시, 대월국 서래번 서쪽 경계 일대

진미령은 오전에 보았던 장면이 잊히지 않고 있었다.

‘천제국 무사가 어째서 우리 왕가의 문장이 박힌 가죽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전시 식량을 담아 주는 주머니가 확실해 보였는데?’

그녀는 율도군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흥원의 무사들과 함께 야영을 하고 있었다.

흥원공녀를 따라다니고 있는 율도군 지휘관은 앞서 적정을 살피고 오겠다며 십여 명의 기병 무사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고 없는 상태였다.

진미령의 곁에 앉아 있던 젊은 도깨비 무사, 천태랑이 말했다.

“그냥 태진과의 국경 가까이 내려갔다가 다시 장범강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쉽게 호문번에 닿을 수 있는 것을, 왜 율도군들은 우리를 데리고 먼 길을 돌아가려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장범강 남쪽에 주둔하고 있는 반란군은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진미령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야 모르는 일이지. 우리 흥원처럼 반란군 잔당이 남아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니.”

“지금 율도군 군단장이 상대하고 있다는 반란군 병력들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북쪽 멀리 있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까 천제국의 기병은 북쪽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던 남쪽 길로 이동하고 있었을까요?”

“율도군을 피해 일부러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지 않나?”

“게다가 우리를 따라다니는 율도군 기병 지휘관은 계속 우리를 호문번이 있는 동쪽이 아닌 남쪽으로만 데리고 가려는 거 같습니다. 마치 북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 상황을 우리가 모르게 하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건 너무 지나친 비약 아닌가? 저들은 그저 우리가 전투에 휘말리지 않도록 안전한 길을 찾기 위해 힘쓰고 있을 뿐이야.”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진미령도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공녀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먼저 호문의 환강산성으로 달려가도 되겠습니까? 흥원공 각하께서도 부재하신데, 공녀님도 이런 식으로 율도군만 따라다니며 흥원을 오래 비우시는 것도 좋지 않다 사려 됩니다.”

천태랑이 저 멀리 모여 앉아 있는 율도군 기병 무사들이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제가 가서 흥원공이 무탈하게 계신지 확인하고 현재 번의 상황에 대해 아뢰고 오겠습니다. 공녀님께서는 저들과 잠시 더 동행하시다가 다시 흥원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천태랑의 승마 솜씨라면 흥원번 무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이었다. 다른 이들이 열흘 걸려 갈 거리도, 그는 엿새면 충분했다.

“......율도군들한테는 자네가 가정에 긴한 일이 생겨 돌아가게 되었다고 하겠네.”

“그럼 지금 즉시 출발하겠나이다.”

천태랑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율도군 무사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천태랑은 율도군 기병 무사들의 눈을 피해 야영지를 벗어나 호문번이 있는 동쪽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10리가량 말을 달렸을 때의 일이었다.

쉬익!

퍽!

“으윽!”

천태랑의 갑주와 투구 사이 그 좁은 빈틈으로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편전이었다.

화살에 맞은 충격으로 그는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다행히 목을 비껴 맞아 즉사는 면했지만, 쇄골 뒤쪽 어깨에 편전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헉, 커헉, 컥!”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토해져 나왔다.

천태랑은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 틈엔가 검은 갑주의 율도군 기병들이 다가와 자신의 주변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모두 활에 화살을 재고 그를 겨누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아까 100보 밖에서 천제국 기병을 단 한 대의 화살로 맞추었던 무사도 있었다. 그는 천천히 통아에 편전을 메겨 활에 걸고 천천히 그의 얼굴을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있던 율도군 기병 지휘관이 말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흥원 공녀가 네게 무어라 명을 내렸느냐?”

“......”

“공녀가 네게 혼자 환강산성에 다녀오라 시키더냐?”

“......”

천태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병 지휘관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그의 손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자검으로 향하려는 순간,

슉! 슉! 슈슉! 슉! 슉!

율도군 기병 무사들의 화살이 일제히 그에게로 날아왔다.

화살들 모두 갑주와 투구로 보호되지 않는 목과 얼굴에 정확히 박혔다.

안면에 온통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꽂힌 천태랑의 시체가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무사들이 죽은 천태랑에게 다가와 몸을 수색했다.

“문서나 편지 같은 건 없습니다.”

“흔적 남기지 말고 묻어 없애라.”

기병 지휘관의 말에, 무사들이 말 안장에 달린 야삽을 꺼내 시신을 묻을 땅을 파기 시작했다.

부하 무관이 지휘관에게 다가와 말했다.

“공녀가 더는 우리를 믿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 군단장님께서 일러주신 상황에 다다르지는 않았다. 앞으로 당분간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계속 똑같이 행동할 수 있도록. 때가 되면 그 때 다시 이야기하겠다.”

율도군 기병들은 천태랑의 시신을 흔적도 없이 매장하고 진미령이 야영하고 있는 곳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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